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8. 18:30


1972년 6월 17일 워싱턴D. C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근무하던 경비원 프랑크 윌즈(Frank Wills)는 건물 최하부계단의 후미진 곳과 주차장 사이 문 위에 기묘한 테이프(tape)가 묶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워싱턴 시경에 통보했다.


경찰은 5명의 남자를 체포해

그들이 3주전 그 호텔에 있던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본부 사무소에 침입했었고, 이번 침입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던 도청기를 재설치하기 위한 행동임을 밝혀 낸다.


경찰이 체포했던 맥커드의 수첩 속에 닉슨 대통령 재선위원회(Committee to Re-elect the President, CREEP)에서 예전에 활동한 경력이 있는 에드워드 하워드 헌트(E. Howard Hunt, Jr.)의 백악관 연락처 전화번호가 발견되고

맥커드는 CIA의 옛직원으로 대통령 재선위원회 경비주임 이었다는 것, 그가 대통령 재선위원회에서 자금을 받았다는 것이 밝혀진다.

FBI 및 다른 정부조사관들도 관심을 갖는다.


닉슨 대통령과 해리 로빈슨 핼드맨(Harry Robbins Haldeman) 대통령수석보좌관은 7월 23일 FBI의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저지하기 위해 CIA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그 상황은 테이프에 녹음되었다)

논의 후 닉슨은 국가안보가 위험하다며 CIA에게 FBI의 조사를 방해할 것을 지시했다.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갖기 시작해 정치문제로 비화한다.

샘 J 아빈 Jr. 상원의원은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를 설립해 백악관 직원을 소환하기 시작했다.

닉슨 자신에 대한 불리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백악관 법률고문 존 딘(John Wesley Dean III)을 경질하고, 새로운 법무장관으로 엘리엇 L 리처드슨(Elliot Lee Richardson)을 임명했다. 그에게는 특별검사을 지명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5월 18일 리처드슨은 아치볼트 콕스(Archibald Cox, Jr)를 특별검사로 지명했다.

상원 워터게이트 특별위원회의 공청회가 열린다.

위원회에서 알렉산더 P 베터필드 대통령 부보좌관은 백악관이 대통령집무실의 모든 대화를 자동녹음하고 있다고 폭로하자 콕스 특별검사와 상원조사위원회 양측 모두 테이프제출을 요구한다.


닉슨은 대통령 특권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고, 법무장관을 통해서 콕스 특별검사에게 소환장 취소를 명령했다. 콕스가 거부하자 콕스 특별검사 해임을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요구한 그는 이것을 거부하고 자진사임했다. 뒤이어 윌리엄 D 란케르즈하우스 법무차관도 명령을 거부하고 사임하였다.결국 로버트 H 보크 법무차관보가 임시 법무장관대리로 콕스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1973년 11월 17일 플로리다 주 올란드에서 닉슨은 400명의 기자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변명했다. [I am not a crook.-나는 사기꾼이 아니다]이란 유명한 말도 이 때 나왔다.

닉슨은 계속해서 테이프 공개를 거부하면서,

백악관이 편집한 기록을 제출했으나 1개의 테이프가 18분 30초가 삭제된 부분이 발견된다.

백악관은 이것을 닉슨의 비서 로즈 메리 힌스의 실수 탓이라 변명했으나 거짓으로 드러난다.

1974년 7월 24일 대법원이 테이프에 대해 닉슨의 대통령특권을 무효화하는 동시에 특별검사 레온 자보로스키에게 테이프를 넘겨줄 것을 명령하는 판결이 있고난 다음에야 닉슨은 7월 30일 문제의 테이프를 넘겨준다.

그 것 말고도 닉슨은

“비밀경호국(SS)에 당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두 명을 그에게 붙여라. 매우 유용할 것이다.”며
다음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권력을 동원해 잠재적 경쟁자인 케네디가의 막내인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의 여성편력 캐기에 나선 사실도 드러났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후 대통령은 회화의 대부분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 후 이런 기록을 하는 일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정치판에서 뒷조사는 비일비재하다.

시대와 지역의 구분이 없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영국이 39년 자신의 비밀 기행(奇行)을 담은 전단을 베를린 상공에서 살포하자 측근 중에 첩자가 있다고 의심하고 친위대의 우두머리인 히뮬러에게 장성들에 대한 본격적인 뒷조사를 주문했다.

소련의 스탈린도 첩보기관을 동원해 정적들을 감시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 등 권위주의 시대에는 뒷조사가 정권유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수단이었다.

흥미있는 것은 한결같이 뒷조사의 말로가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워싱턴포스트지(紙)의 워터게이트 사건 기록
http://www.washingtonpost.com/wp-srv/politics/special/watergate/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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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