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표적인 궁중 예연(禮宴)인 진찬(進饌)과 진연(進宴)을 그린 궁중연향도(宮中宴享圖)이자 넓은 개념으로는 궁중기록화(宮中記錄畵).
궁중연향에는 법전(法典)이나 예전(禮典)에 명시된 공식적인 예연과 곡연(曲宴)이나 사연(賜宴)같은 비공식적인 연향이 있다. 조선시대 궁중예연은 채붕(綵棚), 진풍정(進豊呈), 진연, 진찬, 진작(進爵), 회작(會酌), 회례연(會禮宴) 등의 이름으로 설행되었는데 그 개념과 설행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채붕이나 진풍정에 대해서 법전에 명시된 내용은 없으나 조선 초기에 잦은 설행이 있었다.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궁중연향으로 진연이 규정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고려시대 유습으로 채붕과 진풍정이 더 성행하였으며 진연과는 개념의 구분 없이 설행되었다. 진풍정은 점차 시행되는 예가 줄어들었으며 중종 무렵부터 진연은 외연(外宴), 진풍정은 왕대비·대왕대비 등 내전에 올리는 내연(內宴)의 의미로 구분되었다. 진연이 진풍정보다 물자와 참여 인원을 줄여 간략하게 치르는 작은 규모의 연향이라는 개념은 1657년(효종 8) 왕대비에게 올리는 진풍정을 진연으로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확립되었다. 숙종대까지 풍정과 진연을 놓고 연향의 규모와 명칭을 논의하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1706년(숙종 32) 숙종의 즉위 30년을 축하하는 진연을 거행한 뒤로는 영조대까지 줄곧 궁중연향은 진연으로 치러졌다. 사실상 『경국대전』에 규정된 정기적인 진연은 임진왜란 이후 거의 행해지지 않았으며 1754년(영조 30)에는 왕명에 의해 이 유명무실한 진연이 모두 폐지되고 진연은 주로 왕의 등극 주년(週年)과 왕실 어른의 생신을 축하하는 예연으로서 거행되었다. 19세기의 궁중연향은 대부분 진찬이었다.
19세기에는 장수를 누린 왕대비와 대왕대비에 대한 연향이 많았는데 이때마다 1795년(정조 20) 진찬으로 설행되었던 혜경궁의 회갑연에 전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진연은 대한제국기 고종에 대한 연향에서 부활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를 통관할 때 명분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대표적인 궁중연향은 진연과 진찬이라고 할 수 있다.
현전하는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진연도는 1706년(숙종 32) 8월 28일 숙종의 즉위 30년을 기념하여 100여 년만에 부활한 인정전의 진연을 그린 「진연도첩(進宴圖帖)」이다. 18세기의 또 다른 진연도로는 1710년 4월 25일 숙종의 환후가 회복되고 성수(聖壽)가 50세 됨을 기념한 진연을 그린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이다. 이 두 그림은 18세기의 진연 설행 양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후 진연도는 1901년 7월 고종의 오순(五旬)을 경하하기 위해 황태자가 올린 예연을 그린 「고종신축진연도병(高宗辛丑進宴圖屛)」, 1902년 4월 고종이 51세로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고종임인진연도병(高宗壬寅進宴圖屛)」, 같은 해 11월 고종의 어극 40년을 축하하기 위한 진연을 그린 「고종임인진연도병(高宗壬寅進宴圖屛)」이 있다.
18세기의 진찬도로는 1795년(정조 19)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幸行圖八疊屛)」의 한 첩으로서 화성행궁(華城行宮)에서 벌어진 혜경궁의 회갑연을 그린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가 유일하다. 19세기의 진찬도는 순조의 보령 사순(四旬)과 등극30주년을 기념하여 1829년(순조 29) 2월에 치러진 진찬을 그린 「순조기축진찬도병(純祖己丑進饌圖屛)」, 1848년(헌종 14) 대왕대비(순원왕후 김씨)의 육순을 기념한 「헌종무신진찬도병(憲宗戊申進饌圖屛)」, 1868년(고종 5) 신정왕후의 회갑을 기념한 「고종무진진찬도병(高宗戊辰進饌圖屛)」, 1887년(고종 24) 신정왕후의 팔순을 기념한 「정해진찬도병(高宗丁亥進饌圖屛)」, 1901년 5월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71세를 경하하는 진찬을 그린 「고종신축진찬도병(高宗辛丑進饌圖屛)」 등이 있다. 19세기 진찬·진연도는 모두 진찬소나 진연청의 계병(稧屛)으로 그려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1868년 고종 양모(養母) 신정왕후 회갑기념 병풍 '무진진찬도병'
![](http://www.chosun.com/media/photo/news/200503/200503140027_04.jpg) ▲ 1868년 음력 12월 경복궁. 고종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신정왕후 조씨의 회갑을 기념하는 진찬을 마련한 뒤 이를 세 장면으로 나누어 8폭 병풍에 담게했다. 사진은 첫번째 장면으로 12월 6일 근정전에서 신하들이 참여해 열린 '진하례' 모습이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라! ![](http://www.chosun.com/media/photo/news/200503/200503140027_03.jpg) ![](http://korea.neograph.co.kr/images/5.jpg) ▲ 12월 6일 오후 임금 침소인 강녕전에서 신정왕후와 왕실 친척들만 참여한 '내진찬' 모습. 신정왕후가 주인공이므로, 사진 가장 위쪽 붉은 천을 두른 공간은 여성만 출입 가능했다. 고종은 그 아래 푸른 막을 친 곳에 자리했다. 건고와 삭고등 전통 악기도 손에 잡힐 듯 그렸다.
오른쪽은 현재 장서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정해진찬도병 丁亥進饌圖屛》10첩병풍, 꼭 19년 후인 1887년, 양력 1월 27~29일까지 신정왕후의 팔순을 경축하여 베푼 진찬도 중 같은 장면의 그림으로, 사진기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아마도 팔순 행사를 위하여 20년 전에 그려진 왼쪽 그림을 참고삼아 행사를 준비하였을 것이다.
박지선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소장(용인대)은 이날 “미국 LA카운티박물관에서 ‘무진진찬도병’의 보존처리를 의뢰해 와 최근 처리를 마쳤다”며 그림을 공개했다. 병풍은 모두 여덟 폭(한 폭 가로 46.7㎝, 세로 136.3㎝)으로, 유숙 이한철 등 당대의 쟁쟁한 궁중 화원 10명이 비단에 채색으로 그렸다.
그림은 몇가지 의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세를 과시하는 경복궁 중건을 마친 직후의 화려하고 당당한 왕실 모습을 담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근정전, 근정문 등 건물 이름이 또렷하게 표시돼있고, 22명의 무용수가 등장하는 대형 춤 ‘선유락’(船遊樂), 모란꽃가지를 꺾어들고 춤추는 ‘가인전목단’ 등 화려한 궁중 공연(정재·呈才) 장면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근정전의 기와나 계단, 지붕 장식인 잡상(雜像)까지 정확하게 나타내 마치 사진을 보는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막상 회갑 축하를 받는 신정왕후나 고종, 대원군의 자리는 빈 의자로 등장하는 것이 독특하다. 왕실을 소재로 한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왕권의 존엄함 때문에 임금과 직계친족은 등장하지 않는다.
![](http://www.chosun.com/media/photo/news/200503/200503140027_01.jpg) ▲ 병풍 마지막 장면으로 12월 11일. 고종은 왕실 종친과 진찬에 수고한 이들을 경복궁 강녕전에 불러 밤늦도록 잔치를 벌였다. 차일 아래 유리등(네모)과 양각등(월)이 불을 밝히고 있다. 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는 잔치 준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적었다. 예를 들어 선유락(사진 가운데 큰 원을 그리며 공연하는 모습)에서 노잡이 역을 국희와 옥엽이 했다.
고종을 임금 자리에 오르게 하는데 힘을 보탰던 ‘막후 실력자’ 신정왕후 익종비 조(趙)(1808 ~1890)씨의 회갑 잔치 장면이 13일 처음 확인됐다
대원군이 이끈 경복궁 중건이 끝나고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긴 고종은 1868년(무진년) 12월, 자신의 정치적 대모인 양모(養母) 조 대비의 회갑과 혼인 5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인 궁중 잔치(진찬·進饌)를 벌였다. 이를 8폭 병풍에 그림으로 담은 것이 ‘무진진찬도병’(戊辰進饌圖屛)이다. 이 잔치 과정을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서울대 규장각 소장)는 당시 잔치 풍경을 병풍 7점으로 제작해 고종과 흥선대원군 등에게 바쳤다고 기록했으나, 정작 병풍의 실물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병풍 그림을 조사한 박정혜 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미술사)는 “배채법(背彩法·은은한 색조 효과 등을 위해 그림 뒷면에서 칠하는 것) 등을 이용해 그린 조선 말기의 수작”이라며 “경복궁 중건에 맞춰 진찬을 치른 점 등 왕권과 왕실 권위를 높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고 평했다.
박 교수와 이태진 서울대 교수(근대사) 등은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순조의 며느리로 당시 궁궐의 실력자였던 신정왕후는 고종을 양아들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는데, 흥선대원군과 신정왕후의 밀착된 관계 등이 성대한 진찬의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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