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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1.25 밥상머리 군주
- 2009.11.24 통계에 대해
- 2009.11.23 한국어를 사후에 한국어로 통역하다.
- 2009.11.23 딸에게
식구(食口) 즉 '먹는 입'
'밥상머리에서 군주 되기'
가부장의 권위는 먹이의 확보와 분배에서부터 출발했다.
밥을 먹는 순간만큼은 지금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양과 질에 있어 시비가 있더라도 누구의 노고 덕분인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사회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의 출발을 가족 모델에서 찾았다.
분명한 사실은 가장이라는 존재는
은유적인 차원에서나 실질적인 차원에서나 한 공동체 내부에서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며 동의를 창출하거나 적을 설정하는 데 있어 더없이 유효한 기능을 수행한다.
물론 가장의 권력은 신성시될 수도, 질시의 대상이 될 수도, 완전히 폐기되었다가 다시 부활할 수도 있다.
따라서 권력의 향방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유통되는 가장의 상징에 유달리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냉혹한 독재자도 죽은 뒤에 사라지기는커녕 유령이 되어 오랜 기간 우리 곁을 배회한다.
그의 생전에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그에게 저항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기에 그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죽은 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이를 만나면 따뜻한 눈길을 주던 이가 생각난다.
그 따뜻함을 무능이라 비웃던 이도 마찬가지다.
현실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그저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따뜻한 이를 만나면 차디찬 서늘함을 그리워하는 이도 있다.
현재의 가장이 시행착오를 겪으면 '죽은 가장은 이러했다.'
많이 듣는 말이다.
아마도 우리는 산자들 끼리만이 아니라 죽은 자와도 협상하고 거래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 모른다.
언제나 가장의 권위는 힘이 아니라 식구의 입속에 먹을 것을 채워줄 때 생겨나는 것이다.
현실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아무리 무능한 가장도 그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기 싫어한다.
함부로 대들어서는 안된다.
아니, 절대로…….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라면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나? 완고한 절대 가장의 그 천둥 같은 목소리…….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닫는 것조차 망설여지고 밥 한 숟가락 넘기는 것도 불편하기에.
그래서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보다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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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에 대해
통계의 언어는 숫자다. 숫자에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어 같은 말도 통계로 말하면 신뢰가 더 크다.
그러나 바로 그 통계의 힘을 확보하기 위해 으뜸이어야 하는 것은 신뢰성이다.
통계는 정직한 것 같지만 거짓말하기에는 통계가 가장 요긴하다. 어떻게 만들어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통계는 극과 극의 양면성을 지닌다. 통계는 마술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지만 사실 통계 없이 살 수 없다.
국가 정책은 통계에서 시작된다.
국민에게 알리는 통계와 자신이 알고 있는 통계가 다르다면?
유엔은 통계의 질과 독립ㆍ객관성 확보를 위해 법에 의해 규율되는 통계 전담 부서를 설치, 운영할 것을 각국에 권고하고 있다.
독립의 관건은 정치 작용의 배제다.
유별나게 요란한 정부나 정권일수록 업적 과시를 위해 통계를 양산하고 애용한다.
이런 정치 작용에 속아넘어가지 않으려면 통계의 독립이 필수적이다.
법은 입맛대로 통계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제도와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변경이나 가필(加筆)의 가능성을 차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세상에 숫자의 세계는 믿을 만할 것 같아 통계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이 세계 역시 만만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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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김인숙의 소설 ‘그 여자의 자서전’은 정계에 나가고 싶어하는 졸부(猝富)의 자서전을 대신 써 주는 젊은 여자 소설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거금의 원고료 제안에 '경제적 어려움'이란 핑계를 대며 술술 써나가던 자서전은 졸부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 대목에서 주인공은 의뢰인을 미화하는 일에 모멸감을 느낀다.
“작가들이란 게 없는 말도 잘 불려서 하더구만, 있던 일에 살도 못 붙인단 말요?”
의뢰인은 작가를 타박한다.
잊었던 청춘시절의 사랑과 꿈을 떠올리며 주인공은 수치스러운 현실에 우울해한다.
그러면서 변명한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에 관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그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그런 정보들은 가변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쓰고 있는 건 그의 자서전이지, 전기가 아닌데요. 게다가 자서전을 쓰는 건 그 사람이지, 내가 아닌데요.
나는 대필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내가 받은 대가는 그것에 대한 것뿐이라는 것, 적어도 내게는 그의 진실을 감당할 이유 같은 건 없다는 것, 그러니 당신이 천하의 사기꾼이든 살인마든, 그런 건 내가 알 바 아니라는 것……
요즈음 한국어를 한국어로 번안하는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몇 년 전에 고등학교 3년생 셋이 ‘편찬’한 ‘대한민국 학교대사전’에 ‘고 3’을 이렇게 풀이해 놓았었지.
‘아플 자유도, 딴청 필 자유도, 게다가 놀 자유도 없는 다소(?) 불운한 종족.’
‘서시(序詩)’ 패러디도 실려 있었다.
‘수능 날까지 성적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식후에 이는 졸림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무사 진학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출제되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시험을 치러 가야겠다
오늘밤에도 재수(再修)가 꿈에 스치운다.’
어디선가 본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를 패러디한 ‘고 3의 사랑노래’도 있다.
고 3이라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공부가 끝나 돌아오는
가로등 밝힌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고 3이라고 해서 재미를 버렸겠는가
복합상영관에 한 관 남았을
보고 싶던 영화도 그려보지만…
고 3이라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고 3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갇혀 살아온 ‘대입 감옥’의 형기(刑期)가 .......
시험은 잔인하다.
환호하는 이가 있으면
당장 방에 틀어박혀 눈물짓는 아이도 있고.
자책, 회의, 분노, 체념에 빠지기도 하리라.
우리 아이들 하나하나가 세상에서 유일하고 그래서 가장 소중한 존재다.
그 꽃 같은 아이들을 고통과 좌절에 빠뜨리는 건 모든 어른의 죄(罪)다.
짠하고 대견한 우리 아이들에게 위로 한마디 건넨다.
욕봤다.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다드라.
여러분이 그림을 그릴때
가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워 버리고
몇번이고 다시 그려야한다.
그것은 파괴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변형되고 집약되어서
다시 구체화하는 것이다.
피카소의 해변을 달리는 두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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