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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3.06 어디서나 말조심, 몸조심
- 2010.03.03 배분남(裵粉南)
- 2010.03.03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 2010.03.01 3.1절을 보내며
오래전 이 세상을 달리한 노파를 굳이 비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찾는 부나방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권세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배정자(裵貞子, 田山貞子, 1870년~ 1952년 2월 27일)
본명은 분남(粉南),
1949년 2월초 반민특위 강명규(姜明珪) 조사관 일행이 성북동 언덕길 한 양옥집에서 백발의 한 노파를 끌어내 수갑을 채우고는 그 길로 남대문로 반민특위 사무실로 연행하였다.
당시 그 노파의 나이 79세. 겉으로 보기엔 여느 노인네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가 반민특위로 잡혀오자 특위 요원들이 이 노파의 얼굴을 보려고 강 조사관 주위로 모여들었다.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그 나이에 수갑에 채워져 끌려왔으며, 또 그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왜인가?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배정자(裵貞子. 1870∼1952년)다.
해방 후 반민법 위반으로 반민특위에 잡혀온 여성피의자는 총 6명.
그들 가운데 첫번째로 잡혀온 사람이 바로 배정자였다.
흔히 그녀 이름 앞에 '요화(妖花)'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나 정사(正史)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다음은 그녀가 직접 구술한 자서전 '배정자 실기'(實記·1927년)에 나오는 얘기와 사건 기록을 통한 이야기다.
구술 당시 총독부에서 나오는 밀정 월급으로 겨우 먹고살 때여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1870년 김해 고을에서 아전노릇을 하던 배지홍(裵祉洪)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배지홍은 어릴 때 민씨 정권에 반대하다가 1873년 흥선 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 졸당(卒黨)으로 몰려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사형당하였다.
그가 세 살 때의 일이었다.
이후 연좌제에 의해 죄적(罪籍)에 올라 노비가 되어 충격으로 시각 장애인이 된 어머니를 따라 각지를 유랑하였다.
경상남도 밀양에 기생으로 팔려갔으나, 1882년 12살 때 도주하여 양산군 통도사에서 우담(耦潭)이라는 승명으로 여승생활을 한다.
1884년 2년 만에 다시 절을 뛰쳐나와 배회하다가 밀양관청에 체포되었는데 그의 부친과 알고 지내던 당시 밀양 부사 정병하(鄭秉夏)를 만났다.
그는 1885년 15세 되던 해 무역상 마츠오(松尾)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해주었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안경수를 만나 그 도움으로 상강(尙綱) 여학교를 다녔다. 다시 안경수를 통해 김옥균(金玉均)과도 알게 되었다.
김옥균은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 이토(伊藤博文)에게 그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의 빼어난 미모에 끌린 이토는 1887년 그녀를 하녀 겸 양녀로 자기 집안에 들여앉히고는 '다야마 데이코(田山貞子)'라는 일본 이름을 지어주었다.
배정자의 '사다코[貞子]-정자'는 여기서 생겨났다.
이토는 재색(才色)을 겸비한 그를 장차 고급 밀정(스파이)으로 키울 요량으로 수영·승마·사격술·변장술 등을 가르쳤다고 그녀는 말한다..
관기로 있을 때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田在植)을 만나 사랑을 나누었으나 그의 도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면서 재회, 결혼을 하였다. 전재식과의 사이에서 아들 전유화(田有和)를 두었다. 그러나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재학중이던 전재식이 병사하자 두 사람의 인연은 끝이 났다.
1894년 그는 도일 9년 만에 조선땅에 발을 디뎠다.
공식적으로는 신임 공사(公使)로 부임하는 하야시(林權助)의 통역이었으나 본분은 일제의 밀정.
신분을 숨기고 고종에게 접근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이후 정치정보를 빼내는 등 고급 밀정으로 활동했다.
첫 임무는 당시 조선황실 내의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공사관에 머물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엄비(嚴妃. 고종의 계비)의 친인척을 통해 황실과 선을 댔다.
고종(高宗)은 미모에다 출중한 일본어 실력을 갖춘 그를 총애하였다.
당시 한 신하가 고종에게 "비기(秘記)에 가로되, 갓 쓴 여자가 갓 쓴 문(門)으로 출입하면 국운이 쇠한다 하였습니다, 통촉하옵소서"라고 상주한 바 있다.
양장(洋裝)에 모자(갓)를 쓴 그가 대안문(大安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현재명칭은 '大漢門'임)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러일전쟁 직전 친러파는 고종의 신변안전을 위해 평양 천도(遷都) 혹은 고종의 블라디보스토크 천거(遷居)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비밀이 누설돼 일본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고종으로부터 이 정보를 빼내 일본공사관에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배정자였다.
1895년 일본 제국 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玄暎運)과 재혼했다.
1895년 당시 외부(外部) 번역관 겸 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배정자의 도움으로 10년 만에 종2품 육군 참장으로 승진하고, 농공상부 협판을 지냈다.
그러나 현영운과 1년 가량 살다가 이혼하였다.
그리고는 현영운의 후배인 박영철(朴榮喆. 일본육사 15기 졸업. 함북도지사. 중추원참의 역임)과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하였다.
이후 배정자는 일본인 오하시(大橋), 은행원 최(崔)모, 전라도 갑부 조(趙)모, 대구 부호의 2세 정(鄭)모 등과도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대륙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중국인 마적 두목과 동거한 적도 있다.
1924년 57세로 밀정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25세의 일본인 순사와 동거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http://gilbut2.egloos.com/7639571
1905년 이토 히로부미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밀서 사건으로 절영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 3월 이토가 초대 한국 통감으로 부임하자 배정자는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오빠 배국태(裵國泰)는 한성판윤(현 서울시장)으로, 동생은 경무감독관(현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이토의 양녀가 아닌 애첩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기에 이 시기에 막강한 권력자로 행세하였고,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일제와 함께 고종에게 퇴위(退位) 압력을 넣기도 했다.
한편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기세는 1909년 이토가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6월) 다시 4개월 뒤 하얼삔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됨(10월 26일)으로써 한 풀 꺾이고 말았다.
이토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그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구세주로 등장한 사람은 '한일병합' 후 부임한 조선주둔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였다.
아카시는 배정자의 과거 밀정경력을 높이 평가하여 헌병대 촉탁으로 채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일본이 시베리아에 출병하자 그는 일본군을 따라 시베리아로 가서는 이 지역에서 수년간 군사첩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봉천(奉天. 현 瀋陽)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만주지역 거주 조선인들의 동향을 정탐, 귀순공작을 담당했다.
1920년 일제는 옛 일진회(一進會)의 인물들을 규합, 만주지역 최대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를 창설하는데 그는 배후인물로 활동하였으며 나중에 이 단체의 고문을 맡았다.
이 단체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탄압과 체포를 위해 조직한 무장 첩보단체로 초대회장 최정규(崔晶圭)는 구한국 시절 참위(소위) 출신이었다.
매국노 이용구(李容九)의 한일합방 청원을 지지했던 최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나중에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한편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배정자를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1922년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에서는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가 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가 경무국 촉탁으로 다시 고용하였다.
나중에 그는 총독부로부터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6백여 평의 토지를 증여받기도 했는데 은퇴한 뒤에도 총독부로부터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민간업자의 부탁을 받고 일본군 위안부 송출업무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70 노구에도 불구하고 조선 여성 1백여 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까지 끌고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강요하며 치부를 했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취재차 형무소를 찾은 한 기자에게 그는 "따끈한 장국밥을 한 그릇 먹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고 애걸하였다한다.
한 시대를 풍비했던 '배정자'의 모습은 흔적도 없고 한낱 늙은 죄수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제 와서 전비(前非)를 어찌 변명하겠습니까? 저는 오늘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어떤 벌을 내리신대도 달게 받고 가겠습니다. 다만 제 아들 무덤 앞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법정 최후진술을 통해 뒤늦게 자신의 죄과를 후회했다.
종로구청에 보관돼 있는 호적에 따르면 그는 한국전쟁 와중인 1952년 2월 27일 서울 성북동에서 81세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녀는 출생일과 같은 날. '배분남'으로 죽지를 않고 '배정자'로 죽었다.
어찌하여 배정자는 그런 기막힌 인생을 걸었을까?
고종도 반했다는 그녀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 타고난 미색은 '동북의 호랑이' 또는 '만주왕'이라 일컫던 장작림까지도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게 만들기도 했다는데.
아버지가 참혹하게 죽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눈이 멀고 게다가 관노비가 되었던 일들을 어려서 목격한 딸은 불가에 귀의하여 여승도 되었지만 처참한 부모의 모습이 꿈에서도 잊을수 없는 원한이 되었는지 매국녀(賣國女)가 되었다.
배정자는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195인 명단에 들어있다.
'요화 배정자'(1966) '요화 배정자 2'(1973)로 영화화돼 김지미와 윤정희가 각각 그 역을 맡았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8183&yy=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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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내용의 'The winner takes it all',
'이거 왠지 씁쓸하구먼'은
만감이 교차한다는 뜻의 'I have a lot of mi xed feelings'.
'그냥 내비둬'는 'Never mind!'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딨니? 'Anything is possible!''
http://news.joins.com/article/409/4041409.html?ctg=1703&cloc=home|list|list3
밴쿠버 올림픽 선수단 결단식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002022200483&sec_id=53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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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가 3ㆍ1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한 3ㆍ1독립선언서 원본 2만1천장 가운데 한 장이다.
선언서의 뒷면에는 `巡査拾得ノ紙(순사가 습득한 종이)'라는 글이 씌어 있고 첫줄에 `朝鮮(조선)'이 `鮮朝(선조)'로 잘못 인쇄돼 있다.
3.1 운동이 3월 1일 당시 토요일로 결정된 것은 3월 3일(월) 고종 국상일에 하는 것은 고종에 대한 예우가 아니며 3월 2일은 '주일날'이라서 기독교인들이 피했고 그래서 3월 1일로 결정되었다는 뒷 얘기(이론 있음).
아래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와 관련하여 만세 운동 지도부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3월 3일로 예정된 거사를 1일로 앞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는 . 이론 있음
원래 독립선언문은 한용운씨가 기초하려고 했으나 문장이 너무 격렬해 당시 상동교회에 다니던 기독교인 최남선씨가 몇 주 동안을 숨어서 다시 작성했다고 한다. 이날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문을 읽은 후 곧 일본 경찰들이 들이 닥쳤는 데 이것은 미리 이런 선언문을 낭독한다고 경찰에 통고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정보를 입수한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신철(일명 신승희)가
이종일은 즉시 천도교 유력자인 최린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고,
일본측 기록에는 신철이 그 돈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신철은 현장을 피해 만주로 출장을 떠났다. 만세 운동이 진입될 무렵인 5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온 신철은 정보를 갖고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체포돼 경성헌병대에서 투옥 중 곧 자살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 훗날 친일파로 변한 사람이 7명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누가 친일파로 변질했느냐는 조심스러운 일이다.
친일행각을 벌인 그들은 철저히 역사 앞에서 부끄러워해야할 일이지만 혼돈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를 생각해야한다.
그러나 희박한 역사 의식을 가지고 변절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고 33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의 행적을 정당화 하려는 후안무치는 비난 받아야한다.
3.1절의 독립선언문 낭독 시간은 오후 2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지금 삼일절 노래에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라는 가사는 훗날 삼일절 노래를 작사한 정인보선생의 착오다.
그날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이 모인 곳은 탑골-파고다 공원이 아니라 그 근처 인사동에 있는 한때 이완용의 별장이었는 데 당시 음식점으로 사용되어 손병희씨가 자주 가는 곳이었던 태화관이었다.
파고다 공원에서 모일 것으로 알렸는 데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꾼 이유를 나중 박희도씨는 그날 학생들이 모여 흥분된 상태에서 유혈사태라도 날까봐 그랬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 1. 모인 사람은 29인.
4명이 오지 못했는 데 그 못 온 네분은 모두 목사.
오지 못한 연유는 전국 각처에서 와야 했기 때문에 못왔다는 설과 다른 설들이 있다.
당일 남산의 헌병대에 체포된 29인들의 심문 기록에 따르면 자기는 그냥 이 일에 관심없이 참여했을 뿐이고 자기는 한일합방에 반대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심문 기록을 남긴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태화관에서 오후 2시가 넘어 한용운씨가 독립 선언문을 읽음으로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다.
탑골공원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약 5천명은 2시가 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동요하고,오후 3시가 다 되어가자 당시 경신고등학교 학생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시위 날 당일에는 죽은 사람은 없었고 130여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나중 일본측이 보고한 결과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 집회 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백2만3천명, 사망자수7,509명, 부상자 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715채나 되었다고 일본측 기록에 보고되어있다.
3월 3일 고종의 국상
일본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전쟁 기간 중에 조선 정부를 압박하여 을사조약 등 각종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고종이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고종 양위 사건).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발표된다.
고종은 당시 67세로 적지 않은 연령이기도 했다.
그러나 항간에는 고종이 독살 당하였다는 설이 유포된다.
그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다.
추측에 구체적인 정황이 덧붙여진다.
이완용은 천황 앞에서 고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설, 어의 한상호 이왕직 장시국장이자 남작 작위를 받은 한창수와 시종관 한상학, 왕실 사돈 윤덕영 등이 일제의 하수인으로 서로 공모하여 사전에 황소만한 개를 1분 안에 죽일 수 있는 약을 시험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짰다. 게다가 일제는 비밀이 샐까 두려워 고종을 시복했던 궁녀까지 살해하여 궁 밖으로 빼돌리며 은폐를 기도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의 증언이 시신이 사후 1~2일밖에 안되었을 때도 심하게 부풀어져있었고 이가 이미 다 빠져있는등 부패가 정상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신여대의 구양근 교수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고종이 사망한 그 달에 열린 국민대회 명의의 성명서를 보면 "그들(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은 출로가 막히자 후일을 두려워하여 간신배를 사서 시해하기로 하였다. 윤덕영, 한상학 두 역적을 시켜 식사 당번을 하는 두 궁녀로 하여금 밤참에 독약을 타서 올려" 시해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고종 독살설은 단순한 설이 아니라 고종의 마지막 임종을 지켜본 이완용과 이기용 그리고 독살의 혐의를 받고 있는 한창수, 윤덕영, 한상학 등의 이름이 실명으로 거론될 만큼 구체성을 띠고 있다.
해방 이후 독립 운동가인 선우훈이 ≪사외비사:덕수궁의 비밀≫에서 고종의 독살설을 다뤘는데 그 내용은 고종의 7촌 조카인 이지용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종이 독살로 시해당한 것은 해외 망명을 꾀하다가 그 계획이 누설되었고, 이에 일제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 등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것이다.
≪사외비사≫는 고종의 독살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리려던 금괴와도 관련이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황실 소유의 금괴 85만 냥을 12개의 항아리에 나누어 황실 재정을 담당하던 이용익에게 시켜 비밀 장소에 매장했고, 고종은 그 장소가 그려진 보물 지도를 이지용에게 맡기고 탈출을 기도했는데, 탈출 직전에 시해당했다는 것이다.
즉 고종이 망명 자금 5000원을 마련하던 중에 그 정보가 어주도감 한상학에게 말려지자 한상학이 이를 사돈 관계인 이완용에게 알렸고, 이완용은 다시 이 사실을 총독부에 밀고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 앞에서 고종을 시해할 것을 맹세하고 귀국하여, 한상학과 함께 황제를 시해했다는 것이다.
≪사외비사≫의 이런 내용은 대원군의 친형 이최응의 손자 이지용이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은 유명한 친일파라는 점에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당시의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45년까지는 이를 조사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그 이후로도 공식 조사된 바 없어 명확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고종 독살설은 일반과 궁중에 널리 퍼졌다. 이는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전국적인 규모의 3·1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19년의 3·1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궁의 분위기는 대단히 좋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국장 의식에는 서양식 대례복-양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순종은 양복을 입고 문상을 온 귀족의 인사에 등을 돌려 앉아 인사 받기를 거부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일본인 관리들마저 양복 위에 한복 두루마기를 걸치고 문상을 해야 했다.
조선 사람들은 친일파를 빼고는 장례 의식에 참석을 거의 하지 않았고, 심지어 고종의 아들인 순종과 의친왕도 장례 기간 내내 일본인들을 피해 다니다가 장례식 당일에야 전통적인 상복(굴건제복)을 입고 참석했다.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하나의 문제가 더 생겼다.
강제 병합 이후로 이왕가(대한제국 황실)는 일본이 정한 왕공가궤범이란 법규를 따르게 되어 있었는데, 이 법규에 따르면 이왕가의 무덤은 '묘' 로 부르도록 되어 있었다.
왕의 무덤인 '능' 도, 세자의 무덤인 '원' 도 아닌 일반인의 무덤인 '묘' .
3월 3일에 발인을 한다.
조선 사람들이 꼼수로 생각해낸 것이 명성 황후의 홍릉.
고종의 상여가 발인되는 시각에 맞추어 홍릉을 파내 명성 황후의 재궁을 고종과 함께 묻었고, 명성 황후가 고종과 함께 묻히면서 결국 명성 황후의 능호인 홍릉을 사용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이 사실을 몰랐던 듯 하고, 알았다 해도 자기네 무덤을 자기들이 옮기겠다는데까지 간섭할 만한 이유는 찾지 못했던 듯 하다.
이후 승하한 순종도 똑같은 절차를 걸쳐 유릉(원비 순명효황후의 능호)이란 능호를 받게 된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30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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