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폴로지아 (APOLOGIA)
수사학에서 사과문을 통칭하는 장르를 ‘어폴로지아(Apologia)’라고 한다. 원조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무지에 대한 지(知)’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유명한 변론을 하고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 뒤를 이어 리처드 닉슨, 에드워드 케네디 등 크고 작은 인물들이 여론 법정에서 궁지에 몰릴 때 다양한 논리로 자신들의 처지를 변명했다.
풍성한 전통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어폴로지아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각종 법과 제도가 발달하면서 그들에게 구차한 변명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고
요즈음은
‘공중관계학(PR)’이라는 홍보전문가들이 공인과 공중 사이를 매끄럽게 오가며 여론 법정이 설 낌새가 보이면 미리 조치를 취해 사태가 악화되지 않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사태가 악화되어도 요즈음은 사과의 수사학도 많이 바뀌어 얼핏 들으면 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말로 넘어 가기도 한다.
자기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사람보다는 정중히 사과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양심적이다. 그러나 애초에 사과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못하다. 법과 제도가 사과할 상황을 미연에 방지해 준다면 더욱 좋을 일이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모든 대통령은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는 걸 꺼린다. 사과를 하게 되면 그 사안에 대한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고, 이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기 때문이란 게 정치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때론 시의적절한 사과가 대통령을 위기에서 구하기도 한다.
대통령의 사과에서 중요한 건 국민과의 소통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사생활과 관련한 대국민 사과를 통해 정치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1998년 르윈스키 추문에 대해 “나는 내 아내를 비롯해 모든 국민을 오도했다. 그 점을 진심으로 후회한다”고 말했다. 미국민들은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클린턴은 탄핵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사과에 인색하다는 평을 듣는다. 클린턴이 사생활뿐 아니라 여러 사안에서 비교적 자주 사과를 했던 데 대한 반작용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부시는 후세인 정권이 9·11 테러에 관련됐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국민을 속였다는 거센 비난에 직면하면서도 그는 끝까지 사과를 거부했다.
그런 그가 재임 중 사과한 대표적인 사례는 2004년 이라크인 포로 성학대 파문이었다. 그는 사건 일주일 뒤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과의 정상회담 기자회견 자리에서 “나는 압둘라 국왕에게 포로들의 고통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그의 사과는 비판 여론을 잠재우지 못했다. 이라크 국민에게 직접 사과하지 않고 압둘라 국왕에게 발언하는 식으로 사과한 점, 그리고 이 사건 책임자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경질하지 않은 점 때문이었다. 사과의 진실성을 의심받은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SERIES/19/2
1968년 1월23일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원산항 폭격이 거론되는 등 긴장이 높아졌지만,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있던 미국으로선 또 전쟁을 벌일 처지가 아니었다. 미국은 나포 지점이 공해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유엔해양법에 따르면 원산 앞 여도에서 12마일 이내이니 북한 영해였다.
미국으로선 승무원들을 송환받으려면 북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말곤 다른 선택이 없었다.
억류된 승무원들은 영해 침범과 첩보 행위를 공개 시인해야 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묘했다. 승무원들은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아무리 경미한 침범이라고 해도 행위를 완성하기에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이는 미국에서 강간을 법적으로 정의할 때 쓰는 표현이었다. 승무원들이 북한 쪽에 내놓은 항해지도에는 푸에블로호가 시속 2500마일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운항한 것으로 돼 있었다. 잘못했다면서도 상대를 조롱한 셈이다.
미국 정부도 묘안을 찾아냈다. 그해 12월23일 미국 대표인 길버트 우드워드 소장은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사과문에 서명하기 앞서 “사과문의 내용에 동의해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성명을 낭독한 뒤 펜을 들었다.
http://www.hani.co.kr/arti/SERIES/19/3068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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