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학기술부는 22일 "2007년 2월 고시된 7차 교육과정 개정에 따라 그동안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린 유관순 열사의 전기문이 3월 새학기부터 빠지게 됐다"고 밝혔다.
7차 교육과정 개정으로 초등학교 4학년 단계에 포함된 국어 전기문 관련 단원이 5학년 단계로 옮겨지면서 교과서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교과서 집필진은 전기문을 통해 소개할 인물을 기존의 유관순 열사에서 주시경 선생으로 교체했다.
교과부 관계자는 "최근 한글을 국가 브랜드로 부각시키려는 추세 등에 맞춰 주시경 선생으로 교체한 것으로 안다. 정부의 교육과정에는 특정인물을 소개하라는 지침은 없으며 집필진 결정에 따른 것이므로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http://www.yonhapnews.co.kr/issues/2010/02/22/1202140000AKR20100222211000004.HTML?audio=Y
민족문제연구소는 26일 3ㆍ1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한 3ㆍ1독립선언서 원본 2만1천장 가운데 한 장을 함께 공개했다. 선언서의 뒷면에는 `巡査拾得ノ紙(순사가 습득한 종이)'라는 글이 씌어 있고 첫줄에 `朝鮮(조선)'이 `鮮朝(선조)'로 잘못 인쇄돼 있다.
3.1 운동이 3월 1일 당시 토요일로 결정된 것은 3월 3일(월) 고종 국상일에 하는 것은 고종에 대한 예우가 아니며 3월 2일은 '주일날'이라서 기독교인들이 피했고 그래서 3월 1일로 결정되었다는 뒷 얘기(이론 있음).
아래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와 관련하여 만세 운동 지도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 이론 있음
원래 독립선언문은 한용운씨가 기초하려고 했으나 문장이 너무 격렬해 당시 상동교회에 다니던 기독교인 최남선씨가 몇 주 동안을 숨어서 다시 작성했다고 한다. 이날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읽은 후 곧 일본 경찰들이 들이 닥쳤는 데 이것은 미리 이런 선언문을 낭독한다고 경찰에 통고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정보를 입수한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가
이종일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일본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신철은 현장을 피해 만주로 출장을 떠났다. 만세 운동이 진입될 무렵인 5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온 신철은 정보를 갖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경성헌병대에서 투옥 중 곧 자살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훗날 친일파로 변한 사람이 7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누가 친일파로 변질했느냐는 조심스러운 일이다.
친일행각을 벌인 그들은 철저히 역사 앞에서 부끄러워해야할 일이지만 혼돈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를 생각해야한다.
그러나 희박한 역사 의식을 가지고 변절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고 33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의 행적을 정당화 하려는 후안무치는 비난 받아야한다.
3.1절의 독립선언문 낭독 시간은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삼일절 노래에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라는 가사는 훗날 삼일절 노래를 작사한 정인보선생의 착오다.
2) 그날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이 모인 곳은 탑골-파고다 공원이 아니라 그 근처 인사동에 있는 한때 이완용의 별장이었는 데 당시 음식점으로 사용되어 손병희씨가 자주 가는 곳이었던 태화관이었다.
파고다 공원에서 모일 것으로 알렸는 데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꾼 이유를 나중 박희도씨는 그날 학생들이 모여 흥분된 상태에서 유혈사태라도 날까봐 그랬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 1. 모인 사람은 29인.
4명이 오지 못했는 데 그 못 온 네분은 모두 목사.
오지 못한 연유는 전국 각처에서 와야 했기 때문에 못왔다는 설과 다른 설들이 있다.
당일 남산의 헌병대에 체포된 29인들의 심문 기록에 따르면 자기는 그냥 이 일에 관심없이 참여했을 뿐이고 자기는 한일합방에 반대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심문 기록을 남긴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태화관에서 오후 2시가 넘어 한용운씨가 독립 선언문을 읽음으로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습니다.
탑골공원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약 5천명은 2시가 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동요하고,오후 3시가 다 되어가자 당시 경신고등학교 학생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시위 날 당일에는 죽은 사람은 없었고 130여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나중 일본측이 보고한 결과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 집회 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백2만3천명, 사망자수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715채나 되었다고 일본측 기록에 보고되어있다.
1918년 11월(또는 1919년 2월) 선포된 최초의 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의 원본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중국 동포로부터 이 자료를 건네받은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가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석재 기자
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28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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