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2949건

  1. 2007.01.10 잊혀진 영웅들
  2. 2007.01.10 이승만
  3. 2007.01.10 단원의 풍속도
  4. 2007.01.09 구직 조봉암 3.15부정선거
2007. 1. 10. 03:02

-= IMAGE 1 =-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몽학(夢鶴) 이 명 하(李命夏) 선생 (1878. 1. 23 ~ 1921. 3. 3)

대한독립단 무장대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나아가 국내에서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조직인 보합단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의주·용천·선천 등지에서 친일파 관리들을 숙청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 IMAGE 1 =-

이봉창

-= IMAGE 1 =-

김좌진

-= IMAGE 1 =-

안중근

-= IMAGE 1 =-

유관순

-= IMAGE 1 =-

신채호

-= IMAGE 1 =-

일강(一江) 김 철(金澈) 선생 (1886. 10. 15 ~ 1934. 6. 29)
1930년에는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에 동참하고 국무위원제 정부의 군무장이 되었다. 1932년에는 상해 한인동포들의 권리증진과 생활안정을 위해 조직된 교민단체인 대한교민단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임명되는 등 임시정부와 교민단체의 핵심간부로 활약하였다.

-= IMAGE 1 =-

박 열(朴烈) 선생(1902. 2. 3 ~ 1974. 1. 17)
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혈단을 조직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2년 초 평생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으로 만나 반제 항일투쟁의 길을 같이 가게 되었다. 무정부주의단체인 흑도회에 참여하고, 그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 책임을 맡아 선전활동에 주력하며 항일운동

-= IMAGE 1 =-

박 차 정(朴次貞) 선생 (1910. 5. 7 ~ 1944. 5. 27)
1930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레닌주의정치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하였고, 1931년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1932년 남경으로 옮긴 뒤에도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을 준비하였고, 개교 후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 IMAGE 1 =-

일파(一派) 엄 항 섭(嚴恒燮) 선생 (1898. 9. 1 ~ 1962. 7. 30)
임시의정원 의원, 주석판공실 비서, 그리고 1944년 좌우합작 정부에서는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면서 한국민족의 자주독립과 임시정부에 대한 미주동포들의 재정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광복 이후에도 김구와 함께 환국하여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하다가 6·25전쟁 중 납북되어 1962년 7월 30일 서거하였다

-= IMAGE 1 =-

동오(東吾) 신 홍 식(申洪植) 선생 (1872. 3. 1 ~ 1939. 3. 18)
1925년 민족주의단체로 조직된 흥업구락부에 참가하여 활동했고, 1930년대 전반에는 겉으로 기독교 개혁을 표방하나 속으로는 민족독립의 실력양성을 추진했던 적극신앙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1938년 2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곤욕을 치룬 뒤 교회 일선에 물러나 충북 청주로 낙향하였다가 1939년 3월 18일에 일생을 마쳤다.
-= IMAGE 1 =-

한계(韓溪) 이 승 희(李承熙) 선생 (1847. 2. 19 ~ 1916. 2. 27)
1908년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되자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김창숙 등 문인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이상설·유인석·안중근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 IMAGE 1 =-

우근(友槿) 류 자 명(柳子明) 선생 (1894. 1. 13 ~ 1985. 4. 17)
1938년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자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가 중국 관내 좌우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여 통합 의회를 구성하자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약헌 개정 기초위원, 학무부 차장 등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며 광복의 날을 열었고, 해방 후에는 중국에 남아 농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1930-4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제시대 풍물2  (0) 2007.01.10
일제 시대의 풍물  (0) 2007.01.10
광복운동-일제패망  (0) 2007.01.09
일제하의 공산주의  (0) 2007.01.09
일제강점기  (0) 2007.01.09
Posted by qlstnfp
2007. 1. 10. 01:46

Syngman Rhee bestowing a medal on an American officer.



'1950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50대 ''주먹밥''  (0) 2007.08.08
1950 - 1960 년대 슬펐던 우리의 옛 모습들  (0) 2007.01.19
단기 4280년의 교육  (0) 2007.01.11
구직 조봉암 3.15부정선거  (0) 2007.01.09
초등학교 입학시절(1950년대)  (0) 2007.01.08
Posted by qlstnfp
2007. 1. 10. 00:24



-= IMAGE 1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2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3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4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5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6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7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8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9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0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1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2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3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4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5 =-



-= IMAGE 16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7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8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9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20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21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단원풍속도첩 21폭

자료출처: 국립중앙박물관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90년  (0) 2007.01.10
기독교의 전래  (0) 2007.01.10
독립문  (0) 2007.01.09
진찬진연도(進饌·進宴圖)  (1) 2007.01.09
우리 사진의 역사  (0) 2007.01.09
Posted by qlstnfp
2007. 1. 9. 21:51
서울 - 1953
(한길사,한국사-18, 1994, 30) 임응식 찍음.
1953년 서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는 실업자. 한국전쟁 직후의 상황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전쟁은 끝났어도 폐허로 변한 자리에서 일할 사람은 넘처 흘렀으나 질자리가 없었다. 이 시절 "봉지쌀 드셔 보셨습니까"하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 1956년 대선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34)
1956년 5.15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 부통령 후보 장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
대통령 후보 신익희는 1956년 5월 5일 새벽 호남선 제 33열차를 타고 강경을 지날 무렵 심장마비로 급서. 이날은 어린이 날이었으며 비가 부슬 부슬 내리다가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는 억수로 쏟아졌다
진보당 사건 - 공판정의 조봉암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98)
1958년 1월 13일 조봉암 진보당 당수가 시경으로 자진 출두하는 도중 보안법 혐의로 검거되었다. 사진은 2심 공판정에서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조봉암.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가 급서한 뒤 야당 대통령 후보는 진보당의 조봉암으로 단일화 됐고, 진보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이 자진사퇴해 야당의 부통령 후보는 민주당 장면으로 단일화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핵심 주도 세력인 조병옥 김준연 등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은 지원할지언정 조봉암을 지원할 수 없다", "야당 세력에 조봉암을 가담시킬 수 없다"는 강경론을 폈다.
조봉암은 58년 1월 12일 진보당 간부인 윤길중 김세룡 박기출 등과 거물 간첩 양명산이 체포된 다음날인 1월 13일 구속되었다. 조봉암과 양명산은 1심에서 각각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극우 단체들의 법원.판사집 난입과 정권측의 거센 항의 뒤에 열린 2심에서 둘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59년 7월 30일 대법원은 이들의 재심청구를 기각했고, 이정권은 7월 31일 두 사람의 사형을 신속하게 집행하였다. '이승만의 장기 집권은 용인할지언정 죽산을 지원할 수는 없다'는 야당의 냉전적 사고방식 속에서 조봉암 제거의 역사적 음모는 가능했다.
3.15부정선거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274)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1960.4.11)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115) 부산일보 허종 기자 찍음
3.15 부정선거에 대한 마산 시민들의 항의 시위 당시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김주열군의 시체가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마산상고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 3월 10일 전북 남원에서 마산시 장군동 할머니집에 와있던 김주열군(17세)은 그날 밤 속옷 바람으로 구경을 나났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간이 신문에 실린 뒤 학생들 뿐 아니라 시민들도 합세하여 "부정선거 다시 하자"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제2마산시위를 전개하였고, 마산의 시위는 4.19로 이어졌다.

'1950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50대 ''주먹밥''  (0) 2007.08.08
1950 - 1960 년대 슬펐던 우리의 옛 모습들  (0) 2007.01.19
단기 4280년의 교육  (0) 2007.01.11
이승만  (0) 2007.01.10
초등학교 입학시절(1950년대)  (0) 2007.01.08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