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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6 1898년 여권통문(女權通文)
- 2015.02.16 선교장(船橋莊) 태극기
- 2014.12.08 1897년 명성황후(1851~1895) 국장(國葬) 사진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0302_0013507638&cID=10700&pID=10700
박영효 청년시절 (1861∼1939)
어린시절 서재필 (1864∼1951)
청년 김옥균 (1851∼1894),
20대 초반 의친왕 이강의 청년시절(1877∼1955)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열강의 문호개방에 쇄국으로 맞서던 흥선대원군(1820∼1898)의 47세 때 앉은 자세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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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9월 8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여권통문(女權通文)’ 중 일부분이다.
<여권통문>
물이 상하면 반드시 변하고, 병이 극하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 고금의 이치다. (중략)
이제 우리 이천 만 동포형제가 (중략) 구습을 영영 버리고 개명한 신식을 좇아 행하는데, 일신우일신함은 영영한 소아라도 저마다 아는 바거늘, 어찌하여 우리 여인들은 일향 귀 먹고 눈 어두운 병신 모양으로 옛날식 규방만 지키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리오.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를 보면 남녀가 일반 사람이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제조를 다 배우고 이목을 넓혀 장성한 뒤에는 사나이와 부부지의를 정하여 평생을 사는데, 그 사나이한테 조금도 절제를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극히 공경함을 받는다.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전날을 생각하면 사나이의 위력으로 여편네를 누르고, 구설을 핑계로 여자는 안에 머물면서 밖의 일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밥하고 옷 짓는 것만 하리오.
어찌하여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으로 규방에 갇혀 밥과 술만 지으리오.
우리도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라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실시하고, 각각 여아들을 보내 재주를 배우고, 규칙과 행세하는 도리를 배워 남녀가 일반 사람이 되게 할 당장 여학교를 실시하오니 우리 동포 형제 여러 부녀 중 영웅 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한 마음을 내어 우리 학교 회원에 드시려거든 곧 칙명하시기를 바라옵나이다.
116년 전인 1898년
구월일일 여학교 설립 발기인 이소사, 김소사
1898년 9월 1일 여권통문 발표에 찬성한 사람들은 약 300명이었는데, 발표한 후에는 400~ 500명으로 늘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 부인들이 중심세력이었으나, 일반서민층 부인들과 기생들도 참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여권통문의 발표는 자연히 여권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 여권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운동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찬양회(贊襄會)라는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를 조직하였다. 1898년 9월 12일 북촌 부인대표들은 뜻을 같이 하는 남성들까지도 함께 하여 여학교 설립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한국인 여성들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로 순성여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이를 여성의 힘으로 운영하기 위해 후원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찬양회는 여학교 설립운동과 여성계몽사업을 펼쳤다. 매주 일요일 정기집회를 열고 연설회와 토론회를 가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이었다. 여자도 국민의 일원이기에 당연히 국가가 관립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도 국가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남성과 동등하게 애국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관립여학교 설립은 자꾸 늦춰졌다. 이에 찬양회는 1899년 2월 26일 서울에 30명 정원의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를 개교했다. 이 학교는 한국여성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로서 7, 8세에서 12, 13세 연령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과정의 학교였다. 이 학교를 관립여학교로 만들려고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양현당의 노력으로 학교가 유지되었으나 1903년 2월 그가 죽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순성여학교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종교교육기관과는 달리 여성들에 의해 설립된 민간 교육기관이라는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교육내용에서도 민족의 일원으로서 개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등 당시 사회의 현안을 강조하고 이에 합당한 여성인물을 키워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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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선교장(船橋莊)은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 무경 이내번에 의해 처음 지어졌으며 10대에 이르도록 증축되어 오늘날에 이르른 99칸의 사대부가의 상류 주택
예전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 다녔다 하여 선교장이라 명명되었다.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개인 소유의 국가 문화재이다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위원회가
지난해 11월 선교장 내부 수리 도중 발견된 태극기에 대해 멸실 위기에 처한 근대 문화유산을 보존을 위한 "문화재로 등록“
문화재 전문가들은 '강릉 선교장 소장 태극기'의 제작 시기를 189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선교장 태극기'는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근우(1877~1938)가 1908년 강릉에 설립한 망국의 위기를 맞아 근대 지식 보급과 청소년 인재 양성을 위해 문을 연 근대식 학교 동진(東進)학교 개교식에 이 태극기 2점이 내걸었다
동진(東進)학교는
지리와 역사, 산수, 일본어도 가르쳤지만, 국어와 조선 역사 교육을 특히 강조했다.
이강백 선교장 관장은 "1891~1897년 선교장에서 직접 재봉틀로 제작한 태극기"라며 "1950년대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가 이번에 찾은 것"이라고 했다.
'선교장 태극기' 현장 조사를 맡은 송명호 중부대 교수 등은 "구한말 태극기의 형태나 제작 기법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의견을 냈다.
선교장 태극기는 무명 두 폭을 이음질해 가로 153cm, 세로 145㎝ 크기로 잘라낸 다음 테두리를 재봉틀로 두 줄 박음질했다. 바탕에 태극 문양과 4괘의 모양대로 오려낸 후 크기에 맞게 메우고 다시 재봉틀로 정교하게 두 줄 박음질해 완성했다. 이 관장은 "당시 태극기 2점을 제작했는데 다른 하나는 광복 후 김구 선생에게 선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기증했다고 하는데 이후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
현존 최고(最古) 태극기로 밝혀진 '데니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2호)'에 이어 둘째로 오래된 태극기인 셈이다.
'데니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2호)'는
고종이 구한말 외교고문을 지낸 미국인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는 189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실물이 남아있는 태극기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져 왔다.
강릉 선교장 태극기(위). 괘의 위치가 지금과 좌우가 다르다. 아래는 1908년 동진학교 개교식 기념사진으로 배경에 보이는 태극기 두 개 중 왼쪽 빨간 점선 안의 태극기가 문화재가 된다. 오른쪽 태극기는 광복 후 김구에게 선물했다고 전하며 이후 행방은 알 수 없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16/2015021600084.html?news_Head1
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
http://ko.wikipedia.org/wiki/%EC%84%A0%EA%B5%90%EC%9E%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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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1월 대한제국 국장으로 치른 명성황후 장례식입니다.
곡하는 궁인들을 태운 조랑말이 광화문 육조거리를 줄지어 따라갑니다.
경운궁 대안문을 나선 상여가 그 뒤를 따릅니다.
종로를 지나는 장례행렬 선두에 신백 神魄, 고인의 넋을 모신 '신주 가마'가 보입니다.
http://www.ytn.co.kr/_ln/0106_20141208191007645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2072234235&code=9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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