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 9. 03:41

아관파천(1896)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101)
러시아 공관 문앞에서 대포까지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 군대.
1895년 10월 민비가 시해되고, 대궐을 위협당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여 러시아 공관에서 거처했다. 민비시해로 일어난 1차 의병을 진압하려 지방으로 내려간 친위대의 부재를 이용,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있던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으며, 친러 내각이 성립되었다.

잘못 알려져 왔던 아관파천 사진들


아관파천 당시 항의하는 일본 군대를 내려보는 사진으로 알려져 왔던 사진의 배경이 러시아공사관이 아니라 돈덕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시기도 1896년이 아니라 1907년 7월이며, 일제가 고종에게 황제 양위를 요구하며 궁궐 안마당까지 군사력을 동원, 무력 시위를 벌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 사진은 서울대 이태진(李泰鎭·근대사) 교수가 일본 가쿠쇼인(學習院)대학에 소장된 ‘한국사진첩’(1910년 통감부 발행)에서 발견하였다.

돈덕전의 현판은 현재 국립 고궁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돈덕전은 1900년대 초반에 지은 서양식 건물로 덕수궁 석조전 뒤편 현 포덕문 북동쪽에 있었다.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1907년)했으며 1920년대 초반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사진에서 돈덕전이 확인됨에 따라 이 건물에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오얏꽃 무늬가 기둥과 난간에 새겨져 있는 것 등을 알 수 있게 됐다.


▲ ①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가 기둥과 난간 등에 장식된 덕수궁 돈덕전. ③덕수궁 돈덕전에서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며 무력 시위하는 일본군. 1907년 7월 22일 고종을 위한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려던 대한제국 시위대를 제압한 뒤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아관파천 당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엄상궁, 영친왕의 어머니 엄 황귀비의 모습이다.
아관파천, 어느 길로 갔는가?(수정본)


조선일보에서 보도하였던 아관파천 당시의 피신길. 고종 일행이 빠져나간 궁문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주장이 달라서 ‘신무문(북문) 설’ ‘영추문(서문) 설’ 등이 있는데, 조선일보의 그림은 구한말의 우국지사 정교(鄭喬, 1856~1926)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기록된 ‘건춘문(동문) 설’을 따른 것이다.


이 길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이승규)과 중앙문화재연구원(원장 윤세영)으로 구성된 연합조사단이 2003년 10일, 미국 신축대사관 예정부지인 서울시 중구 정동 1-39번지 일대 1만3200여평에 대한 문화유적 지표조사(地表調査·땅 위에 드러난 유적 등만을 조사하는 것) 결과보고서에서 고종의 피신로로 발표한 길이다. r그리고 당시 신문 기사에는 하나같이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덕수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할 때 이용했던 소로(小路)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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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