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그냥'에 해당되는 글 486건
- 2007.08.07 ‘파르헤지아’(parrhesia)
- 2007.08.07 아프가니스탄
- 2007.08.07 인질 협상
- 2007.08.07 먹고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http://wordincarnate.wordpress.com/2009/01/24/parrhesia/
파르헤지아를 풀어쓰면, ‘솔직하게 숨김없이 진실 말하기’를 뜻하지만,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다 파르헤지아인 것은 아니다. 파르헤지아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위험을 불러올 때에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파르헤지아 속에서 화자는 (궤변으로) 설득하기가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기를 선택하며, 거짓이나 침묵이 아니라 진실을 선택하고, 생명과 안전이 아니라 죽음의 위험을 선택하며, 아첨이 아니라 비판을,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를 선택한다.”
파르헤지아를 행하는 사람을 파르헤지아스트라 한다. “파르헤지아스트는 생각을 말할 때 신실하며, 그의 의견은 진실이다. 그는 그가 참이라고 아는 것을 말한다.”
에이즈가 온몸을 난타하던 생의 말기에 ‘진실의 용기’가 파르헤지아라고 역설한푸코(1926~1984)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인에게서 파르헤지아스트의 완벽한 사례를 보았다고 말하며
그러나 그 시대의 정치인에게도 파르헤지아의 미덕은 요청됐다.고 따끔한 충고를 하고 있다.
만약 파르헤지아스트가 정치영역에서 설 자리를 잃고 궤변가나 아첨꾼이 그 자리를 채운다면, 정치는 결국 껍데기만 남게 된다. 진실을 감추고 침묵 뒤에 숨어 위기를 피해 가는 것은 파르헤지아가 아니다.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파르헤지아를 찾는 것은 연목구어인가.
'그저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포영화나 위험한 스포츠(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이유 (0) | 2007.08.07 |
---|---|
지구의 나이 (0) | 2007.08.07 |
아프가니스탄 (0) | 2007.08.07 |
인질 협상 (0) | 2007.08.07 |
먹고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0) | 2007.08.07 |
아프간은 기원전부터 문명과 물산의 교류와 정복자들의 통로였다.
칸다하르는 유서 깊은 도시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 원정 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종족 부족들이 섞여 살던 이 지역에서 아프간인들이 독자적 왕조의 틀을 짠 것은 거의 18세기에 이르러서다.
수백년에 걸쳐 아프간을 세력 판도 안에 넣으려고 쟁탈전을 벌이던 북쪽의 아스트라한 왕조, 서쪽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동쪽 인도의 무굴 왕조가 쇠퇴의 기미를 보일 때였다.
아프간 사람들의 다수를 구성하는 파슈툰의 여러 부족들은 이 세력들을 몰아낸 뒤 ‘로야 지르가’라는 장로회의에서 부족장의 한 사람 아마드 샤를 지도자로 뽑았다.
그는 칸다하르를 도읍으로 정하고 스스로를 파슈툰어로 ‘진주의 시대’라는 의미의 두라니로 칭했다. 두라니 왕조의 시작이다. 아마드 샤는 25년의 치세 기간 영토 확장에 몰두해 대제국을 건설했다. 남쪽으로는 현재 파키스탄의 카라치 등 아라비아해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무굴제국의 수도인 델리와 카슈미르 지역, 서쪽으로는 페르시아 중앙부까지 뻗쳤다고 한다.
하지만 두라니 왕조는 내분으로 몰락하고 무하마드자이 왕조가 1820년대에 출범해 마지막 왕 자히르 샤까지 약 150년 지속했다. 새 왕조는 영국과 세 차례나 전쟁을 벌이면서 왕국의 명맥을 유지했다.
몇 주전 마지막 국왕 자히르 샤가 92살을 일기로 사망했다. 1933년 19살의 젊은 나이에 즉위해 73년 쿠데타로 끝난 그의 재위 기간은 아프간 역사상 비교적 안정된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국내 통치를 능숙하게 했다기보다는 19세기 내내 이 지역에서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이라 불린 쟁탈전을 펼치던 영국과 러시아의 상황 변화 때문이다. 영국은 1차 대전 후 인도 대륙에서 번진 독립운동을 막기에 급급했고,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성공과 함께 성립한 소련은 국내 안정 기반을 다지느라 제정시대의 남진정책을 이어갈 여력이 없었다.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의 두 당사자 영국과 소련은 모두 쓴맛을 봤다.
영국령 인도제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이유로 아프간에 인도인 용병을 주축으로 한 병력을 파견했다가 두 차례나 호되게 당한다. 영국의 식민지 경영에서 보기 힘든 군사적 패배였고, 그 결과 인도 총독이 두 번 경질된다.
영국은 2차대전 후 인도 대륙에 대한 지배를 포기함으로써 떨어져나갔고,
소련은 1979년 호기 있게 아프간 침공을 감행했다가 자멸의 구덩이를 팠다.
이제는 빈라덴을 찾아 나선 미국의 차례라고 말한다.
한국은 이 지역에 이렇다 할 연고도 없고 축적된 경험도 없다. 미국의 압력과 국제 공헌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에 끌려 파병을 했고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지 않은 맹목적 순진함이 덧붙여
곤경을 초래했으니 갑갑하기 그지없다.
'그저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구의 나이 (0) | 2007.08.07 |
---|---|
‘파르헤지아’(parrhesia) (0) | 2007.08.07 |
인질 협상 (0) | 2007.08.07 |
먹고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0) | 2007.08.07 |
<제7의 봉인>(Det Sjunde Inseglet / The Seventh Seal, 1957) (0) | 2007.08.07 |
1840년 캐나다 래브라도 해안에서 40여명이 탄 배가 난파했다.
사람들은 12명이 겨우 탈 수 있는 구명보트에 모두 올라탔다. 폭풍우가 몰려왔다. 몇몇은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나머지도 보트가 감당할 순 없었다.
선장은 고심 끝에 폭풍우를 견뎌낼 수 없을 듯한 노약자부터 내리게 했다.
보트에 남은 이들은 구조됐다.
법정은 선장에게 ‘학살죄’를 물었다.
납치범이 인질 석방의 대가로 돈을 요구할 때, “그까짓 돈이 문제냐”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납치범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하고, 또다른 인질극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납치범과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는 게 도덕 원칙에 더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력으로 인질을 구하려면 희생이 더 커질 수 있다. 인질 살해 위협 앞에서 우리가 평온할 수도 없다.
누군가는 납치범과 더 협상을 벌이고, 어차피 완벽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 결과가 나쁠 때, 우리는 협상 대표를 희생양 삼아 자신의 양심을 달래고 싶을지 모른다.
그래서 호소합니다.
탈레반, 그 뜻이 ‘이슬람 경전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라 합니다. 그 뜻을 알고 보니 그 명칭에서 경건함과 순수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지혜와 이성도 느낍니다. 이번에 발생한 사태로 뒤늦게 갖추게 된 인식입니다. 그 전에 당신들에 대한 이해가 넓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 민족의 종류가 수없이 많듯이 종교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 세계 3대 종교가 이슬람교·불교·기독교입니다. 이 세 종교가 세계 3대 종교로 꼽히는 것은 단순히 신도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마호메트는 약하고 불쌍한 자들을 괴롭히거나 업신여기지 말고 끝없이 도우라는 무한사랑을 가르치는 동시에 엄한 율법까지 만들었습니다. 이슬람, 당신들의 순결한 실행 라마단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의 13억 무슬림들은 그 단식기간을 통해 나보다 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괴로움과 고달픔을 생각하며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마음에 아로새기고, 금식한 만큼을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베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결한 인간다움입니까. 세계 어느 나라 어떤 곳에서나 날마다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열정과 동시에 라마단을 단 한 번도 어김없이 지켜 나가는 엄격함이야말로 당신네 무슬림들이 얼마나 철저하며 순수한 종교인들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여라도 당신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들이 ‘이교도’라고 좁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우리의 민족 성원이고, 우리의 국민이고, 우리의 형제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국민은 그들이 무사하게 귀국할 수 있기를 한마음 한뜻으로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자비롭게 처리함으로써 당신들은 이슬람의 고결함을 세계인에게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이슬람 사원이 있습니다. 이번 일을 슬기롭게 해결하여 이 땅에서 이슬람이 더 번창하고, 당신들의 조국 아프가니스탄과 대한민국이 더욱 친밀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과에 대해 정치적 논란을 미리 계산하며 행동하는 무리에 대해
그 들이 정말 치졸한 짓거리하고 있음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저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르헤지아’(parrhesia) (0) | 2007.08.07 |
---|---|
아프가니스탄 (0) | 2007.08.07 |
먹고 사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0) | 2007.08.07 |
<제7의 봉인>(Det Sjunde Inseglet / The Seventh Seal, 1957) (0) | 2007.08.07 |
적신월(赤新月) (0) | 2007.08.07 |
안정된 경제력에 그럴듯한 직업에 공부 잘하는 자녀까지 둔 사람의 무기력과 우울은 이해할 수 없는 사치한 투정쯤으로 여겨진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재물이 넉넉하면 어지간한 다른 결핍들은 능히 견딜 수 있다고 믿으며
그 사람의 고통을 이야기 하면
많은 이들은 ‘그래도 그런 고통 한번 겪어보았으면 좋겠다’고 부러운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 성과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 인간의 행동을 비합리적이고 소모적인 의사결정인 것처럼 취급하는 사회적 인식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와 관련된 한 연구에서,
수감자들은 목숨을 겨우 유지할 정도로 최소량의 식수만을 지급받았는데 어떤 이는 그걸 반만 먹고 반은 남겨서 자기 몸을 씻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서 그들의 행동은 어리석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식수로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물로 몸을 씻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신기하게도 식수를 남겨서 자기 몸을 씻은 사람들의 생존율이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높았다는 게 연구의 결과다.
우리 중 누군가는 생존에 필수적이라 여겨져온 양의 수분을 공급받는 것보다 인간으로서 자기 품위를 유지할 때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그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프가니스탄 (0) | 2007.08.07 |
---|---|
인질 협상 (0) | 2007.08.07 |
<제7의 봉인>(Det Sjunde Inseglet / The Seventh Seal, 1957) (0) | 2007.08.07 |
적신월(赤新月) (0) | 2007.08.07 |
전직 국회의원의 말 (0) | 2007.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