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37~38년은 러일전쟁(1904~1905) 시기다.
서지학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발굴한 <극비(極秘) 메이지(明治) 37~38년 해전사>에 의하면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 이후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10개년 군비증강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1898년 4월 쿠바에서 미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해군 장교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파견돼 전쟁을 참관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은 통신과 해저케이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세계 최고의 항해력을 자랑하던 스페인 함대가 미군이 전함에 설치한 무선 전신시설로 서로 연락해 협공하는 작전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키야마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무선기술을 받아들이는 게 유일한 방어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1899년 6월 외무대신에게 무선기술 개발과 망루 설치를 제안했다. 망루는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그가 제시한 안에는 대만에서 시작해 일본과 한국에 무선 망루를 세우는 계획이 들어갔다. 이어 석 달 만에 이 안에 대한 허가가 떨어졌다.
일본은 이후 자국의 규슈와 주 고쿠, 한국의 죽변만(울진), 울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에 망루와 통신용 해저케이블을 설치했다. 실제로 러일전쟁을 지휘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한국의 진해에서 무선 전신을 받고 지시를 내렸다.
독도는 러시아의 동해 종단 계획과 일본의 동해 횡단 계획의 교차지점에 있다.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일본 군함이 독도를 여러 차례 실사했다.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의 시작점인 1904년 5월15일 중국 뤼순항 전투에서 최신예 해군 전력의 3분의 1을 상실했으나 이후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하는 방법으로 전력 부족을 보완했다. 독도 망루 설치는 1904년 9월25일 해군 군령부가 조사를 명령하면서 시작됐다. 1905년 7월25일 기공해 8월19일 준공했다.
일본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쓰시마(對馬)에서 격파한 뒤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서 동해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러일전쟁은 종결된다. 러시아 발틱함대 사령관 로세스트벤스키 중장이 중상으로 의식을 잃은 채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곳은 울릉도 서남방 약 40해리 지점이었고, 함대 지휘권을 장악한 네보가토프 소장이 주력 잔함을 이끌고 일본군에 투항한 곳도 독도 동남방 약 18해리 지점이었다.
최서면 원장은 “일본은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였고 이를 재확인하기 위해 1905년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고 주장하지만, 1899년부터 군사적 목표 아래 기지를 세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독도는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말했다.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는 “아베 신조 총리 취임 이후 일본의 군사대국화 흐름에서 일본이 독도에 집착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며 “독도 경제수역 확보로 어장과 대륙붕을 이용하려는 경제적 측면보다 군사적 측면이 독도에 집착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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