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이 되면 생활이 지루해진다. 세상만사가 새로울 것도 없고 하루해를 보내기가 따분하기만 하다. 그런데 세월은 뭉텅이로 사라진다.
처음에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다가 끝날 때쯤에는 하루가 화살처럼 가버린다.
짧게 느껴졌던 시간은 지나고 보면 길게 인식되고 긴 시간은 짧게 생각되는 ‘시간의 역설’이라 했던가?
작은 일에도 부아가 치민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인간이 세상사를 논한다.
『광기의 역사』에서 ‘푸코’는 시대마다 ‘광인(狂人)’을 다양하고 이질적인 언어로 규정하고 있다며 “언어는 사물의 진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사물을 특정한 의미를 내재한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도구”일 뿐 이라고 주장했다.
내가 믿는 '옳음'이란 살아가기 위한 변명의 수단인가?
황석영은
“검은 정장에 넥타이를 맨 개신교 목사, 검고 긴 가운을 걸친 가톨릭 사제, 흰 천을 감고 어깨를 드러낸 힌두의 바라문, 장옷에 머리에는 흰모자를 얹은 무슬림 이맘, 노란 가사를 걸치고 머리를 박박 깎은 불승, 턱수염에 검고 둥근 카파 모자를 쓴 유대교 랍비, 그들은 모래 위에 가까스로 서서 제각기 알 수 없는 소리로 떠들고 있다. … 그들은 목청껏 떠들지만 서로가 남의 말을 삼켜버리려고 더욱 큰 소리를 내기 때문에 뒤섞여서 아무런 의미도 전하지 못한다.” 고 외쳤다.
“ 생각을 말할 때 신실하며, 그의 의견은 진실이고. 그는 그가 참이라고 아는 것을 말한다.”는 파르헤지아스트는 누구일까?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분란의 소지가 있음에도 말하고
(궤변으로) 설득하기가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기를 선택하고, 거짓이나 침묵이 아니라 아첨이 아니라 비판을, 내 이익이 아니라 도덕적 의무를 선택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인정해야한다.
지나고 나서
"궤변가나 아첨꾼에 자리를 잃고 결국 껍데기만 남았다. 진실을 감추고 침묵 뒤에 숨어 위기를 피해 가는 것이 더 나았다."해야 지나간 버스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오지도, 살아갈 용기도 없는 인간이
“세상 다 그런거야.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선 안 된다.” 고 뇌까린다.
그리고 웃는다.
옆에서 망구가 왜 그렇게 웃느냐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