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15. 22:14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우리나라 최초 ‘안무가’의 사진이 공개됐다. 본지는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으로부터 1910년 전인 1907~1909년 사이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남장여자를 한 안무가 사진 2장을 입수했다.

사진은 남자 한복을 입고 머리에 갓을 쓴 채 다양한 동작의 안무를 하고 있는 남장여자가 익살맞은 표정을 짓고 있다. 현대 가수들의 춤의 원조가 바로 옛 안무가의 안무(춤동작)들이다. 1910년대 당시에는 무용이 인기가 많았던 반면, 안무가는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안무가들이 무용수로 전환하기도 했다.

정성길 관장은 “당시는 남자 안무가가 거의 없었지만, 남장여자는 더더욱 찾기 힘들었다. 이 같은 희귀한 상황 중에서 사진에 담긴 이 남장여자를 최초 안무가로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 관장은 “안무가는 남사당과는 다른 안무였다. 이들 안무가는 늘 그늘진 곳에서 활동해 제대로 꽃피워보지 못했지만, 오늘날 세계적 가수가 된 싸이의 안무가 나온 것도 원조 안무가의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244318&utm_medium=twitter&utm_source=twitterf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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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2. 22:26

메이지 37~38년은 러일전쟁(1904~1905) 시기다.


서지학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발굴한 <극비(極秘) 메이지(明治) 37~38년 해전사>에 의하면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 이후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10개년 군비증강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1898년 4월 쿠바에서 미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해군 장교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파견돼 전쟁을 참관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은 통신과 해저케이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세계 최고의 항해력을 자랑하던 스페인 함대가 미군이 전함에 설치한 무선 전신시설로 서로 연락해 협공하는 작전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키야마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무선기술을 받아들이는 게 유일한 방어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1899년 6월 외무대신에게 무선기술 개발과 망루 설치를 제안했다. 망루는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그가 제시한 안에는 대만에서 시작해 일본과 한국에 무선 망루를 세우는 계획이 들어갔다. 이어 석 달 만에 이 안에 대한 허가가 떨어졌다. 

일본은 이후 자국의 규슈와 주 고쿠, 한국의 죽변만(울진), 울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에 망루와 통신용 해저케이블을 설치했다. 실제로 러일전쟁을 지휘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한국의 진해에서 무선 전신을 받고 지시를 내렸다. 


독도는 러시아의 동해 종단 계획과 일본의 동해 횡단 계획의 교차지점에 있다.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일본 군함이 독도를 여러 차례 실사했다.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의 시작점인 1904년 5월15일 중국 뤼순항 전투에서 최신예 해군 전력의 3분의 1을 상실했으나 이후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하는 방법으로 전력 부족을 보완했다. 독도 망루 설치는 1904년 9월25일 해군 군령부가 조사를 명령하면서 시작됐다. 1905년 7월25일 기공해 8월19일 준공했다.

일본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쓰시마(對馬)에서 격파한 뒤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서 동해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러일전쟁은 종결된다. 러시아 발틱함대 사령관 로세스트벤스키 중장이 중상으로 의식을 잃은 채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곳은 울릉도 서남방 약 40해리 지점이었고, 함대 지휘권을 장악한 네보가토프 소장이 주력 잔함을 이끌고 일본군에 투항한 곳도 독도 동남방 약 18해리 지점이었다.


최서면 원장은 “일본은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였고 이를 재확인하기 위해 1905년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고 주장하지만, 1899년부터 군사적 목표 아래 기지를 세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독도는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말했다.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는 “아베 신조 총리 취임 이후 일본의 군사대국화 흐름에서 일본이 독도에 집착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며 “독도 경제수역 확보로 어장과 대륙붕을 이용하려는 경제적 측면보다 군사적 측면이 독도에 집착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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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2. 22:15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의사 면허 제도를 실시한 나라는 영국으로 1858년부터이다. 국가에 의한 의사 면허 제도가 실시되기 전에는 사실상 ‘누구든지’ 의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의사 면허 제도가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이다.

1900년 1월2일 대한제국 내부(지금의 안전행정부)는 내부령 제27호로 ‘의사 규칙(醫士規則)’을 제정했다. 이 법령에는 의사, 한의사가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정부(내부)가 자격 있다고 인정한 사람에게 똑같이 ‘의사(醫士) 인허장’을 부여했다. 


대한제국 시기 정부로부터 면허를 받은 의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조선총독부 통계요람>(1911년 11월 발행)에 의하면 일제강점 직전인 1909년 12월말 현재 등록된 한국인 의사 수는 2659명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요즈음 식으로 말해 한의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근대서양식 의사와 전통 의료인을 구분하고 차별하게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11월15일 ‘의사 규칙’, ‘의생 규칙’을 제정하고 1914년 1월1일부터 시행했다. 이로써 전통 의료인은 의사(醫師)가 아닌 의생(醫生)으로 격하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 면허 의사 수는 1911년 479명, 1912년 72명으로 급감했다. (전통)의사들은 나라와 면허를 함께 빼앗긴 것이다.


의생 규칙이 시행된 지 1년 뒤인 1914년 말 당국에 등록된 의생 수는 5827명이었는데 해방 직전인 1943년에는 3337명으로 30년 사이에 40% 이상 감소했다. 1914년 이후로는 새로운 의생 면허를 거의 발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고서도 여전히 의생으로 불리던 전통 의료인은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40년 만에 (한)의사 호칭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1년 법 제정 당시 한의사(漢醫師)이던 호칭이 1986년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한의사(韓醫師)로 바뀌었다.



최초의 근대서양식 한국인 의사는 국내가 아니라 외국에서 탄생했다.  두 사람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서재필(徐載弼·1864~1951)은 1890년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얻고 1892년 컬럼비안 의과대학(3년제)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95년 말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에 머문 2년 반 동안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했으나 의사로 활동한 적은 없었다. 


두번째 인물인 김익남(金益南·1870~1937)은 

갑오개혁 정부의 학부(교육부)가 실시한 일본 유학시험에 합격후 도일해서 1899년 7월 도쿄 지케이(의원) 의학교(4년제)를 졸업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는 최초로 근대식 정규 의학교육을 받고 의사가 된 것이다.



 1년 동안 모교인 지케이의원에서 당직의사(인턴/레지던트 격)로 근무한 뒤 귀국해서 조선 정부가 갓 설립된 조선병원(朝鮮病院) 의학교의 교관이되었다. 교장 지석영이 의학교의 정신적 지주였다면, 김익남은 직접 교육을 맡은 의사 양성의 산파였다. 그리하여 1902년 7월4일, 한국 역사상 최초로 방한숙, 유병필, 김교준 등 근대식 의사 19명이, 이어서 1903년에는 13명이 배출되었다.


김익남은 일제의 중요한 이용 대상이었지만 일제에 포섭되거나 협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1907년 6월 이토 히로부미 암살 기도가 실패하자 자결한 정재홍을 추모하는 등 일제의 눈에 벗어난 행동은 뚜렷했다. 따라서 김익남이, 일제가 한국 의료계를 장악하기 위해 1908년부터 부여하기 시작한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못했다.


http://m.khan.co.kr/view.html?category=1&med_id=khan&artid=201403212021105&code=210100



최초의 근대 의사 김익남, 그의 진짜 정체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6264


Posted by qlstnfp
2014. 3. 8. 08:42

 [2014-03-07 14:04:52]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40307_0012771176&cID=10102&pID=10100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하얼빈에서 사살할 당시 일본인으로 위장 잠입했을 가능성이 제기


 1910년 8월14일자 뉴욕 타임스는 ‘스릴 넘치는 순간을 포착한 희귀한 사진들(Unusal Snapshots Taken at Thrilling Moments)’의 제목으로 한 면 전체를 채웠다.


프랑스 잠수함 조난, 러시아 광산 폭발 등 20세기 초에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포착한 것으로 대한의군 안중근 참모중장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순간 등 8대 사건이 사진과 함께 게재됐다. 그중에서도 신문의 정중앙에 위치해 ‘세기의 사건’으로 대접받은 안중근 의사의 저격 순간은 유일하게 삽화로 소개됐다.

그런데 이 삽화엔 특이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이토를 사살하는 안중근 의사의 복장이 일본 기모노 차림이었고 이들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사 내용을 보지 않는다면 영화 촬영장을 묘사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삽화 설명문에 ‘이토 백작을 저격하는 장면은 활동사진(moving picture)으로 촬영됐고 재판에서 상영된 후 일본 정부가 압수했다’고 표기했다.

1909년 12월9일

뉴욕 타임스와 샌프란시스코 콜, 로스앤젤레스헤럴드 등 미국의 주요 미디어들은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발 기사로 일제히 동영상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는 

“오늘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입항한 일본의 증기여객선 가가마루호가 가져온 소식에 따르면 하얼빈에서 이토 백작이 피격될 때 러시아 촬영기사가 저격 순간을 촬영했다”면서 “이 동영상은 한국인 저격자의 재판 때 활용된다”


 “일본 관리들은 비극의 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500피트(약 10분 분량)의 동영상 필름을 입수, 재판 때 활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와 함께 “또다른 필름 한 세트도 일본에서 공개될 예정”이라고 덧붙여 촬영된 필름이 두 세트임을 시사했다.


이 동영상은 이듬해 2월 일본에서 일반에 공개 상영됐고 이후 미국에서도 상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12월25일 미니애폴리스의 ‘더 벨맨’ 지는 “사망한 이토 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백작이 한국 통감으로 임명됐다”면서 “두 사람은 오랫동안 라이벌 관계로 권력을 번갈아 행사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러시아 촬영기사가 촬영한 이토의 피격 장면이 내년 재판 때 활용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뉴욕 타임스는 1910년 8월14일 특집 기사에서 “이토가 코콥포프를 만날 때 이례적으로 동영상 촬영이 된 것은 유럽의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촬영기사를 현지에 보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카메라 필름은 빠르게 돌아가며 열차에서 내린 이토 일행이 플랫폼을 건너 코콥초프 장관을 향해가는 장면을 담았다.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군중 속에서 한 한국인이 나와 리볼버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나머지 세 발은 비서 등 수행원들이 맞았다. 활동사진은 계속 돌아갔고 모든 장면들이 촬영됐다. 군중들이 공포에 빠진 장면들이 이어졌다.”

뉴욕 타임스는 이어 “이토 백작의 피격에 관한 필름 두 개가 미국에 도착했지만 널리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동영상으로 우연히 촬영된 필름은 정말 가치있는 실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동영상의 첫 번째 필름은 카메라 속의 저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부서졌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는 러시아 촬영기사가 이토 도착 직전부터 저격 순간, 안중근 의사 등이 체포되고 현장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호송되기까지의 전 장면이 촬영됐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날 게재된 애니메이션은 동영상을 확인하고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저격 상황의 그림은 이토의 관복과 수행원의 위치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성 두 명이 환영의 인사를 하는듯한 포즈도 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안중근 의사의 일본옷 차림이다. 이는 현장의 삼엄한 경비를 고려해 일본인으로 위장했을 개연성을 말해준다. 뉴욕 타임스가 저격 직후 송고한 기사에 따르면 플랫폼엔 이토를 환영하려는 일본인들이 운집했다고 돼 있다. 만일 안중근 의사가 현재 남아 있는 자료사진처럼 허름한 중국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러시아 경찰이 수상쩍게 봤을 가능성이 크다.

뉴욕 타임스의 삽화 자료를 처음 발굴한 재미 언론인 문기성씨는 “뉴욕 타임스가 동영상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삽화를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가 없다. 당시 장면들은 사진 촬영된 것도 없고 우연히 찍힌 이 동영상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일본인 위장이 사실이라면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계획을 세웠는지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안중근 의사 저격 동영상 1910년 미국서도 상영

역사에 남을 세기의 동영상은 그러나 이후 종적을 감췄고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로부터 85년이 지난 1995년 일본 NHK 방송이 방영한 다큐물에서 안중근 저격 동영상의 일부가 방영됐다.


이토가 타고온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과 이토 일행이 환영객의 영접 속에 플랫폼에서 걸어오는 장면, 안중근 의사 등이 포박돼 호송되는 흐릿한 장면 등 30초 분량이었다. 그러나 저격 순간이 촬영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KBS 역사스페셜팀은 동영상 원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NHK 다큐물이 1941년 아사히신문이 제작한 ‘약진의 흔적’이라는 영화 필름을 활용한 것임을 알게 됐다.

동영상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저격 일주일만인 1909년 11월3일 경성신문의 보도였고 일본 정부가 동영상을 현재 가치로 2억 원에 해당되는 거금 1만5000원을 주고 구입한 사실도 밝혀졌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열리기 직전인 이듬해 2월1일부터 6일까지 도쿄 국기관에서 공개 상영되는 일도 있었다.

저격 동영상이 뉴욕 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미국에서도 상영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지만 이 동영상이 사본인지, 원본을 임대한 후 다시 돌려줬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만일 사본이라면 미국에서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로선 뉴욕 타임스의 삽화 자료가 안중근 의사가 감행한 ‘세기의 저격’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현존하는 최고의 자료인 셈이다.

다음은 1910년 8월14일 뉴욕 타임스 특집 기사 중 이토 처단 부분.

'지난해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진은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유명한 정치인이자 한국 통감인 이토 백작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콥초프를 만나기로 돼 있었다.

이토 일행을 일본 환영객들이 플랫폼까지 나와 맞이 하기 위해 공식적인 경호의 벽이 완화된 상태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례적으로 활동사진(moving picture)으로 촬영됐다. 유럽의 영화 제작자 한 사람이 촬영기사를 현지에 보내 촬영토록 한 것이다.


빠르게 돌아가는 카메라 필름은 이토 일행이 열차에서 내려 플랫폼을 건너 코콥초프 장관을 만나기 위해 플랫폼을 건너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때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군중 속에서 한 한국인이 나와 리볼버 권총을 꺼내 발사했다.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나머지 세 발은 비서 등 수행원들이 맞았다. 활동사진은 곟속 돌아갔고 모든 상세한 장면들이 촬영됐다. 군중들이 공포에 빠진 모습이 이어졌다.

현장을 촬영한 필름이 현상됐을 때 내용은 물론, 반응도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유럽의 관료 집단은 이것이 공개되면 비슷한 폭력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한 태도는 최근 미국 회사가 코네티컷의 폭발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을 유럽의 딜러들에 판매하려고 했을 때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 한 남성은 그것을 러시아로 가져가려다 체포되기도 했다.

폭력이나 범죄의 장면을 보여주는 동영상에 대한 편견은 국가검열위원회(National Board of Censors)의 영향에 따라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토 백작의 저격에 관한 필름 두 개가 미국에 도착했지만 널리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동영상으로 우연히 촬영된 필름은 정말 가치있는 “실제 상황”이다. 동영상의 첫 번째 필름은 카메라 속의 저격자를 조사하는 과정을 담았지만 파괴됐다. 동영상은 소방차용말들이 멀리서 다가오고 그중 하나가 확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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