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9. 23:01

이름은 발레리우스.

기원전 509년,로마의 2대 집정관이다. 그는 이름난 갑부였고 전투마다 승리했다.

로마 시내의 광장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언덕에 위치한 웅장한 저택에서 호화스럽게 살고 있었다. 그가 부자였기 때문이지만,시민들에게 그의 저택은 마치 왕궁처럼 보였다.

그러나 집권 100일 만에 맛이 갔다.

발레리우스는 네 마리의 백마를 타고 개선한 게 탈이 났다. 옛날 왕이나 하던 거창한 행사였다.

그래서 시민들은 "그가 장차 왕이 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발레리우스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왕위를 노린다." 로마가 술렁거렸다.

민심 이반은 도를 더해 갔다. 동원령이 떨어져도 시민들이 전투에 나오지 않았다. 계곡에 모여 밤샘 농성을 했다. 발레리우스는 언덕 위 저택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봤다.

청와대 뒷산에서 촛불을 지켜보며 ‘아침이슬’을 들은 우리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여기가 끝이다. 그 다음 장면부터 완전히 다르다.

자신의 나쁜 평판을 친구에게 전해들은 발레리우스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저택을 부숴 버리고, 땅값이 싼 성벽 근처에 소박한 집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직접 볼 수 있게끔 항상 대문을 열어 두었다.

또한 호위병들이 들고 다니는 장대 끝의 도끼를 없애고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 갈 때에는 장대의 끝을 내리도록 함으로써 계층간의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소통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컨테이너 장벽인 '명박 산성' 뒤에 숨은 이 대통령과 딴판이다. 발레리우스는 내각도 확 바꾸었다. ‘평민이 집정관에 오를 수 있다’는 법을 만들어 평민들을 대거 발탁했다.

이러한 발레리우스의 노력으로 시민들은 점차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부족했을까. 발레리우스는 개인 재산마저 도로와 하수도 사업에 털어 넣었다.
머지않아 로마 시민의 마음이 돌아섰다.

발레리우스는 평민이 주축인 중무장 보병을 이끌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후 그는 5번이나 집정관에 뽑히는 기록을 세웠다. 숨을 거둘 때 그에겐 장례 비용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로마 시민들이 조의금을 모아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그의 시신을 옛 집터인 베리안 언덕에 묻었다. 1년간 상복을 입고 애도했다. 공화국을 반석에 올린 그에게 ‘포플리콜라’(시민의 친구)라는 명예로운 존칭이 붙었다. 이후 발레리우스 가문은 15세기 중반 동로마 제국 멸망까지 거의 2천년 동안 최고 명문가로 존경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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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