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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1.27 법을 지키지 않아 백성들의 삶이 힘들다
- 2017.01.27 있는 아우들 모두 흩어졌는데(有弟皆分散)
- 2016.09.28 1991년 박창수
- 2016.08.16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도끼로 맞더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간하며,
솥에 넣어서 삶아 죽이려 하더라도 옳은 말을 다하는 게 충신
(迎斧鉞而正諫 據鼎 而盡言 此謂忠臣也)
--중국 동진시대 갈홍이 지은 ‘포박자(抱朴子)’--
고관대작들은 어리석고 더럽혀진 사람들을 껴안아 위로는 이들과 함께 군주를 속이고, 아래로는 이들과 함께 이익을 찾아 침탈을 일삼는다
(大臣挾愚汚之人 上與之欺主 下與之收利侵漁)
패거리를 지어 서로 말을 맞추어 군주를 현혹시키고 법을 지키지 않아 백성들의 삶이 힘들고 나라가 위험에 빠지니 이게 커다란 죄이다
(朋黨比周相與 一口惑主 敗法以亂士民 使國家危削 此大罪也)
가까운 사람을 살펴서 간사한 짓을 못하게 해야 한다(審近防奸)
안팎을 관찰해 사사로이 청탁하는 것을 막고, 정책을 제시하면 시켜보되 잘못되면 문책해 간사한 말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察內觀旁關請謁 容陳問責防奸言)
-- 한비자--
근본을 가볍게 여기면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輕本傾國)
근본과 말단이 분명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험하다(本末昏迷社稷傾)
http://www.segye.com/list.jsp?seriesId=100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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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두보의 시 ‘달밤의 아우 생각(月夜憶舍弟)’
달은 고향의 달처럼 밝기만 하네(月是故鄕明)
있는 아우들 모두 흩어졌는데 생사조차 물어볼 집조차 없네(有弟皆分散 無家問死生)
보낸 편지 영영 배달되지 못할 터인데, 아직 전쟁마저 끝나지 않았음에랴(寄書長不達 況乃未休兵)
서산대사의 시 ‘시골로 돌아가(還鄕)’
서른 해 지나서 고향에 오니(三十年來返故鄕)
그리운 이들 보이지 않고 집은 헐려 휑한 마을이 되었네(人亡宅廢又村荒)
…
백발의 이웃노인이 내 이름을 물어 답하니(鶴髮隣翁問姓名)
옛 추억 이야기하며 서로 우노라(乳號方通相泣下)
법가 ‘한비자’
엄한 형벌은 사람의 욕심을 제어하고, 덕을 베풀어 불쌍히 여김은 세상에 의로움을 충만케 한다(嚴刑重罰籠人慾 德惠哀憐充義足)
균형을 헤아려 법을 만들고 백성을 인도해야 한다(量衡設法率民萌)
춘추시대 제나라 명재상 관중
모름지기 지도자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언행을 곧게 해야 한다(中正外直)
무력이나 권위로는 그 뜻을 얻기 어렵다(武力權威難得意)
명나라 때 유학자 여곤(呂坤)의 저서 ‘신음어’(呻吟語)
나무가 곧은데 그 나무의 그림자가 굽을 수 없다.(直木之下無曲影)
바둑의 논리인
계획은 멀리 보되 실천은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해야 되는 것(着眼大局 着手小局)
‘채근담’
이익이 되는 일에는 남보다 앞서지 말고 덕을 닦는 일에는 남보다 뒤떨어지지 말라.
남에게서 뭔가를 받는 것은 분수를 넘지 않도록 하고 수양을 하는 일은 분수 이하로 줄이지 말라
(寵利 毋居人前 德業 毋落人後 毋踰分外 修爲 毋減分中)
http://www.segye.com/list.jsp?seriesId=100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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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역사에서 정부에 의해 부검이 악의적으로 이용되었던 사례
박창수
그는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스물 두 살이던
1981년 8월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다.
그리고 1986년 도시락거부투쟁을 주도했다.
50여년 식당도 없이 탈의실과 공장 모퉁이에서 머리카락과 휴지가 섞여 나오는 도시락을
먹어온 노동자들이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며 사흘 동안 도시락을 던져버렸다.
회사 쪽은 결국 나흘 만에 식당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한진중공업은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1990년 조합원 93%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당선된다.
박창수는 1991년 2월,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열린 연대회의 수련장에서
급습한 경찰들에게 짓밟히며 끌려갔다.
그 후 장안동 대공분실을 거쳐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구치소 내에서 고 강경대 열사(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 신입생)
타살사건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을 하던 중
그해 5월 4일, 의문의 부상을 입고 안양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머리를 서른여덟 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이었다.
병원으로 이송된 뒤,
5월 6일 새벽, 그는 안기부 요원들을 따라나섰고 몇 시간 후 병원 뒷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박창수 열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조선소 노동자들은 전면파업을 선언하고 올라왔고,
유가족과 사회단체, 학생들도 함께 병원을 지켰다.
다음 날인 5월 7일, 경찰은 시신이 안치된 안양병원에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퍼부으며 영안실 벽을 해머로 부수고 들어와 고인의 주검을 빼앗아갔다.
1991년 5월 7일 백골단이 콘크리트 벽을 뚫고 안영병원 영안실에 난입하자,
고 박창수 한진중공업 위원장의 유족들이 격렬히 제지하고 있다.
경찰은 강제로 부검을 실시하였고,
노조활동과 구치소 생활에 염증을 느껴 투신자살했다며 ‘단순추락사’로 사인을 발표했다.
기사출처 : 권영숙( 1991년 박창수의 죽음과 노동의 좌절 ), 김재진( 반드시 알아야 할 슬픈 대한민국 이야기 )
1991년 5월 6일 숨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씨의 어머니 김정자씨가
안양병원 1층 복도에서 아들의 의문사를 밝혀달라며 통곡을 하자 재야원로 계훈제씨가 위로하고 있다
1991년 6월 30일 고 박창수씨의 아들 용찬군이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노제를 지내기 위해 회사 정문을 나서는 장례행렬의 선두에 서서 행진하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63103.html
을축년 대홍수는 1925년 7월 7일부터 9월 초에 걸친 집중호우로 일어난 4차례의 큰 홍수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약 1억300만원의 피해액을 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4회에 걸친 호우로 인하여 전국에서 사망자 647명, 가옥 유실 6363호, 붕괴 1만 7045호, 침수 4만 6813호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논 약 3200헥타르, 밭 약 6700헥타르 등이 유실돼 기상관측 이후 가장 피해가 큰 대홍수였다.
을축년 대홍수는 짧은 기간에 1년 치 강수량의 80%인 700-900mm의 비가 퍼부어 최대의 피해를 가져왔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했으며, 서울 송파구 근린공원에 1926년 희생자들을 추모한 을축년 대홍수비가 있다.
용산의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용산역의 열차가 물에 잠겼다. 또한 뚝섬의 제방이 무너지고 샛강이 생겨 신천(新川)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http://www.focus.kr/view.php?key=201608160008352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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