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이전'에 해당되는 글 170건

  1. 2007.01.10 기독교의 전래
  2. 2007.01.10 단원의 풍속도
  3. 2007.01.09 독립문
  4. 2007.01.09 진찬진연도(進饌·進宴圖) 1
2007. 1. 10. 04:19

임진왜란 중(1594) 한국에 온 최초의 서양 신부 세스페데스가 상륙한 곳으로 추정되는 경남 웅천

1883년 민영익(앞줄 가운데)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이 미국을 방문

광혜원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최초로 내한(1884년 9월)한 알렌이 고종의 윤허를 얻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오늘의 세브란스병원 전신이 되었다

1884년 6월 29일 황해도 장연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교회 1895년 기와 지붕의 한식교회 건물로 개축한 소래교회

아펜젤러(좌)와 언더우드(우) : 1885년 4월 5일 함께 내한한 두 선교사는 한국 개척교회의 개척자였으며 절친한 동역자였다

배재학당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교육 기관으로 1885년 8월에 설립되었다. 1887년에 건축된 교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서양식 벽돌 건물이기도 했다

이화학당

1886년 스크랜톤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화학당은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서울에 1886년 설립된 구세학당 학생들로 1893년 경의 교사와 학생들이다

새문안교회

1887년 조직교회로서는 최초로 한국에 세워진 교회로 정동에서 시작되었다

정동제일교회

한국최초의 감리교회로 1887년 창립되었다.

보구여관

한국 최초의 부인병원으로 미감리회에 의해 1887년 정동에 개설되었다

1890년 한국선교를 시작한 영국 성공회는 서울 정동에 대성당을 설립(1891)하고 로마네스크식 건물을 마련(1926)하여 성공회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1890년대 개화전 제물포항

1891년경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서북지방 순회전도광경이다. 마펫, 게일, 베어드 등의 모습이 보인다

장대현교회

1893년 평양에 살립된 장로교회로 사진의 ㄱ 자 예배당은 1900년 건립된 것이다

1893년부터 시작된 성공회의 강화 선교 결과로 1900년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채용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1893년 대구에서 시작된 동산병원은 1931년 현대식 건물을 마련하여 의료선교에 큰 공을 남겼다

1898년 러시아 공사관 안에서 암브로시 신부에 의해 교회가 시작되었으나 노일전쟁(1904-5)이후 교세가 악해졌다. 사진은 1896년경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 경내를 주고 있다.

1905 평북 의주군 영평교회

사진은 1938년 12월 25일 유년부 졸업생(앞줄)과 함께한 제직들이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고봉상 시무전도사이며 여기에 함께 있던 조만용, 조의룡, 박국준이 순교

개척 선교사 호가드(중앙의 말탄 이)의 전도 광경(1912년)이다

1915년 선천에 설립된 고아원으로 주현축,장규명,장인환,김석창 등 교인들이 운영하였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래방자리에 188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공사끝에 완성되었다. 사진은 1920년대의 모습이다.

해주결핵요양원

2세 선교사 홀(S.Hall) 에 의해 설립된 결핵전문 요양원으로 1928년 설립되었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교회(특히 조합교회)는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병합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해방전까지 일본인교회로 사용되다가 해방후 덕수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서울 정동에 소재.

1930년대 기독교 학교는 농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숭실전문학교에서는 루츠 같은 농업전문가를 초빙하여 농촌개량을 서둘기도 했다.

1931년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연합연회에서 14명의 여자목사가 배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선교사들이었

한국 최초의 오순절교회의 서빙고교회가 1932년에 창립되었다

한석진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설립(1930년) 된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으로 초교파적 수양관이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당하였는데 사진은 1936년 개최된 제1회 장로교목사 수양회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선교사들이 강제로 본국에 송환

일본에 가선 신사참배를 한 조선교회 교역자 대표들(1943년)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한 옥중 성도들이 평양의 주기철 목사 사택에 모인다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의 옛모습  (0) 2007.01.11
1890년  (0) 2007.01.10
단원의 풍속도  (0) 2007.01.10
독립문  (0) 2007.01.09
진찬진연도(進饌·進宴圖)  (1) 2007.01.09
Posted by qlstnfp
2007. 1. 10. 00:24



-= IMAGE 1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2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3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4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5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6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7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8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9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0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1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2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3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4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5 =-



-= IMAGE 16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7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8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19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20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IMAGE 21 =-<br>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단원풍속도첩 21폭

자료출처: 국립중앙박물관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90년  (0) 2007.01.10
기독교의 전래  (0) 2007.01.10
독립문  (0) 2007.01.09
진찬진연도(進饌·進宴圖)  (1) 2007.01.09
우리 사진의 역사  (0) 2007.01.09
Posted by qlstnfp
2007. 1. 9. 21:09













독립문(1897)
(한길사,한국사-11, 1994, 11)
독립협회가 주관하여 1896년 11월 21일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기공하여 1897년 11월 20일 준공하였다. 1904년 당시의 모습이다.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의 전래  (0) 2007.01.10
단원의 풍속도  (0) 2007.01.10
진찬진연도(進饌·進宴圖)  (1) 2007.01.09
우리 사진의 역사  (0) 2007.01.09
아관파천  (0) 2007.01.09
Posted by qlstnfp
2007. 1. 9. 04:03

조선시대 대표적인 궁중 예연(禮宴)인 진찬(進饌)과 진연(進宴)을 그린 궁중연향도(宮中宴享圖)이자 넓은 개념으로는 궁중기록화(宮中記錄畵).


궁중연향에는 법전(法典)이나 예전(禮典)에 명시된 공식적인 예연과 곡연(曲宴)이나 사연(賜宴)같은 비공식적인 연향이 있다. 조선시대 궁중예연은 채붕(綵棚), 진풍정(進豊呈), 진연, 진찬, 진작(進爵), 회작(會酌), 회례연(會禮宴) 등의 이름으로 설행되었는데 그 개념과 설행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채붕이나 진풍정에 대해서 법전에 명시된 내용은 없으나 조선 초기에 잦은 설행이 있었다.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궁중연향으로 진연이 규정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고려시대 유습으로 채붕과 진풍정이 더 성행하였으며 진연과는 개념의 구분 없이 설행되었다. 진풍정은 점차 시행되는 예가 줄어들었으며 중종 무렵부터 진연은 외연(外宴), 진풍정은 왕대비·대왕대비 등 내전에 올리는 내연(內宴)의 의미로 구분되었다. 진연이 진풍정보다 물자와 참여 인원을 줄여 간략하게 치르는 작은 규모의 연향이라는 개념은 1657년(효종 8) 왕대비에게 올리는 진풍정을 진연으로 축소시키는 과정에서 확립되었다. 숙종대까지 풍정과 진연을 놓고 연향의 규모와 명칭을 논의하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1706년(숙종 32) 숙종의 즉위 30년을 축하하는 진연을 거행한 뒤로는 영조대까지 줄곧 궁중연향은 진연으로 치러졌다. 사실상 『경국대전』에 규정된 정기적인 진연은 임진왜란 이후 거의 행해지지 않았으며 1754년(영조 30)에는 왕명에 의해 이 유명무실한 진연이 모두 폐지되고 진연은 주로 왕의 등극 주년(週年)과 왕실 어른의 생신을 축하하는 예연으로서 거행되었다. 19세기의 궁중연향은 대부분 진찬이었다.
19세기에는 장수를 누린 왕대비와 대왕대비에 대한 연향이 많았는데 이때마다 1795년(정조 20) 진찬으로 설행되었던 혜경궁의 회갑연에 전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진연은 대한제국기 고종에 대한 연향에서 부활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를 통관할 때 명분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대표적인 궁중연향은 진연과 진찬이라고 할 수 있다.
현전하는 작품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진연도는 1706년(숙종 32) 8월 28일 숙종의 즉위 30년을 기념하여 100여 년만에 부활한 인정전의 진연을 그린 「진연도첩(進宴圖帖)」이다. 18세기의 또 다른 진연도로는 1710년 4월 25일 숙종의 환후가 회복되고 성수(聖壽)가 50세 됨을 기념한 진연을 그린 「숭정전진연도(崇政殿進宴圖)」이다. 이 두 그림은 18세기의 진연 설행 양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후 진연도는 1901년 7월 고종의 오순(五旬)을 경하하기 위해 황태자가 올린 예연을 그린 「고종신축진연도병(高宗辛丑進宴圖屛)」, 1902년 4월 고종이 51세로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고종임인진연도병(高宗壬寅進宴圖屛)」, 같은 해 11월 고종의 어극 40년을 축하하기 위한 진연을 그린 「고종임인진연도병(高宗壬寅進宴圖屛)」이 있다.
18세기의 진찬도로는 1795년(정조 19)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幸行圖八疊屛)」의 한 첩으로서 화성행궁(華城行宮)에서 벌어진 혜경궁의 회갑연을 그린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가 유일하다. 19세기의 진찬도는 순조의 보령 사순(四旬)과 등극30주년을 기념하여 1829년(순조 29) 2월에 치러진 진찬을 그린 「순조기축진찬도병(純祖己丑進饌圖屛)」, 1848년(헌종 14) 대왕대비(순원왕후 김씨)의 육순을 기념한 「헌종무신진찬도병(憲宗戊申進饌圖屛)」, 1868년(고종 5) 신정왕후의 회갑을 기념한 「고종무진진찬도병(高宗戊辰進饌圖屛)」, 1887년(고종 24) 신정왕후의 팔순을 기념한 「정해진찬도병(高宗丁亥進饌圖屛)」, 1901년 5월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71세를 경하하는 진찬을 그린 「고종신축진찬도병(高宗辛丑進饌圖屛)」 등이 있다. 19세기 진찬·진연도는 모두 진찬소나 진연청의 계병(稧屛)으로 그려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1868년 고종 양모(養母) 신정왕후 회갑기념 병풍 '무진진찬도병'

▲ 1868년 음력 12월 경복궁. 고종은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한 신정왕후 조씨의 회갑을 기념하는 진찬을 마련한 뒤 이를 세 장면으로 나누어 8폭 병풍에 담게했다. 사진은 첫번째 장면으로 12월 6일 근정전에서 신하들이 참여해 열린 '진하례' 모습이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라!


▲ 12월 6일 오후 임금 침소인 강녕전에서 신정왕후와 왕실 친척들만 참여한 '내진찬' 모습. 신정왕후가 주인공이므로, 사진 가장 위쪽 붉은 천을 두른 공간은 여성만 출입 가능했다. 고종은 그 아래 푸른 막을 친 곳에 자리했다. 건고와 삭고등 전통 악기도 손에 잡힐 듯 그렸다.

오른쪽은 현재 장서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정해진찬도병 丁亥進饌圖屛》10첩병풍, 꼭 19년 후인 1887년, 양력 1월 27~29일까지 신정왕후의 팔순을 경축하여 베푼 진찬도 중 같은 장면의 그림으로, 사진기가 보급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아마도 팔순 행사를 위하여 20년 전에 그려진 왼쪽 그림을 참고삼아 행사를 준비하였을 것이다.


박지선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소장(용인대)은 이날 “미국 LA카운티박물관에서 ‘무진진찬도병’의 보존처리를 의뢰해 와 최근 처리를 마쳤다”며 그림을 공개했다. 병풍은 모두 여덟 폭(한 폭 가로 46.7㎝, 세로 136.3㎝)으로, 유숙 이한철 등 당대의 쟁쟁한 궁중 화원 10명이 비단에 채색으로 그렸다.

그림은 몇가지 의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세를 과시하는 경복궁 중건을 마친 직후의 화려하고 당당한 왕실 모습을 담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근정전, 근정문 등 건물 이름이 또렷하게 표시돼있고, 22명의 무용수가 등장하는 대형 춤 ‘선유락’(船遊樂), 모란꽃가지를 꺾어들고 춤추는 ‘가인전목단’ 등 화려한 궁중 공연(정재·呈才) 장면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근정전의 기와나 계단, 지붕 장식인 잡상(雜像)까지 정확하게 나타내 마치 사진을 보는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막상 회갑 축하를 받는 신정왕후나 고종, 대원군의 자리는 빈 의자로 등장하는 것이 독특하다. 왕실을 소재로 한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왕권의 존엄함 때문에 임금과 직계친족은 등장하지 않는다.


▲ 병풍 마지막 장면으로 12월 11일. 고종은 왕실 종친과 진찬에 수고한 이들을 경복궁 강녕전에 불러 밤늦도록 잔치를 벌였다. 차일 아래 유리등(네모)과 양각등(월)이 불을 밝히고 있다. 잔치를 기록한 '진찬의궤'는 잔치 준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적었다. 예를 들어 선유락(사진 가운데 큰 원을 그리며 공연하는 모습)에서 노잡이 역을 국희와 옥엽이 했다.


고종을 임금 자리에 오르게 하는데 힘을 보탰던 ‘막후 실력자’ 신정왕후 익종비 조(趙)(1808 ~1890)씨의 회갑 잔치 장면이 13일 처음 확인됐다

대원군이 이끈 경복궁 중건이 끝나고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긴 고종은 1868년(무진년) 12월, 자신의 정치적 대모인 양모(養母) 조 대비의 회갑과 혼인 50주년을 기념해 대대적인 궁중 잔치(진찬·進饌)를 벌였다. 이를 8폭 병풍에 그림으로 담은 것이 ‘무진진찬도병’(戊辰進饌圖屛)이다. 이 잔치 과정을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서울대 규장각 소장)는 당시 잔치 풍경을 병풍 7점으로 제작해 고종과 흥선대원군 등에게 바쳤다고 기록했으나, 정작 병풍의 실물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에 병풍 그림을 조사한 박정혜 한국학중앙연구원교수(미술사)는 “배채법(背彩法·은은한 색조 효과 등을 위해 그림 뒷면에서 칠하는 것) 등을 이용해 그린 조선 말기의 수작”이라며 “경복궁 중건에 맞춰 진찬을 치른 점 등 왕권과 왕실 권위를 높이려는 의지가 엿보인다”고 평했다.

박 교수와 이태진 서울대 교수(근대사) 등은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순조의 며느리로 당시 궁궐의 실력자였던 신정왕후는 고종을 양아들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는데, 흥선대원군과 신정왕후의 밀착된 관계 등이 성대한 진찬의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1900년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원의 풍속도  (0) 2007.01.10
독립문  (0) 2007.01.09
우리 사진의 역사  (0) 2007.01.09
아관파천  (0) 2007.01.09
전봉준  (0) 2007.01.09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