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학(夢鶴) 이 명 하(李命夏) 선생 (1878. 1. 23 ~ 1921. 3. 3)
대한독립단 무장대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면서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나아가 국내에서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조직인 보합단과 연계투쟁을 전개하면서 의주·용천·선천 등지에서 친일파 관리들을 숙청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이봉창
김좌진
안중근
유관순
신채호
일강(一江) 김 철(金澈) 선생 (1886. 10. 15 ~ 1934. 6. 29)
1930년에는 안창호·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에 동참하고 국무위원제 정부의 군무장이 되었다. 1932년에는 상해 한인동포들의 권리증진과 생활안정을 위해 조직된 교민단체인 대한교민단 정치위원으로 선출되고,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임명되는 등 임시정부와 교민단체의 핵심간부로 활약하였다.
박 열(朴烈) 선생(1902. 2. 3 ~ 1974. 1. 17)
고학생들을 규합하여 의혈단을 조직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에 참여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2년 초 평생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와 운명적으로 만나 반제 항일투쟁의 길을 같이 가게 되었다. 무정부주의단체인 흑도회에 참여하고, 그 기관지인 『흑도』의 발간 책임을 맡아 선전활동에 주력하며 항일운동
박 차 정(朴次貞) 선생 (1910. 5. 7 ~ 1944. 5. 27)
1930년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레닌주의정치학교의 운영에도 참여하였고, 1931년 김원봉과 결혼하였다. 1932년 남경으로 옮긴 뒤에도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을 준비하였고, 개교 후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일파(一派) 엄 항 섭(嚴恒燮) 선생 (1898. 9. 1 ~ 1962. 7. 30)
임시의정원 의원, 주석판공실 비서, 그리고 1944년 좌우합작 정부에서는 선전부장으로 활약하면서 한국민족의 자주독립과 임시정부에 대한 미주동포들의 재정지원을 이끌어내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광복 이후에도 김구와 함께 환국하여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에 노력하다가 6·25전쟁 중 납북되어 1962년 7월 30일 서거하였다
동오(東吾) 신 홍 식(申洪植) 선생 (1872. 3. 1 ~ 1939. 3. 18)
1925년 민족주의단체로 조직된 흥업구락부에 참가하여 활동했고, 1930년대 전반에는 겉으로 기독교 개혁을 표방하나 속으로는 민족독립의 실력양성을 추진했던 적극신앙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1938년 2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곤욕을 치룬 뒤 교회 일선에 물러나 충북 청주로 낙향하였다가 1939년 3월 18일에 일생을 마쳤다.
한계(韓溪) 이 승 희(李承熙) 선생 (1847. 2. 19 ~ 1916. 2. 27)
1908년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되자 일본의 노예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김창숙 등 문인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이상설·유인석·안중근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우근(友槿) 류 자 명(柳子明) 선생 (1894. 1. 13 ~ 1985. 4. 17)
1938년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자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가 중국 관내 좌우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여 통합 의회를 구성하자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약헌 개정 기초위원, 학무부 차장 등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며 광복의 날을 열었고, 해방 후에는 중국에 남아 농학자로 이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