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15. 16:22




주독 한국문화원 발행 '한국문화' 잡지 게재 사진(오른쪽 두번째 손탁, 베를린·레겐스부르크=연합뉴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5/09/14/0601120000AKR20150914203000082.HTML?template=5566


1909년 이후 보에르가 발행한 손탁호텔 사진엽서



독일 국적의 한 프랑스여인(독일령 알사스 태생)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18381922)

열강이 조선 반도를 유린하며 각축하던 시기, 1885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따라 조선을 찾은 손탁은

독일어, 불어, 러시아어 등 각종 언어에 능통했고

손탁은 한국어도 빠른 속도로 습득하면서 민비의 신뢰를 얻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궁궐에서 양식 조리와 외빈을 접대하는

18961909년 황실전례관(Hofzeremonienmeisterin)으로 일했다.

 

고종에게 커피 맛을 알게 해 줬다는 에피소드가 흥미롭게 회자되는 손탁

직함이 말해주듯 황실 음식과 의전을 챙기는 게 공식 업무였지만, 외국 고위 사절과 조선 황실의 가교 역할을 하며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사료는 전한다.

 

당시 조선은 위안스카이에게 한창 내정을 간섭당하고 있던 시기였고,

고종과 민비는 손탁에게 궁내부와 러시아 공사관 사이 사이의 접선이라는 임무를 맡겼다.

손탁은 한러밀약으로 대표되는 반청운동을 주도하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냈고,

이를 기특히 여긴 고종은 1895년 한옥을 한 채 그녀에게 선사한다.

 

이 한옥은 을미사변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대한제국의 정세속에서

각국 외교관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아관파천과 같은 각종 정치적 책략의 진원지가 된다.

 

손탁 자신이 이런 계획에 깊이 관여했고,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그녀에게 기존의 한옥을 방 다섯개짜리 양옥으로 업그레이드(?)시켜주는 것으로 보답한다.

 

이 양옥은 손탁이 서구풍으로 인테리어하고 각종 투숙객을 맞이했던 것이 바로 손탁호텔의 출발점이다.

 

한편 대한제국은 세계 곳곳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그에 따라 외교관들 및 귀빈들의 방문이 증가함에 따라 개화기에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이 가장 불편해했던 것은 숙박시설이었다. 1884년 제물포에 당도한 알렌은 해리라는 중국인이 운영한 호텔의 당구대 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술회했는데 당시에 이 해리호텔과 함께 일본인이 세운 서양식 호텔인 다이부츠호텔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꼽힌다.

경인선이 완공된 이후 종착역이던 서대문역 인근의 정동에도 서양식 호텔들이 생기게 된다. 그중에서도 손탁호텔은 황실 궁내부의 프라이빗 호텔로 운영되는 특별한 곳이었다.

 

이 때 대한제국의 시선이 간 것이 바로 손탁이 운영하던 이 손탁빈관.

그렇지만 방 다섯개는 호텔로 운용하기에는 너무 작았기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2년 기존의 양관을 헐고

1,184평에 달하는 황실 소유의 가옥 및 토지를 하사하고, 25개의 객실을 갖춘 2층짜리 양관으로 재건축한 뒤,

손탁에게 경영을 맡기니 이것이 바로 손탁호텔이다.

2층이 VIP실로 사용됐고, 1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 또는 식당, 커피숍으로 이용했다.

손택양저(孫澤孃邸), 정동화부인가(貞洞花夫人家) ,손탁빈관, 한성빈관 등으로 불린 이 호텔은

호텔의 1층에는 서울 최초의 커피숍이 있었는데, 서울에 체류하던 서양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영국의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도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이 호텔에 묵었고, 톰 소여의 모험를 집필했던 미국의 소설가인 마크 트웨인도 이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

1905년 당시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머물며 을사늑약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기도 하다. 1909년 손탁이 귀국한 후 경영난에 빠져 1917년 이화학당에 넘어가 기숙사로 사용되다 1922년 프라이홀 신축을 위해 헐렸다

 

프라이홀도 한국 전쟁 당시에 서울에 가해진 폭격으로 소실되고, 현재는 손탁호텔이 위치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비석만 남아있다.

 

손탁의 귀국 후의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러시아 혁명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객사했다는 등 풍문이 많았으나

1922년에 프랑스 칸에 마련해 두었던 자택에서 노환으로 편안히 사망했음이 확인되었다.

 

 

손탁의 추천으로 190519061년 동안 조선 황실의 외교전례를 담당했던 독일여성 엠마 크뢰벨의 저서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Wie ich an den koreanischen Kaiserhof kam)(엠마 크뢰벨 저)의 번역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손탁이 프랑스 칸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했음이 밝혀졌다.

 

크뢰벨 저서를 번역한 김영자(76) 독일 레겐스부르크대 박사

 

자신이 독일 에어푸르트대 비교문학자인 질비아 브레젤 박사의 논문을 보고 나서 칸 현지 답사에 나선 결과 "192277일 오전 8시 칸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돼 있었다. 칸 시립천주교묘지를 찾아가 '조선황실의 서양전례관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이라고 새겨진 묘비도 확인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