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9. 23:28

미국산 쇠고기의 위생 불량으로 대량 리콜 사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이번에는 결핵 감염이 우려되는 젖소 4800마리가 도살되고 1만6000마리가 격리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AP통신은 8일(현지시간) 미국 내 최대 우유 산지인 캘리포니아 프레스노 카운티 소재 낙농가 3곳에서 결핵 감염사례가 발견됐다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결핵 감염 소가 발견된 낙농가 1곳은 미 농무부가 제안한 마리당 3000달러의 보상금을 받기로 했지만 2곳은 최장 수 년이 걸리는 격리를 선택했다.

미 농무부와 캘리포니아주 당국은 결핵 감염 소가 발견된 낙농가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중 1곳은 1만마리의 젖소를 길러 우유를 생산하고 있으며, 우수 종자의 정액을 해외에 판매해 왔다고 AP는 전했다. 결핵균은 대기를 통해 사람과 다른 포유류에게 쉽게 전염되지만 우유는 살균 처리할 경우 결핵균을 제거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젖소의 결핵 감염 사례가 처음 확인된 것은 지난 1월이다. 주 및 연방 당국은 다른 주로의 젖소 이동을 금지하는 한편, 15만마리에 대해 감염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젖소들의 정확한 결핵 감염 경로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시장 규모가 73억달러에 달하는 캘리포니아 낙농업계는 피해가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2003년에도 결핵 감염 사례가 발견돼 87만6000마리를 대상으로 결핵 검사를 실시하고 8000마리를 도살했다. 도살된 젖소의 고기는 결핵에 감염되지 않은 경우 식용으로 유통된다.

9일 AP 통신에 따르면 부르스 나이트 미 농무부 차관은 8일 프레스노에서 최근 발견된 3건의 결핵 사례를 조사하고 있는 수의사 및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연방정부 및 주정부 농무부 관료들은 결핵이 발견된 3곳의 위치와 명단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8.07.09 19:19


레이 사우사 서부연합낙농협회의 이사는 "통상 문제를 우려하고 있다"며 "이런 사건은 재협상에 사용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경제 | 기사입력 2008.07.09 23:04

특히 이번에 결핵 소가 발견된 농장에는 30개월 이상된 젖소만 있어 한국에 수출되는 쇠고기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YTN동영상 | 기사입력 2008.07.09 22:27

그러니 30개월 이상은 들어오면 안되지.


Posted by qlstnfp
2008. 7. 9. 23:01

이름은 발레리우스.

기원전 509년,로마의 2대 집정관이다. 그는 이름난 갑부였고 전투마다 승리했다.

로마 시내의 광장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언덕에 위치한 웅장한 저택에서 호화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지만,시민들에게 그의 저택은 마치 왕궁처럼 보였다.

그러나 집권 100일 만에 맛이 갔다.

발레리우스는 네 마리의 백마를 타고 개선한 게 탈이 났다. 옛날 왕이나 하던 거창한 행사였다.

그래서 시민들은 "그가 장차 왕이 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발레리우스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왕위를 노린다." 로마가 술렁거렸다.

민심 이반은 도를 더해 갔다. 동원령이 떨어져도 시민들이 전투에 나오지 않았다. 계곡에 모여 밤샘 농성을 했다. 발레리우스는 언덕 위 저택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봤다.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을 지켜보며 ‘아침이슬’을 들은 우리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기가 끝이다. 그 다음 장면부터 완전히 다르다.

자신의 나쁜 평판을 친구에게 전해들은 발레리우스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저택을 부숴 버리고, 땅값이 싼 성벽 근처에 소박한 집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직접 볼 수 있게끔 항상 대문을 열어 두었다.

또한 호위병들이 들고 다니는 장대 끝의 도끼를 없애고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 갈 때에는 장대의 끝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계층간의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소통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컨테이너 장벽인 '명박 산성' 뒤에 숨은 이 대통령과 딴판이다. 발레리우스는 내각도 확 바꾸었다. ‘평민이 집정관에 오를 수 있다’는 법을 만들어 평민들을 대거 발탁했다.

이러한 발레리우스의 노력으로 시민들은 점차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부족했을까. 발레리우스는 개인 재산마저 도로와 하수도 사업에 털어 넣었다.
머지않아 로마 시민의 마음이 돌아섰다.

발레리우스는 평민이 주축인 중무장 보병을 이끌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후 그는 5번이나 집정관에 뽑히는 기록을 세웠다. 숨을 거둘 때 그에겐 장례 비용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로마 시민들이 조의금을 모아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그의 시신을 옛 집터인 베리안 언덕에 묻었다. 1년간 상복을 입고 애도했다. 공화국을 반석에 올린 그에게 ‘포플리콜라’(시민의 친구)라는 명예로운 존칭이 붙었다. 이후 발레리우스 가문은 15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 멸망까지 거의 2천년 동안 최고 명문가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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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8. 7. 9. 22:19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대놓고 당시의 왕을 향해 '하늘의 뜻이 임금을 떠나갔다'며 비난한 '강심장'이었다. 그가 명종 10년에 올린 '단성현감(丹城縣監) 사직상소'를 보자.

"전하의 국사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소관(小官)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명종의 치세를 정면으로 부정한 이 상소에는 더 놀라운 표현이 등장하는데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이었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저술가 이덕일은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에서

조식이 임금을 '선왕의 외로운 후사'로,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로 거침없이 표현한 상소를 올릴 수 있었던 데 대해 그가 백성을 사대부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피지배계층으로 여겼던 주자학자들과는 달리 '백성의 마음이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조식 (조선 학자)[曺植]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 어머니는 인주이씨이다. 김우옹·곽재우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서울로 이사했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성수침(成守琛)·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25세 때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2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향에 돌아와 지내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1543년에는 경상감사 이언적이 만나기를 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1548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 1551년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 주부(司導寺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59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했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1551년 오건(吳健)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정인홍(鄭仁弘)·하항(河沆)·김우옹(金宇)·최영경(崔永慶)·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61세 되던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받고 명종의 부름에 응해 왕을 독대(獨對)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 戊辰對事〉를 올렸다. 여기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571년에는 선조가 식물(食物)을 하사하자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72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산서원(德山書院)을 세운 뒤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晦峴書院)을 세웠고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되었다. 또한 조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식이 생존했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정도로 사화가 자주 일어난 때로 훈척정치(勳戚政治)의 폐해가 가장 극심했다. 그는 성년기에 2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보았다. 기묘사화 때는 숙부 언경(彦卿)이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성우(成遇)·송인수(宋麟壽) 등 많은 친구들이 희생을 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그는 1, 2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곧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인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의'(義)를 강조했다(→ 남명학). 그가 늘 지니고 있던 검명(劍銘)에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外斷者義)라고 새겨놓았듯이 그의 철학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 사물을 처리해나간다는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한 것이었다.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한 본심(本心)의 함양에 주력하게 되는 반면 '의'는 외적 행위의 단재(斷裁)를 통한 사욕(私欲)의 제거에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일체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했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그는 초학자에게 〈심경 心經〉·〈태극도설 太極圖說〉·〈서명 西銘〉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 방법을 비판하고, 〈소학〉·〈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이황과 기대승 등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했다(→ 사단칠정논쟁).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가 남긴 기록 곳곳에 당시 폐정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준엄한 비판과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참여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난세(亂世)에는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하고, 의리정신을 투철히 하여 비리를 용납하지 않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조식의 사상은 그의 문인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의식을 보여주었다. 조식과 그의 문인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유학의 두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었으나, 선조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흥 등 조식의 문인들이 광해군 때 대북정권의 핵심세력으로 참여한 탓에 인조반정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조식에 대한 폄하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그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남명집〉과 독서를 하다가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 學記類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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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8. 7. 9. 10:55



쇠고기 시식회를 듣고

미국 축산업자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을 수도 있으니좋으시겠어요.

늦은 감은 있지만, 국민 불안을 감소시키는데는 일조할 것 같다!

30개월 이상의 SRM선진회수육 그리고 각종 곱창&막창을 미쿡 '네브래스카 비프'(이번에 한국에 쇠고기 납품을 하는 작업장이며 O-157균으로 쇠고기 리콜에 들어간 회사)에서 공수해오는 방법이 없을까요? -_-+ 얼마나 잘 잡숫는지 꼭! 보고 싶은데...

아들,손자,며느리 다아~ 모여서 꼭 잡숫게 해 드려야지요... -_- 그렇게 좋은 고기인데

어이없어 하는 대다수 농민과 한우농가 여러분....

곱창, 쇠고기, 곰탕 국물 등 한우보다 미국쇠고기 더 많있으니 많이 드시길 소원합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꼭 지금 이런 짓거리를...

-네티즌의 의견이다.

지금 문제는 그대들이 먹고있는 30개월 미만 뼈없는 살코기가 아닌

대부분의 미국 사람이 먹지 않는 위험한 부위가 우리 식탁에 오를 위험성이다.

원산지 표시 제도를 지휘하고 있는 박덕배 농식품부 제2차관은

원산지 단속의 실효성과 관련
"그 많은 식당을 모두 단속할 수도 없고, 모두 단속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처벌.단속 위주로 가면 정책이 실패하게 돼 있다"며
"원산지 표시 좀 안했다고 범죄자 취급을 해서는 안된다.
단속이 심하면 소비위축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말해
원산지 단속 수위를 적절히 낮추겠다는 뜻을 밝혔다.

http://news.nate.com/Service/news/ShellView.asp?ArticleID=2008070706112567111&LinkID=740&lv=0

옳은 말이다.

그대들이30개월 미만 뼈없는 살코기가 아닌 대부분의 미국 사람이 먹지 않는 위험한 부위를 먹는 쇼를 한번 한다해도그 것을 국민에게 매일 먹으라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방법을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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