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에 해당되는 글 727건

  1. 2010.03.01 유관순
  2. 2010.02.28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3. 2010.02.28 힘내라! 4총사
  4. 2010.02.27 소냐 해네 (Sonja Henie )
2010. 3. 1. 01:38

교육과학기술부는 22일 "2007년 2월 고시된 7차 교육과정 개정에 따라 그동안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린 유관순 열사의 전기문이 3월 새학기부터 빠지게 됐다"고 밝혔다.

7차 교육과정 개정으로 초등학교 4학년 단계에 포함된 국어 전기문 관련 단원이 5학년 단계로 옮겨지면서 교과서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교과서 집필진은 전기문을 통해 소개할 인물을 기존의 유관순 열사에서 주시경 선생으로 교체했다.

교과부 관계자는 "최근 한글을 국가 브랜드로 부각시키려는 추세 등에 맞춰 주시경 선생으로 교체한 것으로 안다. 정부의 교육과정에는 특정인물을 소개하라는 지침은 없으며 집필진 결정에 따른 것이므로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http://www.yonhapnews.co.kr/issues/2010/02/22/1202140000AKR20100222211000004.HTML?audio=Y



민족문제연구소는 26일 3ㆍ1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한 3ㆍ1독립선언서 원본 2만1천장 가운데 한 장을 함께 공개했다. 선언서의 뒷면에는 `巡査拾得ノ紙(순사가 습득한 종이)'라는 글이 씌어 있고 첫줄에 `朝鮮(조선)'이 `鮮朝(선조)'로 잘못 인쇄돼 있다.

3.1 운동이 3월 1일 당시 토요일로 결정된 것은 3월 3일(월) 고종 국상일에 하는 것은 고종에 대한 예우가 아니며 3월 2일은 '주일날'이라서 기독교인들이 피했고 그래서 3월 1일로 결정되었다는 뒷 얘기(이론 있음).

아래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와 관련하여 만세 운동 지도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 이론 있음

원래 독립선언문은 한용운씨가 기초하려고 했으나 문장이 너무 격렬해 당시 상동교회에 다니던 기독교인 최남선씨가 몇 주 동안을 숨어서 다시 작성했다고 한다. 이날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읽은 후 곧 일본 경찰들이 들이 닥쳤는 데 이것은 미리 이런 선언문을 낭독한다고 경찰에 통고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최남선에 의해 기초된 독립 선언문은 안국동 사거리의 천도교 계통의 보성인쇄소 사장 - 33인 중의 한사람 이종일(李鍾一)에게 넘겨져 2월 27일 오후 6시경부터 10시까지 2만 1000장을 인쇄하였다.

정보를 입수한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가
27일 저녁 불을 끄고 인쇄하고 있던 인쇄소를 급습하여 독립선언서 한 장을 들고 나갔다.
이종일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최린은 신철을 불러 민족을 위해 며칠 동안만 입을 다물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때 최린은 그에게 5000원을 주며 만주로 떠나라고 권고했다. (당시 쌀 1가마니의 값이 41원이었다).

일본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한국측 기록에는 그가 돈을 받지 않고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나갔다고 되어 있다. 최린의 집에서 나온 신철이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3.1운동의 모의는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신철은 현장을 피해 만주로 출장을 떠났다. 만세 운동이 진입될 무렵인 5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온 신철은 정보를 갖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경성헌병대에서 투옥 중 곧 자살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훗날 친일파로 변한 사람이 7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누가 친일파로 변질했느냐는 조심스러운 일이다.

친일행각을 벌인 그들은 철저히 역사 앞에서 부끄러워해야할 일이지만 혼돈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를 생각해야한다.

그러나 희박한 역사 의식을 가지고 변절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고 33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의 행적을 정당화 하려는 후안무치는 비난 받아야한다.

3.1절의 독립선언문 낭독 시간은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삼일절 노래에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라는 가사는 훗날 삼일절 노래를 작사한 정인보선생의 착오다.


2) 그날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이 모인 곳은 탑골-파고다 공원이 아니라 그 근처 인사동에 있는 한때 이완용의 별장이었는 데 당시 음식점으로 사용되어 손병희씨가 자주 가는 곳이었던 태화관이었다.

파고다 공원에서 모일 것으로 알렸는 데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꾼 이유를 나중 박희도씨는 그날 학생들이 모여 흥분된 상태에서 유혈사태라도 날까봐 그랬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 1. 모인 사람은 29인.

4명이 오지 못했는 데 그 못 온 네분은 모두 목사.

오지 못한 연유는 전국 각처에서 와야 했기 때문에 못왔다는 설과 다른 설들이 있다.

당일 남산의 헌병대에 체포된 29인들의 심문 기록에 따르면 자기는 그냥 이 일에 관심없이 참여했을 뿐이고 자기는 한일합방에 반대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심문 기록을 남긴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태화관에서 오후 2시가 넘어 한용운씨가 독립 선언문을 읽음으로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습니다.

탑골공원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약 5천명은 2시가 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동요하고,오후 3시가 다 되어가자 당시 경신고등학교 학생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시위 날 당일에는 죽은 사람은 없었고 130여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나중 일본측이 보고한 결과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 집회 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백2만3천명, 사망자수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715채나 되었다고 일본측 기록에 보고되어있다.

[

1918년 11월(또는 1919년 2월) 선포된 최초의 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의 원본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중국 동포로부터 이 자료를 건네받은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석재 기자

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28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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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0. 2. 28. 18:30


1972년 6월 17일 워싱턴D. C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근무하던 경비원 프랑크 윌즈(Frank Wills)는 건물 최하부계단의 후미진 곳과 주차장 사이 문 위에 기묘한 테이프(tape)가 묶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워싱턴 시경에 통보했다.


경찰은 5명의 남자를 체포해

그들이 3주전 그 호텔에 있던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본부 사무소에 침입했었고, 이번 침입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던 도청기를 재설치하기 위한 행동임을 밝혀 낸다.


경찰이 체포했던 맥커드의 수첩 속에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Committee to Re-elect the President, CREEP)에서 예전에 활동한 경력이 있는 에드워드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Jr.)의 백악관 연락처 전화번호가 발견되고

맥커드는 CIA의 옛직원으로 대통령 재선위원회 경비주임 이었다는 것, 그가 대통령 재선위원회에서 자금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진다.

FBI 및 다른 정부조사관들도 관심을 갖는다.


닉슨 대통령과 해리 로빈슨 핼드맨(Harry Robbins Haldeman) 대통령수석보좌관은 7월 23일 FBI의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저지하기 위해 CIA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그 상황은 테이프에 녹음되었다)

논의 후 닉슨은 국가안보가 위험하다며 CIA에게 FBI의 조사를 방해할 것을 지시했다.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갖기 시작해 정치문제로 비화한다.

샘 J 아빈 Jr. 상원의원은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를 설립해 백악관 직원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닉슨 자신에 대한 불리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John Wesley Dean III)을 경질하고, 새로운 법무장관으로 엘리엇 L 리처드슨(Elliot Lee Richardson)을 임명했다. 그에게는 특별검사을 지명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5월 18일 리처드슨은 아치볼트 콕스(Archibald Cox, Jr)를 특별검사로 지명했다.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의 공청회가 열린다.

위원회에서 알렉산더 P 베터필드 대통령 부보좌관은 백악관이 대통령집무실의 모든 대화를 자동녹음하고 있다고 폭로하자 콕스 특별검사와 상원조사위원회 양측 모두 테이프제출을 요구한다.


닉슨은 대통령 특권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고, 법무장관을 통해서 콕스 특별검사에게 소환장 취소를 명령했다. 콕스가 거부하자 콕스 특별검사 해임을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요구한 그는 이것을 거부하고 자진사임했다. 뒤이어 윌리엄 D 란케르즈하우스 법무차관도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하였다.결국 로버트 H 보크 법무차관보가 임시 법무장관대리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1973년 11월 17일 플로리다 주 올란드에서 닉슨은 400명의 기자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했다. [I am not a crook.-나는 사기꾼이 아니다]이란 유명한 말도 이 때 나왔다.

닉슨은 계속해서 테이프 공개를 거부하면서,

백악관이 편집한 기록을 제출했으나 1개의 테이프가 18분 30초가 삭제된 부분이 발견된다.

백악관은 이것을 닉슨의 비서 로즈 메리 힌스의 실수 탓이라 변명했으나 거짓으로 드러난다.

1974년 7월 24일 대법원이 테이프에 대해 닉슨의 대통령특권을 무효화하는 동시에 특별검사 레온 자보로스키에게 테이프를 넘겨줄 것을 명령하는 판결이 있고난 다음에야 닉슨은 7월 30일 문제의 테이프를 넘겨준다.

그 것 말고도 닉슨은

“비밀경호국(SS)에 당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두 명을 그에게 붙여라. 매우 유용할 것이다.”며
다음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권력을 동원해 잠재적 경쟁자인 케네디가의 막내인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의 여성편력 캐기에 나선 사실도 드러났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대통령은 회화의 대부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 후 이런 기록을 하는 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정치판에서 뒷조사는 비일비재하다.

시대와 지역의 구분이 없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이 39년 자신의 비밀 기행(奇行)을 담은 전단을 베를린 상공에서 살포하자 측근 중에 첩자가 있다고 의심하고 친위대의 우두머리인 히뮬러에게 장성들에 대한 본격적인 뒷조사를 주문했다.

소련의 스탈린도 첩보기관을 동원해 정적들을 감시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등 권위주의 시대에는 뒷조사가 정권유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다.

흥미있는 것은 한결같이 뒷조사의 말로가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워싱턴포스트지(紙)의 워터게이트 사건 기록
http://www.washingtonpost.com/wp-srv/politics/special/watergate/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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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0. 2. 28. 16:21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봅슬레이가 시작된 건 2003년 강원도청에서 루지.스켈레톤.봅슬레이 팀을 창단했을 때부터다.


봅슬레이 대표팀이 28일(한국시간) 캐나다 휘슬러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남자 4인승 경기에서 3차 시기까지 19위를 기록, 20위까지 자격이 주어지는 결선 레이스에 진출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이들을 보며 한국판 쿨러닝(Cool Runnings)이라한다.


쿨러닝(Cool Runnings) 1988년 캐나다의 캘거리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자메이카 대표팀으로 출전한 4명의 봅슬레이 선수들의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스포츠 영화이다.


겨울이 없어 눈과 얼음은 찾아볼 수도 없는 자메이카에선 상상도 하지 못한 겨울스포츠인 봅슬레이... 봅슬레이를 하기 위해서는 4명의 선수가 필요했지만 봅슬레이가 뭔지도 모르는 자메이카인들에게는 너무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힘들게 팀을 만들었지만 지원을 받지 못해, 풀밭 위에서 훈련을 이어나갔고 올림픽에 갈 경비도 출전권도 없었다.

결국 자비를 들여 참가한 올림픽 출전권을 얻기위한 노력

하지만 최초참가라는 이유로 냉대 받고, 스폰서라고는 하나도 없어 봅슬레이조차 빌려야 하며, 추위에는 약할 수밖에 없는, 자메이카에서 온 그들은 기적적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얻는다.


본선에서 헌 연습용 썰매를 구한 이들은 단기간의 설상 훈련 끝에 예선을 간신히 통과한다. 어두운 과거로 인한 불리한 여건, 다른 나라 선수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메달 후보로까지 부상한다.

마지막 경기에서 이들은 썰매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바람에 사고를 당하지만 모두 일어나 썰매를 어깨에 매고 결승점을 통과해 다른 나라 선수들과 관중들의 박수 갈채를 받는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혼자 썰매 종목을 개척해 온 강광배(37.강원도청)를 열외로 치더라도 김정수(29.강원도청)는 역도선수 출신이고 이진희(26.강릉대)는 3년 전까지 창던지기 선수였다.

또 팀의 막내인 김동현(23.연세대)는 지난 해 대표선수 후보 선발전에서 뽑힌 일반인 출신으로 봅슬레이 경력이 만 1년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올림픽 출전 티켓을 획득했다는 것은 물론, 국내에 20개가 넘는 팀이 존재하는 일본 대표팀을 꺾고 결선 레이스까지 오른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다.

한국 봅슬레이팀의 도전은 2008년 미국 아메리카컵대회 4인승 경기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대표팀 썰매는 500달러 주고 현지에서 빌린 중고품이었다. 강광배는 "스포츠카 경주에 렌터카를 빌려 나서는 꼴이었다"고 회상했다. 대표팀은 2008년에야 정부와 강원도청 도움으로 1억여원짜리 4인승 썰매를 갖출 수 있었다.

봅슬레이 대표선수 한 달 훈련수당은 60만~70만원이다. 훈련이 한 해 130일 남짓이니 200만~300만원 버는 셈이다. 봅슬레이, 스키점프, 모굴스키, 루지…. 메달도 따지 못했고 화려한 조명도 받지 못했지만 적지 않은 우리 선수들이 밴쿠버에서 묵묵히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갔다. 남들 다 간 길을 마다하고 나만의 소로(小路)를 뚫어 나아갔다. 그들은 경기에선 패자였을지 몰라도 인생에선 승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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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 27. 00:57

소냐 해네 (Sonja Henie 4. 8, 1912 - 10. 12, 1969)


노르웨이 피겨 스케이터이고 1936년 부터는 배우였다.

그녀는 세차례 올림픽 챔피언이었고 (1928, 1932, 1936), 10차례 세계선수권자의 자리에 올랐다. (1927-1936)

Henie Career Highlights

http://www.youtube.com/watch?v=uaMq_6qOw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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