2009. 4. 25. 01:57

오사화(戊午士禍)


순리대로 하면 임금이 될 수 없었던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었던 무리수는 이렇게 먼 훗날까지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양대군의 등장에 힘을 모았던 훈구파는 왕권에 능가하는 권세를 부릴 때도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사회의 개혁을 꿈꾸는 소수파는 있는 법 -그들은 사회 개혁을 외치며 훈구파의 권세를 줄여야 한다. 왕권의 강화를 외친다.-사림이다.


연산군의 부친 성종이 사림을 등용한 것은 사림의 개혁 성향이 좋아서가 아니라 왕권을 능가하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등장한 사림은 훈구파의 비정과 비리를 강하게 공격했고, 훈구파는 몇 차례 역습하려 했으나 성종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림파가 예뻐서가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왕권을 강화하기 때문이었다.


사림파는 세조의 즉위 자체를 반인륜적이라고 부인하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했다.

왜나고? 그들을 중앙 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 힘은 세조의 직계자손 이었기에

그러나 세조의 등장을 은유적이라도 반인륜적임을 후세에 알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믿고

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 기사관(記事官·정6품) 김일손은

'세조가 의경세자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며느리를 탐했다,'라고 사초에 적었다.


사림은 연산군이 즉위하자 쓴 소리 마다하지 않는다. 상대를 얕본 것이다. '항상 그들의 정의가 이긴다.' 믿었으리라.

그러나 연산군은 대국적 흐름을 보는 안목이 부족했던가? 그는 사림파의 쓴 소리 자체가 듣기 싫었다.


큰 것이 잘못되었다 주장하는 사람은 작은 불의에도 참지 못하는 법


김일손은 직속상관인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이 세조 때 전라감사가 된 것은 불경을 잘 외웠기 때문이고, 또 정희왕후 상(喪) 때 향(香)을 바치지도 않고 장흥(長興)의 관기 등을 가까이했다고 사초에 기록했다. 이극돈이 고쳐줄 것을 부탁했으나 김일손은 단칼에 거부했다.


이극돈은 수양대군의 즉위를 계기로 등장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김일손은 훈구파의 정치행위에 극도의 불신감을 가진 사림파였다.


이극돈은 급했다.

자신의 기록이 보여 질까 두려웠다. 방법은 하나 뿐.

김일손을 허위사실로 왕권을 모욕한 대역 죄인으로 만들어 그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케 하는 방법 뿐 이었다. 찾아 낸 것이 문제의 사초다.

연산군은 세조가 사망했던 1468년에 다섯 살에 불과했던 세조 때의 궁중 비사를 알 수 없는데도 이를 적은 것이 누구에게 들어 그런 기록을 했는지를 일손에게 물었다.


일손은 “국가에서 사관을 설치한 것은 역사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므로, 신이 직무에 이바지하고자 감히 쓴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이같이 중한 일을 어찌 감히 사람들과 의논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본심을 다 털어놓았으니, 신은 청컨대 혼자 죽겠습니다” 라고 거부했다.


세상사 그대로 끝나는 법을 보았는가?

훈구파 그들은 이참에 사림의 씨를 말리고 싶었다.


이 잡듯 뒤지니 김일손이 충청도 도사(都事) 시절 “예로부터 제왕은 배우자 없는 독주(獨主)가 없거늘, 문종만은 배우자 없는 독주이옵니다”라며 소릉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생각났다.-소릉은 문종의 부인이며 단종의 모후 권씨의 무덤인데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이후 파헤쳐졌다는 무덤이다.-


그러나 이를 사림 모두의 세조 체제를 부인하는 역심으로 몰기 위해서는 부족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성종 23년(1492) 이미 사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다.


“정축년(丁丑年·세조 3년) 10월 나는 밀양에서 경산(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잤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중국 남방의 강)에 잠겼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라고 시작하는 그리 길지 않은 글이다.


은유법으로 가득한 글은 해석이 필요했다.

훈구파의 유자광은 나름의 해석을 붙인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글의 정축년 10월이 단종이 세조에게 살해당한 세조 3년 10월을 뜻한다는 점이었다. 김종직은 항우에게 죽은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항우를 세조에 비유해 단종을 죽인 인물이 수양임을 암시한 것이다. 의제의 시신이 ‘빈강에 잠겼다’라는 내용도 ‘노산이 해를 당한 후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는 <아성잡설>(鵝城雜說) 등의 기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훈구파의 유자광의 설명을 듣고 연산군은 흥분했다. 그 역시 훈구파처럼 항상 반대하기 좋아하는 사림파를 제거할 호기로 생각한 것이다.

또 필요가 있었다.

경상도와 제천 등지에서 지진이 일어나 임금의 실덕 때문이라 민심이 흉흉했다.

지금은 가당치 않으나 그 탓을 사림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훈구파는 병자년(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난 해)에 난역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라고 외쳤다. ‘난역을 꾀한 신하들’이란 사육신을 비롯해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켰던 인물들을 뜻한다. 이런 ‘조의제문’에 대해 김일손은 거꾸로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정의했다. 충성스런 분노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훈구파와 사림파가 한 하늘 아래 살기는 어려웠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행했다.


김일손·권오복·권경유 세 사신(史臣)은 대역죄로 몰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다.


죽을 때 김일손의 나이 만 34살에 불과했다.


김일손은 정5품 정도의 벼슬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세계관을 펼쳤다.


그의 호 탁영자(濯纓子)는 ‘갓끈을 씻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에서 따온 것이다. 창랑의 물이 흐린데 갓끈을 씻으려 한 김일손. 그만큼 세상에 분노했고, 그만큼 세상을 사랑한 것이리라.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는 사후에도 가혹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의 갑자사화 때 ‘김일손의 집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라’고 명하고, 이미 사망한 김일손의 부친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의 첩자(妾子) 김청이(金淸伊)·김숙이(金淑伊)까지도 목을 베어 죽였다.


이들을 죽이며 연산군은, “세조께서는 가문을 변화시켜 임금이 되신 분인데, 이와 같은 말을 차마 하였으니, 어찌 이보다 더한 난신적자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중종반정 뒤 김일손은 복관되고 문민공(文愍公)이란 시호도 내려졌지만


중종 때 다시 김일손과 같은 사림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처럼 역사의 어두움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었다.



흐린 시대에 쓴소리를 적은 대가로 연산군은 김일손을 능지처참하고 그의 첩자들까지 죽였다. 경북 청도군에 있는 김일손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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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