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食口) 즉 '먹는 입'
'밥상머리에서 군주 되기'
가부장의 권위는 먹이의 확보와 분배에서부터 출발했다.
밥을 먹는 순간만큼은 지금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양과 질에 있어 시비가 있더라도 누구의 노고 덕분인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사회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의 출발을 가족 모델에서 찾았다.
분명한 사실은 가장이라는 존재는
은유적인 차원에서나 실질적인 차원에서나 한 공동체 내부에서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며 동의를 창출하거나 적을 설정하는 데 있어 더없이 유효한 기능을 수행한다.
물론 가장의 권력은 신성시될 수도, 질시의 대상이 될 수도, 완전히 폐기되었다가 다시 부활할 수도 있다.
따라서 권력의 향방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유통되는 가장의 상징에 유달리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냉혹한 독재자도 죽은 뒤에 사라지기는커녕 유령이 되어 오랜 기간 우리 곁을 배회한다.
그의 생전에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그에게 저항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기에 그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죽은 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차가운 이를 만나면 따뜻한 눈길을 주던 이가 생각난다.
그 따뜻함을 무능이라 비웃던 이도 마찬가지다.
현실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그저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따뜻한 이를 만나면 차디찬 서늘함을 그리워하는 이도 있다.
현재의 가장이 시행착오를 겪으면 '죽은 가장은 이러했다.'
많이 듣는 말이다.
아마도 우리는 산자들 끼리만이 아니라 죽은 자와도 협상하고 거래하는 법을 배워야 할지 모른다.
언제나 가장의 권위는 힘이 아니라 식구의 입속에 먹을 것을 채워줄 때 생겨나는 것이다.
현실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아무리 무능한 가장도 그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기 싫어한다.
함부로 대들어서는 안된다.
아니, 절대로…….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니라면 감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나? 완고한 절대 가장의 그 천둥 같은 목소리…….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닫는 것조차 망설여지고 밥 한 숟가락 넘기는 것도 불편하기에.
그래서 살아 있는 우리 모두가 보다 지혜롭게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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