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3. 19:16

오래전 이 세상을 달리한 노파를 굳이 비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찾는 부나방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권세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배정자(裵貞子, 田山貞子, 1870년~ 1952년 2월 27일)

본명은 분남(粉南),


1949년 2월초 반민특위 강명규(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성북동 언덕길 한 양옥집에서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는 그 길로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하였다.

당시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네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반민특위로 잡혀오자 특위 요원들이 이 노파의 얼굴을 보려고 강 조사관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그 나이에 수갑에 채워져 끌려왔으며, 또 그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왜인가?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배정자(裵貞子. 1870∼1952년)다.

해방 후 반민법 위반으로 반민특위에 잡혀온 여성피의자는 총 6명.

그들 가운데 첫번째로 잡혀온 사람이 바로 배정자였다.

흔히 그녀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나 정사(正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다음은 그녀가 직접 구술한 자서전 '배정자 실기'(實記·1927년)에 나오는 얘기와 사건 기록을 통한 이야기다.

구술 당시 총독부에서 나오는 밀정 월급으로 겨우 먹고살 때여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1870년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배지홍은 어릴 때 민씨 정권에 반대하다가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사형당하였다.


그가 세 살 때의 일이었다.

이후 연좌제에 의해 죄적(罪籍)에 올라 노비가 되어 충격으로 시각 장애인이 된 어머니를 따라 각지를 유랑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에 기생으로 팔려갔으나, 1882년 12살 때 도주하여 양산군 통도사에서 우담(耦潭)이라는 승명으로 여승생활을 한다.

1884년 2년 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관청에 체포되었는데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당시 밀양 부사 정병하(鄭秉夏)를 만났다.

그는 1885년 15세 되던 해 무역상 마츠오(松尾)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해주었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안경수를 만나 그 도움으로 상강(尙綱) 여학교를 다녔다. 다시 안경수를 통해 김옥균(金玉均)과도 알게 되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1887년 그녀를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 들여앉히고는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주었다.



배정자의 '사다코[貞子]-정자'는 여기서 생겨났다.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고 그녀는 말한다..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田在植)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으나 그의 도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면서 재회, 결혼을 하였다. 전재식과의 사이에서 아들 전유화(田有和)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1894년 그는 도일 9년 만에 조선땅에 발을 디뎠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신분을 숨기고 고종에게 접근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이후 정치정보를 빼내는 등 고급 밀정으로 활동했다.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 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 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상주한 바 있다.

양장(洋裝)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遷都)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였다.


1895년 일본 제국 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玄暎運)과 재혼했다.

1895년 당시 외부(外部) 번역관 겸 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 만에 종2품 육군 참장으로 승진하고, 농공상부 협판을 지냈다.

그러나 현영운과 1년 가량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박영철(朴榮喆. 일본육사 15기 졸업. 함북도지사. 중추원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배정자는 일본인 오하시(大橋), 은행원 최(崔)모, 전라도 갑부 조(趙)모, 대구 부호의 2세 정(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http://gilbut2.egloos.com/7639571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밀서 사건으로 절영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배국태(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 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이토의 양녀가 아닌 애첩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기에 이 시기에 막강한 권력자로 행세하였고,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退位) 압력을 넣기도 했다.


한편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됨(10월 26일)으로써 한 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그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 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 현 瀋陽)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 귀순공작을 담당했다.


1920년 일제는 옛 일진회(一進會)의 인물들을 규합, 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하는데 그는 배후인물로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 초대회장 최정규(崔晶圭)는 구한국 시절 참위(소위) 출신이었다.

매국노 이용구(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최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배정자를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1922년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백여 평의 토지를 증여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민간업자의 부탁을 받고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 여성 1백여 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며 치부를 했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을 한 그릇 먹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한다.

한 시대를 풍비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 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따르면 그는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 27일 서울 성북동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녀는 출생일과 같은 날. '배분남'으로 죽지를 않고 '배정자'로 죽었다.


어찌하여 배정자는 그런 기막힌 인생을 걸었을까?


고종도 반했다는 그녀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 타고난 미색은 '동북의 호랑이' 또는 '만주왕'이라 일컫던 장작림까지도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게 만들기도 했다는데.

아버지가 참혹하게 죽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눈이 멀고 게다가 관노비가 되었던 일들을 어려서 목격한 딸은 불가에 귀의하여 여승도 되었지만 처참한 부모의 모습이 꿈에서도 잊을수 없는 원한이 되었는지 매국녀(賣國女)가 되었다.


배정자는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195인 명단에 들어있다.

'요화 배정자'(1966) '요화 배정자 2'(1973)로 영화화돼 김지미와 윤정희가 각각 그 역을 맡았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8183&yy=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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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