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가 3ㆍ1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한 3ㆍ1독립선언서 원본 2만1천장 가운데 한 장이다.
선언서의 뒷면에는 `巡査拾得ノ紙(순사가 습득한 종이)'라는 글이 씌어 있고 첫줄에 `朝鮮(조선)'이 `鮮朝(선조)'로 잘못 인쇄돼 있다.
3.1 운동이 3월 1일 당시 토요일로 결정된 것은 3월 3일(월) 고종 국상일에 하는 것은 고종에 대한 예우가 아니며 3월 2일은 '주일날'이라서 기독교인들이 피했고 그래서 3월 1일로 결정되었다는 뒷 얘기(이론 있음).
아래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와 관련하여 만세 운동 지도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 이론 있음
원래 독립선언문은 한용운씨가 기초하려고 했으나 문장이 너무 격렬해 당시 상동교회에 다니던 기독교인 최남선씨가 몇 주 동안을 숨어서 다시 작성했다고 한다. 이날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읽은 후 곧 일본 경찰들이 들이 닥쳤는 데 이것은 미리 이런 선언문을 낭독한다고 경찰에 통고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정보를 입수한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가
이종일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일본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신철은 현장을 피해 만주로 출장을 떠났다. 만세 운동이 진입될 무렵인 5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온 신철은 정보를 갖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경성헌병대에서 투옥 중 곧 자살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훗날 친일파로 변한 사람이 7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누가 친일파로 변질했느냐는 조심스러운 일이다.
친일행각을 벌인 그들은 철저히 역사 앞에서 부끄러워해야할 일이지만 혼돈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를 생각해야한다.
그러나 희박한 역사 의식을 가지고 변절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고 33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의 행적을 정당화 하려는 후안무치는 비난 받아야한다.
3.1절의 독립선언문 낭독 시간은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삼일절 노래에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라는 가사는 훗날 삼일절 노래를 작사한 정인보선생의 착오다.
그날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이 모인 곳은 탑골-파고다 공원이 아니라 그 근처 인사동에 있는 한때 이완용의 별장이었는 데 당시 음식점으로 사용되어 손병희씨가 자주 가는 곳이었던 태화관이었다.
파고다 공원에서 모일 것으로 알렸는 데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꾼 이유를 나중 박희도씨는 그날 학생들이 모여 흥분된 상태에서 유혈사태라도 날까봐 그랬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 1. 모인 사람은 29인.
4명이 오지 못했는 데 그 못 온 네분은 모두 목사.
오지 못한 연유는 전국 각처에서 와야 했기 때문에 못왔다는 설과 다른 설들이 있다.
당일 남산의 헌병대에 체포된 29인들의 심문 기록에 따르면 자기는 그냥 이 일에 관심없이 참여했을 뿐이고 자기는 한일합방에 반대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심문 기록을 남긴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태화관에서 오후 2시가 넘어 한용운씨가 독립 선언문을 읽음으로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다.
탑골공원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약 5천명은 2시가 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동요하고,오후 3시가 다 되어가자 당시 경신고등학교 학생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시위 날 당일에는 죽은 사람은 없었고 130여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나중 일본측이 보고한 결과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 집회 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백2만3천명, 사망자수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715채나 되었다고 일본측 기록에 보고되어있다.
3월 3일 고종의 국상
일본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전쟁 기간 중에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을사조약 등 각종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고종이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고종 양위 사건).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발표된다.
고종은 당시 67세로 적지 않은 연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항간에는 고종이 독살 당하였다는 설이 유포된다.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다.
추측에 구체적인 정황이 덧붙여진다.
이완용은 천황 앞에서 고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설, 어의 한상호 이왕직 장시국장이자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 왕실 사돈 윤덕영 등이 일제의 하수인으로 서로 공모하여 사전에 황소만한 개를 1분 안에 죽일 수 있는 약을 시험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짰다. 게다가 일제는 비밀이 샐까 두려워 고종을 시복했던 궁녀까지 살해하여 궁 밖으로 빼돌리며 은폐를 기도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이 시신이 사후 1~2일밖에 안되었을 때도 심하게 부풀어져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는등 부패가 정상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신여대의 구양근 교수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고종이 사망한 그 달에 열린 국민대회 명의의 성명서를 보면 "그들(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은 출로가 막히자 후일을 두려워하여 간신배를 사서 시해하기로 하였다. 윤덕영, 한상학 두 역적을 시켜 식사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려" 시해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고종 독살설은 단순한 설이 아니라 고종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이완용과 이기용 그리고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한창수, 윤덕영, 한상학 등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될 만큼 구체성을 띠고 있다.
해방 이후 독립 운동가인 선우훈이 ≪사외비사:덕수궁의 비밀≫에서 고종의 독살설을 다뤘는데 그 내용은 고종의 7촌 조카인 이지용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종이 독살로 시해당한 것은 해외 망명을 꾀하다가 그 계획이 누설되었고, 이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 등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것이다.
≪사외비사≫는 고종의 독살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리려던 금괴와도 관련이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누어 황실 재정을 담당하던 이용익에게 시켜 비밀 장소에 매장했고, 고종은 그 장소가 그려진 보물 지도를 이지용에게 맡기고 탈출을 기도했는데, 탈출 직전에 시해당했다는 것이다.
즉 고종이 망명 자금 5000원을 마련하던 중에 그 정보가 어주도감 한상학에게 말려지자 한상학이 이를 사돈 관계인 이완용에게 알렸고, 이완용은 다시 이 사실을 총독부에 밀고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 앞에서 고종을 시해할 것을 맹세하고 귀국하여, 한상학과 함께 황제를 시해했다는 것이다.
≪사외비사≫의 이런 내용은 대원군의 친형 이최응의 손자 이지용이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은 유명한 친일파라는 점에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당시의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45년까지는 이를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그 이후로도 공식 조사된 바 없어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고종 독살설은 일반과 궁중에 널리 퍼졌다. 이는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전국적인 규모의 3·1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19년의 3·1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궁의 분위기는 대단히 좋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국장 의식에는 서양식 대례복-양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순종은 양복을 입고 문상을 온 귀족의 인사에 등을 돌려 앉아 인사 받기를 거부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일본인 관리들마저 양복 위에 한복 두루마기를 걸치고 문상을 해야 했다.
조선 사람들은 친일파를 빼고는 장례 의식에 참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심지어 고종의 아들인 순종과 의친왕도 장례 기간 내내 일본인들을 피해 다니다가 장례식 당일에야 전통적인 상복(굴건제복)을 입고 참석했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제가 더 생겼다.
강제 병합 이후로 이왕가(대한제국 황실)는 일본이 정한 왕공가궤범이란 법규를 따르게 되어 있었는데, 이 법규에 따르면 이왕가의 무덤은 '묘' 로 부르도록 되어 있었다.
왕의 무덤인 '능' 도, 세자의 무덤인 '원' 도 아닌 일반인의 무덤인 '묘' .
3월 3일에 발인을 한다.
조선 사람들이 꼼수로 생각해낸 것이 명성 황후의 홍릉.
고종의 상여가 발인되는 시각에 맞추어 홍릉을 파내 명성 황후의 재궁을 고종과 함께 묻었고, 명성 황후가 고종과 함께 묻히면서 결국 명성 황후의 능호인 홍릉을 사용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 사실을 몰랐던 듯 하고, 알았다 해도 자기네 무덤을 자기들이 옮기겠다는데까지 간섭할 만한 이유는 찾지 못했던 듯 하다.
이후 승하한 순종도 똑같은 절차를 걸쳐 유릉(원비 순명효황후의 능호)이란 능호를 받게 된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30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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