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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1.26 신미양요(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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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 26.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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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26. 00:25

A Korean fishing junk with sails, May 1871.

This photograph was taken before the Americans reached, and anchored at, the mouth of the Han river. As such, it is probably the first time that Koreans, albeit from a distance, were captured on came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1871년 5-6월. 미국 함선에 승선한 한 한국인. 빈 맥주병과 미국 신문인 [Every saturday] 한 부를 들고 있다. 사진 설명으로 보아 신미양요 당시 포로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사진은 강화도를 침공했던 군함 중 한척인 콜도라도호의 해군 제독과 수행원들. 제복으로 미루어 중앙에 앉은 사람이 로저스 제독으로 추측되며,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종이는 지도이고, 장소는 선상이다.

로저스 미 해군 제독과 수행원들

로저스의 작전회의. 1871년 5월. 두 명의 중국인이 보이는데 이들은 아마 안내자나 통역관일 것이다.

초지진에 상륙한 미 해병대. 뒤에 이들은 광성진에서 조선군과 백병전을 벌인다.



초지진 포대를 점령한 미 해병. 초지진을 점령한 부대는 킴벌레이 중령 이하 장병들이며 그 수는 약 450명이었다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들. 1871년 6월 2일

1871년 6월 2일.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을 하다 전사한 조선군.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 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앨버트 가스텔)

"남북전쟁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블레이크 중령)

"이 전투는 동양에서 미국 해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외교의 실책을 폭로한 최고의 사건이다" (미 국무장관 포스터)

"서울에 있는 미국인 학교에서는 반드시 이 전적지에 수학여행 오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 사는 미국인이나 여행자는 반드시 이곳을 찾아보고 그들 조상을 추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규태의 [역사산책] 중)






Korean villager on board one of the American ships, holding empty beer bottles and a copy of the American periodical Every Saturday, May-June 1871.


Korean prisoners on board an American ship, June 1871.



Marine and naval officers outside a Korean temple,
May-June 1871.



Interior of the main Fort du Coude, showing some of the 350 Korean dead after the decisive battle, 11 June 1871.




Secretary Drew, Minister Low and Chinese interpreters on board the flagshipUSS Colorado, May 1871



In the summer of 1866 an American merchantman, the General Sherman, sailed into the waters of the present-day North Korean capital P’yongyang. Requests for trade were denied, violence flared, and all the Americans were killed and their ship burned. Five years passed before the Americans were ready to mount a ‘diplomatic’ mission to enquire after their citizens and open up Korea to Western trade. The five American ships were commanded by the Civil War veteran Admiral Rodgers, who had previous Far Eastern experience. The US Minister to China, Frederick Low, was on board with a crew totalling some 1,000 sailors and marines, many of whom were Civil War veterans like Rodgers, and were quite ready to take non-diplomatic measures, should the need arise.

1866년 9월에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商船)제너럴 셔먼호(Gereral Sherman號)가 평양 군민들과 충돌하여 격침된 사건으 한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그해 9월 말과 10월 초에 걸쳐 프랑스 극동 함대가 조선에 대한 제1차 침공을 단행하였을 때 이들과 동행한 리델 신부는 조선인 천주교 신자 송운오(宋雲五)로부터 '지난 8월에 서양 선박 1척이 대동강에서 평양 군민들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다'는 말을 전해듣게 되었다.

리델 신부는 즉각 이 사실을 미국 영사 샌포드(E.C.Sanford)에게 통보하였다. 그러자, 샌포드는 10월 중순경에 다시 이 사실을 청국 주재 미국 공사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서양 선박 1척이 평양에서 난파된 사실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서양 선박의 선원들과 조선인들의 충돌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결국에는 ,선원들이 조선인들에 의하여 대동강 연안으로 끌려나와 포승에 묶이어 무릎을 끓인 채 참수당하였다고 한다.'

이때 마침 청국 주재 미국 공사 버링게임(A.Burlingame)이 휴가 중이었으므로 공사의 임무를 대리하고 있던 윌리엄즈(S.W.Willams)는 10월 23일, 청국의 총리아문(總理衙門)에 서한을 보내어 대동강상에서 격침된 서양 선박의 선원이 조선에 억류되어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확인한 다음, 생존자가 있을 경우에 이들이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본국에서 휴가를 보내던 공사 버링게임은 샌포드 영사로부터 사태의 전말을 보고받고 서둘러 귀임하였다. 임지로 복귀한 버링게임은 11월 하순에 제2차 조선침공에 실패하고 돌아온 프랑스 함대의 로즈 제독으로부터 사건의 전모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소식을 전해듣고, 그해 12월 15일부로 곤국 정부에 정식으로 그 시말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아울러, 버링게임은 이 보고서에서 청국에 주재하고 있는 열강의 외교관들 사이에 '대규모의 연합함대를 조선으로 출동시켜 조선을 개국시키자'는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버링게임은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청국의 총리아문에 조선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조치를 강구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청국이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자,프랑스와 영국에 조선에의 공동출병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의 공동출병 제의에 대하여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버링게임 공사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미국이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버링게임은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벨 제독에게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에 대한 조사를 요청하고 그 조사 결과에 따라 강력한 대응 조치를 취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 제독은 버링게임 공사의 요청에 따라 와츄세트호(Wachusett號)를 즈푸항에서 조선해역으로 급파하여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벨 제독은 해군 장군에게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 실패 사실을 보고하고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유사한 불상사의 재발 가능성을 역설한 다음,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대한 재차의 군사적 행동을 실행하기 전에 작전을 전개할 수 있도록 2,000명의 증원병력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와츄세트호는 함장 슈펠트(R.W. Shufeldt)대령의 지휘 아래 앞서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구에 진입할 당시에 항로를 안내한 바 있는 청국 상인 우문태(于文泰) 일행을 대동하고 1867년 1월 21일에 즈푸항을 떠나 이틀 후인 23일에 황해도 장연의 오차포(吾叉浦) 앞 바다의 월내도(月乃島) 근해에 이르러 닻을 내렸다.

슈펠트 함장은 39명의 승무원을 이끌고 장연의 목동(牧洞) 포구에 상륙, 이곳에서 주민인 김대청(金大淸)에게 조선 조정에 보내는 서신을 전달하고 회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안내역을 맡은 청국 상인 우문태는 별도로 조선 상인 김자평(金子平)을 만나 수소문한 결과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상에서 평양 군민들과 충돌하여 화공(火功)을 받고 불에 타서 침몰하였으며,지금 평양에서는 서양인 선원 2명과 청국인 2명만이 구금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엇다.

그로부터 수일 후,장연 현감 한치용(韓致容)이 와츄세트호를 방문하여 앞서 슈펠트 제독이 보낸 서신에 대한 하달을 보내겠다는 약속과 함께 조선측에서는 제너럴 셔먼호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와츄세트호의 즉각적인 회선을 요구하였다. 그러나,슈펠트 함장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침몰한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또 선원의 일부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진 채 일단 즈푸항으로 귀향하였다.

와츄세트호가 즈푸로 돌아온 후,베이징의 미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 측에서는 조선에 억류되어 있는 생존자 가운데에 자국인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청국의 총리아문에 조선이 그들을 조속히 송환하도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청국의 총리아문은'조선이 청국의 영향력하에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명목에 불과할 뿐이다. 조선은 일체의 법령(法令)을 자주적으로 접행하는 독립국가이므로 청국이 그 내정에 간섭할 수는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영.미 양국의 요구를 완곡히 거절하였다.

한편, 미국 국무성의 시워드 장관은 1867년 2월 중순에 청국 주재 미국 공사관으로부터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한 보고를 받고 그 진상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정부도 제너럴 셔먼호의 실종사실을 전해듣자 1867년 5월에 일본 주재 미국 공사에게 거증조정(居中調停)에 나설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일본측의 중재 제의가 미국 국무성에 보고되자 미국 정부에서는 한때 여기에 큰 기대를 걸었으나, 결국 일본 외무성이 조선에 중재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음으로써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1월에 이르러 일본 주재 미국 공사 발켄버그(R.B.V.Valkenburgh)가 시워드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제너럴 셔먼호가 입은 피해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받고, 미국의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는 그에 적절한 조치와 대응수단을 강구하여야 한다.'

그러자, 시워드 장관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납득할 만한 해명이나 사과가 없을 경우에는 우리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미국 정부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한편, 청국 주재 미국 공사관측은 청국 총리아문의 협조를 통하여 사태의 수습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동안의 교섭경위를 국무성에 보고함과 동시에 더욱 상세한 현지 조사 활동을 벌이기로 하고 아시아 함대에 협조를 요청하엿다. 이에, 부사령관 골즈보로(J.R.Goldsborough)제독은 페비거(J.C.Febiger)대령이 지휘하는 셰난도어호(Shenandoah號)를 조선 해역으로 파견하였다.

1868년 4월 7일에 즈푸항을 떠난 셰난도어호는 그로부터 3일 후인 4월 10일에 황해도 풍천(豊川) 북쪽 대동강 어귀의 허사동(許沙洞)에 이르러 현지 주민들에게 조선 조정에 보내는 펴닞르 전달하였다. 페비거 함장은 이 서신에서 지난해(1867) 1월에 조선을 방문한 바 있는 와츄세트호가 조선 조정에 보낸 서신에 대한 조선측의 공식적인 답신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억류되어 있는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들은 조속히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함과 아울러 조선측이 이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 고위관리를 파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이에 앞서 조선측은 이미 청국 예부를 통하여 주재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에게 와츄세트호의 슈펠트 함장이 조선에 보낸 서신에 대한 답서를 전달한 바 있엇다.

그러한 가운데 셰난도어호의 페비거 함장이 또다시 답서를 요구하자 조선측에서는 청국 예부에 발송한 서신의 사본을 이들에게 전달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조선측은 황해 감사 박승휘(朴承輝)의 명의로 된 이 서신에서 표류하는 외국 선박 및 외국인에 대한 인도주의적 처리 원칙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어서.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어디까지나 선원들의 난폭한 행동이 평양 군민들을 자극한 결과, 그것이 마침내는 무력충돌로까지 확대된 것으로서,이미 선박은 불타서 침몰하였고 현재는 단 한 사람의 생존자도 억류되어 있지 않다고 밝혔다.

또한,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의 선박이라는 사실도 슈펠트 함장의 서신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점을 부언하였다. 그러나 셰난도어호는 이 서신이 미처 전달되기 이전인 4월 15일에 이미 장연 해역에서 삼화(三和)역으로 이동해 버림에 따라 서신전달에 관한 임무는 삼화부사에게 이관되었다.

삼화부사 이기조(李基祖)는 셰난도어호가 대동강 어귀 북안의 삼화해역으로 이동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평안 감사 박규수에게 보고하고 포수와 무기 및 군량의 지원을 요청하였다.그리고 휘하 관계관들에게는 셰난도어호가 접근해 오더라도 절대로 조선군측에서 먼저 사격을 가하지 말도록 엄명하였다. 이는 셰난도어호의 요구조전이 앞서 와츄세트호의 슈펠트 함장이 전달한 서신에 대한 회답이라는 점과 그들의 태도가 비교적 온건한 것을 고려한 결과에서 취하여진 조치였다.

4월 15일,셰난도어호가 은貫이기조늠贄병옘寗湛통역걷ジ溶洪勉嘲대솔군관(帶率軍官:수행군관) 벅형초(朴亨初)를 문정관(問情官)으로 파견하여 셰난도어호가 조선에 내도한 까닭을 조사하도록 하게 하였다. 조선측의 문정관이 서신을 막대기에 매달아 해안에 꽂아 두면 셰난도어호에서 소형 선박이 와서 이를 가져가고 대신에 자신들의 서신을 매달아 놓고 돌아가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은 필담을 나누었다.


조선 문정관: 귀선(貴船)의 본래 선적은 어느 나라이며,항해목적은 무엇인가?

페비거 함장:우리는 평양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모든 것은 평양에 가서 이야기하겠다.

조선 문정관:이곳은 삼화도 평양 땅이다. 평양에 가서 문의할 일이라면 어찌 삼화에서 묻지 않는가. 그대들이 궁금
해는 내용은 무엇인가?

페비거 함장: 우리는 아메리카인으로 광동.상하이를 경유하여 4월 7일에 즈푸항을 떠나 이곳에 도착하였다. 우리의
항해 목적은 통상이 아니다. 2년전에 우리 상선이 대동강 하구에서 격침된 사건의 진사을 조사하기 위
해서 왔다. 또한 우리의 서신을 귀국 국왕에게 전달하여 상호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희망한다.

조선 문정관: 우리에게 서신을 주면 그것을 조정에 전달하겠다.우리는 청국 예부의 서한을 보고 그대들의 방문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나,그대들이 우리의 접근을 거부하면서 북상을 계속하므로 일단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그대들의 서한을 보고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해안 일대에 경비가 삼엄하여 귀선과
무력충돌이 야기될까 우려되는 바이다.

페비거 함장:귀국 국왕에게 전달하고자 한 서신은 이미 장연에서 전달하였다. 조속한 시일내에 귀국의 답신이 도착
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우리는 회신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강을 거슬러올라갈 계획이다.

조선 문정관:이곳에 정박한 채 답신을 기다리기 바란다. 만약 위협을 무릅쓰고 강을 거슬러올라가 민심을 자극하게
되면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조선 문정관과의 필담을 통하여 셰난도어호의 항해목적와 요구사항을 조선측에 전달한 폐비거 함장은 4월 24일까지 수일 동안이나 조선측의 답신을 기다리다가 선수를 돌려 용강현 경계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도중에 남포에서 지방관원들로부터 돼지. 닭. 계란 등의 식료품을 지원받고 그에 대한 답례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던 중 5월 2일에 이르러서야 조선측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 요지의 회신이 도착하였다.

1.폐비거 함장의 서신은 국서(國書)가 아니므로 국왕에게 올릴 수 없었다.

2.제너럴 셔먼호 선원 4명에 대한 생존설은 김자평을 심문한 결과 날조된 거짓말이었음이 밝혀졌다.

3.셰난도어호가 직접 조사하기를 희망한다면 김자평의 신병을 인도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페비거 함장은 조선측으로부터 김자평의 신병을 인도받아 우문태와의 대질을 통하여 제너럴 셔먼호 선원 생존설의 진위여부를 확인하였다. 그 결과, 제너럴 셔먼호 선원 생존설은 우문태가 일방적으로 조작한 거짓말이엇음이 판명되었다. 그후 셰난도어호는 대동강 어귀를 항해하면서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탐색 활동을 계속하던 중 가도(가島)근해에서 조선 문정관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문정관의 대화를 통하여 사건 당시에 순영 중군 이현익이 제너럴 셔먼호에 피랍되고 양민 2명이 피살된 것이 사건 발발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것을 확인하게 되자 더 이상 사건의 책임을 추궁할 명분을 잃고 5월 16일 자진해서 조선 해역을 떠났다.그런데, 그와 거의 때를 같이한 5월 10일 경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의 남연군 묘소 도굴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인들에게 서양인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감을 크게 고조시켰다. 따라서 이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그 동안 조.미 양국이 기울여 왔던 관계개선 노력의 성과를 무산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2) 미국 함대의 침입 경위
1868년 5월 하순,청국 주재 미국 영사 시워드는 즈푸항으로 돌아온 셰난도어호의 함장으로부터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 받았다. 시워든 이에 따라 5월 25일부로 본국의 국무장관에게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 억류설을 비롯한 소문이 모두 낭설이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어서 시워드 영사는 국무성에 보내는 9월 28일자의 보고서에서 조선을 개항시키고 사절단을 파견하는 문제는 거론하였다. 이때 시워드 영사가 본국 정부에 건의한바 조선개국에 대한 복안을 다음과 같았다.

1.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오페르트 사건에 대한 미국측의 확고한 견해와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2.조선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을 개국시킨다.
3.차후로 미국인이 조선에 조난되거나 표류할 경우, 그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조약을 체결한다.
4.위와 같은 가운데 조선과의 담판을 진행한다.

조선을 개국시키기 위한 이와 같은 방안을 본국 정부에 건의한 시워드 영사는 그의 숙부인 시워드 국무장관에게 자신을 조선에 파견될 미국 사절단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여 아시아 함대의 지원하에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국무장관은 시워드 영사의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여 그를 조선 파견 특사로 임며앟는 동시에 그로 하여금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조선으로 가서 교섭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시아 함대의 파견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해군 장관은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였다. 해군 장군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해군의 함대를 파견해야 할 성격의 사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서방세계에 대한 조선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는 현시점에서는 조약의 체결도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미국의 대조선 사절단 및 함대 파견 계획은 실행 직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1869년에 그란트(U.Grant)행정부가 출범하자 시워드의 후임으로 피시(H.Fish)국무장관이 취임하여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피시 장관은 전임 시워드 장관의 외교노선을 계승하여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제국주의노선을 강화하고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노선으로 미국은 앞서, 시워드가 건의한바 있는 대조선 외교 사절단 및 함대 파견 계획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게 되었으며 조선을 개국시켜 외교 관계를 개설하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피시 장관은 이때 이미 상하이 주재 총영사로 전임한 시워들 국무성으로 소환하여 데이비스(J.C.B Davis)국무성 차관보와 로저스(J.Rodgers)신임 아시아 함대 사령관을 참석시킨 가운데 대조선 외교사절단 및 함대 파견 계획의 타당성 검토에 들어갔다.

시워드는 이 회의석상에서 피시 장관에게 '청국의 중재하에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체결하되,그에 따르는 제반의 권한을 로저스 아시아 함대 사령관에게 위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피시 장관은 최종적으로 청국에 중재를 요청하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다는 원칙에 동의하고, 그에 따른 전권을 청국 주재 로우(F.F.Low)공사에게 위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870년 11월,조선에 파견될 미국 외교 사절단의 전권을 부여받은 로우 공사는 베이징에서 로저스 제독및 시워드 ㅗ총영사를 초청하여 3차 회담을 열고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 결과,로우는 그달 22일에 피시 국무장관에게 자신이 미국 정부를 대리하여 조약을 체결하고 이에 서명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다음과 같은 자신의 복안을 보고하였다.

1. 조선 원정군은 상하이 또는 즈푸에서 발진할 예정이다.
2.출항은 내년(1871) 5월 1일로부터 15일 사이에 할 예정이다.
3.조선에 대한 정보는 청국에 정기적으로 출입하는 조선 사신으로부터 수집할 예정이다.

이어서 로우 공사는 미국 정부의 조선 사절단 및 함대파견 계획을 청국의 총리아문에 통보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였다. 로우는 1871년 2월 11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서 총리아문의 공친왕을 방문하여 사절단 및 파견에 대한 청국의 중재를 요청하였으나,공친왕은 이러한 미국측의 요구를 모거절하눼

그러 3월 7일에 로우 공사가 조선에 보내는 서한을 청국의 종리아문에 보내고 이를 조선에 전달해 줄 것을 요구하자,공친왕은 하는 수 없이 이 서한을 당사국인 조선에 전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청국 총리아문에 접수된 로우 공사의 서한은 그해(1871) 4월 10일부로 조선 조정에 접수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조선과 미국 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미국측의 회답을 전하지 않고 그달 14일부로 청국 예부에 조선의 입장을 밝히는 형식의 서한을 전달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그들의 도발로 말미암아 파멸을 자초한 결과이다.

2. 조난선의 구제는 조선의 전통적인 관례이므로 그를 위한 별도의 조약은 필요없다.

3.조선은 생산이 풍부하지 않으므로 외국과 통상을 할 수 없다.

그 무렵,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은 조선 해역으로 출항할 군함에 대하여 5월 초순까지 일본의 나가사키항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나가사키항에 집결을 완료한 아시아 함대는 군함 5척,대포 85문과 해군 및 해병 1,230명으로 원정부대를 편성하였다. 이 원정 함대의 함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기 함:콜로라도호(Colorado號)
순 양 함:알래스카호(Alaska 號)
:베니시아호(Benicia號)
포 함:모노카시호(Monocacy號)
:팔로스호(Palos號)

한편,로우 공사는 청국인 통역관 2명과 공사관의 드루(E.R.Drew) 서기관,카울로스(J.P.Cowlos)서기관을 대동하고 5월 8일에 상해를 떠나 12일에 나가사키항에서 아시아 함대와 합류하였다. 나가사키항에 집결한 아시아 함대는 로저스 사령관의 지휘하에 조선 해역응로 출항하기 직전까지 약 보름간에 걸친 해상 기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함대에 승선한 장병들은 그들의 출항 목적이 시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는 하나, 미지의 나라 조선에 대하여 여러가지 소문을 들은 바 있었으므로 기대감과 함께 막연하게나마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5월 15일까지 출항준비를 완료한 아시아 함대의 군함 5척은 16일에 일본의 나가사키항을 떠나 조선 해역을 향해 서북으로 항진하였다.

기함 콜로라도호를 선두로 하여 좌측에는 포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가 차례로 뒤따르고 우측에는 순양함 알래스카호와 베니시아호가 항진하면서 대형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1871년 5월 16일에 나가사키항을 떠난 미국 아시아 함대는 3일 후인 19일에 조선 해역으로 진입하여 총청도 해미현 앞바다에 이르자 탐측활동을 벌이며 북상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21일에는 남양만의 풍도(楓島) 근해에 이르러 닻을 내리고 조선 해역에의 진입을 자축하는 대포 1발을 발사하여 아시아 함대의 위용을 과시하였다. 23일에는 아산만의 입파도 근해로 이동하면서 작전 대상 해역이 될 강화해협에 이르기까지의 해로를 탐사하기 위하여 블레이크(H.Blake)중령의 지휘하에 팔로스호와 4척의 단정(短艇)으로 구성된 탐사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 탐사대가 탐측활동을 벌이는 도중에 조선측 관리와 접촉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카울로스 서기관보가 통역관으로 탐사대와 동행하게 되었다. 24일에 아침,탐사대는 본대가 정박하고 있는 입파도 앞바다를 떠나 탐측활동을 벌이면서 북쪽으로 항진하여 26일 정오경에는 인천 앞 바다의 월미도와 영종도 사이에 있는 작약도 부근에 이르렀다.

이튿날인 27일,탐사대는 또다시 북상을 거듭하여 강화해협(염하강,강화수로) 어귀에 이르기까지 탐측활동을 실시한 후 28일에 기함의 정박지로 복귀하였다. 탐사대의 탐측 결과보고에 따라 본대는 작약도를 함대의 정박지로 결정한 다음에 이동을 개시하여 29일 오후 6시경에는 작약도 근해에 투묘하였다.

이어서 그 이튿날(30)아침에는 작약도 동북쪽 율도와의 중간해역으로 함대의 정박지를 옮겼다. 이에 앞서 26일에 아시아 함대와 조선측 사이에 필담에 의한 한 차례의 접촉이 있었으나 언어불통으로 말미암아 교섭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튿날(27일), 아시아 함대의 소형 선박 3척이 율도 해안에 상륙하여 전날의 필담에 대한 답변을 내용으로 한 서신을 조선측에 전달하였다.

그들은 이 서신을 통하여 자신들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함대이며,조선측의 고위관리와 통상교역에 관하여 논의할 일이 있어서 왔으므로 용무가 끝나면 곧 돌아가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이어서 5월 30일에 인천부의 관원 김진성(金振聲) 의주에서 온 통역관 3명을 대동하고 미국 함대의 기함 콜로라도호를 방문함으로써 조.미 양측 사이에 비로소 공식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이때 조선측은 아시아 함대의 항해 목적에 대하여 질문을 한 다음,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문정관들이 인천부에 머물면서 미국측과의 교섭을 위하여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미국측의 드루 서기관은 자신들고 조선 조정과 중대 사안을 협의하기 위하여 왔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은 문정관을 만나서 직접 이야기하겠다고 하였다.

이튿날인 31일에는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3명의 대표가 콜로라도호를 방문하여 로우 공사와의 회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로우 공사는 그들이 품계(品階)가 낮은 하급관원들일 뿐만 아니라,이들이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신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회담을 기피하였다. 따라서 교섭이 성사되지 않았으며,조선측 대표는 드루 서기관을 통하여 로우 공사가 조선 조정에 보내는 서신만을 수교하였다.

이때 드루 서기관은 미국 함대의 대형 군함이 수도 부근으로 이동해야 할 경우에 대비하여 탐사작업을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조선측이 이를 방해하지 않는 한 양국간에 무력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2) 조선 조정의 대책
조선 조정은 외국 선박의 빈번한 출몰에 효적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해안지역의 방어력 증강에 필요한 여러 가지 대응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869년 6월에 전라 감사 서상정(徐相鼎),충청 감사 민치상(閔致庠) 황해 감사 조석려(曺錫與) 등의 주도하에 포수를 양성하여 해안 요지에 배치함으로써 서해안의 방위력을 증강시킨 것을 시발로 하여, 11월에는 1,000여 명의 포수를 선발하여 이양선의 출몰이 가장 빈번한 충청도 해안 20개 읍진(邑鎭)의 요지에 배치하였다.

이후 1871년 4월에 이르기까지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안 방위를 위하여 중요지역에 총포수 3,000여 명을 배치함으로써 기존의 방위력을 크게 증강하였다. 그러던 중, 조선 조정은 4월 10일에 청국의 예부를 통하여 미국 공사 로우가 보낸 친서를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조선 조정은 조선측의 입장을 해명하는 장문의 서신을 작성하여 4월 14일에 청국의 예부로 발송하였다.

그 후 5월 하순에 아시아 함대가 부평 앞 바다에 이르자 남양 부사 신철구(申轍求)등 관계관들이 이끌고 아시아 함대를 방문하여 그들의 내항 목적을 추궁하려 하였다.그러나, 때마침 밀어 닥친 거센 풍랑과 파도로 말미암아 접근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이 접촉 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조선 조정은 조선측 대표 3명과 의주부 소속 통역 3명을 현장으로 급파하여 미국 함대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였으므로 5월 31일부터 시작된 조선측 대표의 활동과 그 결과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있는 것과 때를 맞추어 조정에서는 그와 별도로 강화도의 방위력을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강화도에 군사와 장비를 증파하여 방위력을 증강시키기로 방침을 세웠다.

* 훈련도감 보군 2초,화약 1,000근,수노궁(手弩弓) 10장(張),구전(具箭) 300지(枝),별파진(別破陳) 300명.
* 금위영 보군 1초,화약 1,000근,수노궁 10장,구전 300지, 별파진 10명
* 어영청 보군 1초, 화약 1,000근,수노궁 10장, 구전 300지,별파진 10명.
* 총융청 아병(牙兵) 1초, 불랑기(佛郞機)30문, 구환(具丸) 2,000개,대포 3좌(坐),화약 1,000근

조선 조정은 이와 함께 행호군(行護軍)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영(鎭撫營) 중군(中軍)에 임명하여 강화도에 증파할 4개 병력 각 1초씩을 지휘하게 하고, 훈련도감의 나머지 1초는 강화유수부 판관에 임명된 삼군부 종사관 이창회(李昌會)가 지휘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호조(戶曹)의 군량미 1,000석을 수송하여 보급에 만전을 기하였다.

뒤이어 6월 20일에는 아시아 함대의 인천부 상륙에 대비하여 인천 부근의 방위력을 증강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훈련도감 보군 1초와 수어청 별파진 50명을 인천부에 급파하여 인천 도호부사 구완식(具完植)이 지휘를 받도록 하는 한편, 화약 1,000근과 납탄환 15,000개를 각영의 파견부대에 분배하고 호조의 군량 300석도 추가로 지원하였던 것이다.

(3)조.미 양국군의 무력충돌

*미국 함대의 손돌목 포격
5월 30일에 강화 해역으로 진출한 아시아 함대는 인근 해역을 탐사하기 위한 제 1단계 조치로서 블레이크(H.C.BLAKE)중령을 지휘관으로 한 포함 팔로스호와 소형 단정 4척으로 탐사대를 구성하였다. 이들 탐사대는 5월 24일에 입파도(立波島) 근해의 함대 정박지를 떠나 27일까지 4일간에 걸쳐 강화 해협의 입구에 이르는 해로를 집중적으로 탐사하였다.

이와 같이 臼제1단계탐사활오성공岵막완료된 데 이어서 30,31일 양일간에 걸쳐 조선 관원들과의 회담을 마치게 된 아시아 함대는,제 2단계의 탐사 활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또다시 탐사대를 편성하였다. 이 탐사대는 이번에도 역시 블레이크 중령의 지휘하에 강력한 화력을 갖춘 포함 모노카시호와 합류하여 전력을 대폭 증강한 다음, 6월 1일부터 강화해협에서 한강 수로에 이르는 해역을 탐사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는 아시아 함대가 5월 31일에 이루어진 조선측 대표와의 접촉에서 강화해협 및 한강 수로에 대한 탐사계획을 통보한 바 있었으므로 조선측이 탐사활동을 묵인할 것이라는 자의적인 해석을 내린 결과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포함 2척과 소형 함정 4척으로 편성된 블레이크 중령의 제2단계탐사대는 6월 1일에 정박지를 떠나 그날 정오경에 강화해협 입구에 이르렀다.

이때 강화해협의 조선군은 초지진(草芝鎭)으로부터 갑곶(甲串)나루에 이르기까지 50여 리에 걸친 해안선에 포대를 설치하여 총 70여 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요새화된 강화해협의 증간지점이며 물살이 빠르고 굴곡이 심하여 선박의 항해가 곤란한 손돌목(孫乭項)어귀에 위치한 광성보(廣城堡)에 조선군은 지휘소를 설치하고 아시아 함대의 탐사대가 북상하면서 활동하는 모습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블레이크 중령의 탐사대는 강화도 해안에 배치된 조선군이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채로 탐사활동을 계속하면서 거리낌 없이 강화해협으로 진입하였다. 오후 2시경에 손돌목 어귀에 이르러 탐사대는 그제서야 강화해협의 좌우 해안에 조선군이 배치되어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전투준비를 갖추었다.

이때,조선군은 이미 아시아 함대의 탐사대가 이동하고 있는 것을 주시하면서 대기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탐사대의 선두가 손돌목에 접어들자 광성보 지휘소에서 울리는 포성을 신호로 하여 탐사대에 포사격을 집중하였다. 조선군의 포진에서 발사된 포탄이 탐사대의 전방과 측방에 떨어져 물보라를 일으키자,탐사대도 즉각 이에 응사 함으로써 쌍방간에는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아시아 함대의 포함 모노카시호에 장착된 8인치 대포가 광성보를 지향하고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다. 모노카시호의 대포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폭발탄을 연속적으로 발사하여 조선군의 포진지를 삽시간에 파괴하여 무력화시켜 버렸다. 이에 비하면 조선군의 대포는 소구경에 사거리가 짧은 재래식으로서 성능이 훨씬 뒤떨어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 재래식 대포는 위치마저 한 자리에 고정되다시피 하여 적의 이동방향에 따라 사격방향을 신속하게 조정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포탄도 단순한 쇠뭉치로 된 포환(砲丸)으로 되어 있어 미군의 폭발탄에 비하면 그 살상력과 파괴력이 매우 낮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시아 함대가 보유하고 있는 각종 대포는 남북전쟁을 통하여 개발된 병기들로서 당시에는 최고의 성능을 자랑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대포들은 남북전쟁이라는 실전을 경험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제반 성능면에 있어서 조선군이 재래식 대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개인화기에 있어서도 미군의 레밍턴(Remington)소총은 조선군의 화승총보다 사거리와 발사속도에서 훨씬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엇다. 이밖에도 ,조선군의 대포는 포대 주변에 축조된 좁은 포안(砲眼)에 포구를 일치시켜야만 사격이 가능하였으므로 사계가 극히 제한되어 포좌가 고정된 것과 다름이 없는 결함을 안고 있었다.

따라서, 해상에서 비교적 자유로이 활동하는 이동 표적이 군함에 대하여 효과적으로 공격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시아 함대의 경우, 비록 함정이 해상에 노촐되어 있다고는 하나, 사계의 제한을 받지 않고 대포의 포격방향을 신속히 조정할 수 있었으므로 명중률과 발사속도에 있어서 조선군을 능가할 수 있었다. 조선군은 이와 같은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약 15분간에 걸쳐 미군측 탐사대에 200여 발의 포탄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아시아 함대측의 탐사대는 이에 대하여 10여 분 간에 걸쳐 맹렬한 반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미군측 탐사대의 월등히 우세한 화력으로 말미암아 조선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진지에서 철수함으로써 조.미 양군의 교전상황은 일단 종식되었다.조선군 수비대의 자위적인 선제공격으로부터 시작된 10여 분 간의 교전을 통하여 조선군은 광성보의 진지와 시설물들을 파괴당하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군 탐사대의 피해는 부상자 2명이라는 경미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군 탐사대는 계속적으로 강화해협을 거슬러올라가 한강으로 북상한다는 당초의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탐사대의 주력 전함인 포함 모노카시호가 손돌목에서 좌초를 당하자 미군측은 최초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노카시호의 파괴된 부분을 응급수리하여 누수를 차단한 다음 서둘러 모선이 정박하고 있는 작약도 근해로 귀환하였다.

*포격사건의 여파
강화해협의 손돌목에서 조선군측 수비대와 미군측 탐사대가 포격전을 벌인 이후부터는 쌍방간에 긴장이 크게 고조되었다. 조선측의 경우, 도성으로 가는 통로인 한강 어귀에서 미군 함대와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던 관계로 한강을 통하여 도성에 물자를 수송하던 모든 선박의 통행이 단절되었다. 이에 따라,도성의 곡물과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게 되고, 조야의 혼란과 위기 의식은 더욱 고조되었다.

한편, 아시아 함대의 수뇌부는 손돌목에서 귀환한 탐사대로부터 조선군과의 교전결과를 보고 받고, 이 사건을 조선군 수비대가 미국 함대에 불법적인 선제공격을 가한 것으로 규정하여 이에 대한 조선측의 사과를 받아내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미군측에서는 '10일 이내에 조선측이 정식으로 사과하지 않을 경우에는 적절한 보복조치를 단행하겠다'는 위협적인 언사를 담은 서신을 장대 끝에 매달아 작약도 동북쪽 2키로미터 지점의 율도(栗島)해안에 꽂아 두었다.

그후 6월 10일에 이르기까지 10여일 동안, 이와 같은 방법에 의하여 조.미 양측간에 수차례나 서신이 교환되었다.
이러한 서신의 교환을 통하여 양측은 각각 자국의 행위가 정당함을 주장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기에만 급급하였다. 6월 6일,조선측에 흥선대원군의 친서를 보내어 손돌목 충돌사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고 조선군 수비대의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시아 함대측에서는 조선측에서 적절한 사과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에 앞서 로우 공사는 본국 국무성에 보낸 6월 2일자의 보고서에서 손돌목 포격사건의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들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음을 강조하였다. 이와 아울러 로우는 이 보고서에서,조선이 평화적으로 탐사활동을 하고 있는 미국 군함에게 공격을 가한 데 대하여 적절한 보상이나 사죄를 하지 않는 한 절대로 철수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를 천명하였다.

이때,로우 공사는 아시아 함대가 손돌목 포격사건에 대하여 철저한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고 곧바로 철수해 버린다면 조선이 마치 아시아 함대를 제압하여 물리친 것인양 일방적인 해석을 내리고 쇄국을 한층 강화하는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 영향을 청국까지 파급되어,청국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열강의 세력을 무력으로 추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므로 로우 공사는 '아시아 함대가 손돌목으로부터 강화도 북단의 한강 어귀에 이르는 주요 진지들을 철저히 무력화시키고 강화해협을 봉쇄한다면 조선은 결국 미국과의 협상에 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강화도에 상륙작전을 감행하도록 지시하였다.그리하여 ,로저스 아시아 함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탐사대장 블레이크 중령이 지휘하는 상륙부대가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자,이를 저지하려는 조선군 수비대와의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짐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4)미군의 강화도 상륙 기도

6월 1일에 손돌목에서 조선군 수비대와 아시아 함대가 충돌한 직 후, 로우 공사는 본국의 피시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복안을 피력하였다.

'조선과 청국에서 미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위협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우, 본인은 본국의 추가 훈령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인 대응조치를 취할 예정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로우 공사는 로저스 아시아 함대 사령관과 함께 손돌목 포격사건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였다.
그 결과 조선측이 6월 9일까지 사죄와 보상에 대한 약속을 통보해 오지 않을 경우,10일부로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이러한 결정은 강화도 동쪽 해안 광성보 부근의 요새지를 무력화시켜 이를 점령함으로써 앞서 조선군이 아시아 함대의 탐사대에 선제포격을 가한 데 대한 보복을 단행하고,유리한 조건하에 조선측과 협상을 전개하려는 기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상륙작전으로 말미암아 전투가 광성보 부근 일대의 요새지를 벗어나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대 발전하지 않도록 각벽히 주의한다는 전제하에 다음과 같은 기본방침을 정하였다.

1.무력적인 수단은 사죄 및 보상을 받아 내기 위한 경우에만 행사한다.
2.상륙작전 실시 대상지역은 강화도에 국饑磯

로우 翩瑛이러한 결정그가 미국 국무성으로부터 '현지의 상황변화에 따라 적절히 대처해도 좋다'는 재량권을 부여받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상륙작전에 관한 기본 방침이 결정되자, 아시아 함대는 필요한 병력과 장비를 차출하여 탐사대장 블레이크 중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상륙부대를 편성하고 6월 3일부터 9일까지 7일 동안 상륙작전에 필요한 제반의 준비를 서둘렀다.

이 상륙작전에는 포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가 주력 군함으로 참가하여 지원포격을 하도록 하고,병력의 상륙에는 소형 전함 4척과 상륙용 소형 단정 20척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밖에도 상륙군 부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지상에서 사용할 곡사포 4문을 준비하는 한편, 병력은 해군 546명과 해병 105명 등 총 650여 명을 투입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블레이크 중령이 상륙작전 전반을 지휘하는 가운데 킴벌리(L.A. Kimberl) 중령이 105명의 해병을 거느리고 그 휘하에서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지원부대로서 포병대와 공병대,의무대가 추가로 편성되었다. 6월 9일, 상륙작전을 전개할 부대를 편성하고,제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은 강화도 상륙작전의 총지휘를 맡은 블레이크 중령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하달하였다.

1. 강화도 해안 포대에 대한 상륙작전은 블레이크 중령이 총지휘한다.

2. 본 작전에는 포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이외에 중무장 한 4척의 함정과 기타 보트가 참가하여,4척의 함정과 소형 보트는 상륙병력 수송 임무를 수행한다.

3.포함은 조선군의 포대를 무력화시켜 상륙부대의 상륙을 용이하게 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4.상륙에 성공한 전병력은 일단 조선군 포대만을 점령하고 작전개시 약 22시간 후인 다음날 밀물때에 철수한다.

5. 점령한 진지를 장기간에 걸쳐 장악할 필요가 있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중요한 이득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즉시 본대와 연락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6.이번 원정의 목표가 조선과의 조약 체결에 있는만큼,이와 관련된 긴급 사태가 발생할 경우,그에 따른 지휘관의 재량권을 충분히 보장할 것이다.

한편, 본국 정부로부터 대 조선 협상교섭의 전권을 부여받은 바 있는 로우 공사는 상륙작전에 참가할 드루 서기관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훈령을 내려 마지막까지 조선과의 협상 가능성을 배제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1.팔로스호에서 블레이크 중령과 함께 행동하면서 계속적으로 조선측 관원들과의 접촉을 시도할 것.
2.조선 당국이 특사를 파견할 기미가 보이거나,상륙작전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때는
블레이크 중령을 종용하여 모든 적대적 행동을 중지하도록 할 것.

이와 같은 훈령이 하달된 가운데 미군측 상륙부대 장병 650여 명은 이틀간의 개인식량을 휴대하고 야영준비까지 갖춘 다음, 6월 10일 오전 10시 30분에 작약도 근해의 포함 정박지를 떠났다. 포함 모노카시호가 선두에서 항진을
개시하자 함정 4척이 그 뒤를 따랐으며, 최후미에는 포함 팔로스호가 상륙용 소형 보트를 이끌고 항진하였다.

포함 모노카시호가 팔로스호는 해상에서 함포사격으로 조선군 포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8인치 대포 7문을 장착하고 있었으며, 4척의 소형 함정은 상륙군 부대가 강화도 해안에 상륙한 후 지상에서 사용할 곡사포 4문을 싣고 있었다. 6월 10일 오전에 모함기지를 출항한 아시아 함대의 상륙군 부대는 약 1시간의 항해 끝에 정오가 임박한 무렵에 강화해협 입구 초지진(草芝鎭)동남방의 황산도(黃山島)에 이르렀다.

이때 초지진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 수비대는 아시아 함대의 침공에 대비하여 만반의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군과 미군의 공방전은 강화해협이 시작되는 입구에 위치한 초지진의 수비대가 미군 상륙부대에 자위적인 위협사격을 가하게 되면서부터 그 막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5) 초지진 전투

*초지진의 방어 실태
강화해협의 관문에 해당하는 초지진은 강화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요충으로,1644년(인조 22)강화 유수 홍중보(洪重普)가 최초로 창설한 진(鎭)이었다.그 후, 첨절제사 겸 감목관(監牧官)이 파견되어 이를 관리하였다.
당시, 이 초지진에는 병마 첨절제사 이렴(李濂)이 100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주둔하면서 진선(鎭船) 3척을 보유하고 초지돈대(草芝墩臺),장자평돈대(長者坪墩臺).섬암돈대(蟾岩墩臺)를 장악하여 해안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가용 병력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방어임무를 수행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이 초지진에 소속된 포대는 강화해협 입구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포대는 강화해협으로 진입하는 아시아 함대의 상륙군 부대와 가장 먼저 접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초지진 공방전
6월 10일 오전 10시 30분경에 작약도의 모함기지를 떠난 아시아 함대의 상륙군 부대는 이날 정오 무렵에 초지진 동남방에 위치한 황산도 앞 해상에 이르렀다. 잠시후에 미군 상륙부대가 강화도로의 상륙을 기도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군 수비대와 미군 사이에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초지진의 조선군 수비부대는 대포 12문을 보유하고 있는 초지진 남쪽의 진남포대(鎭南砲臺)를 중심으로 하여 미군의 상륙 부대에 포격을 가하였다.

아시아 함대의 상륙 부대는 선두에서 항해하던 포함 모노카시호의 함재 화력을 초지진의 조선군 포대와 돈대에 집중시켰다. 이로써 조.미 양군 사이에는포격에 의한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군의 포대에 거치된 화포는 사거리가 짧고 포환(砲丸)의 파괴력이 미약하여 미군에게 이렇다 할 타격을 가하지는 못하였다.

반면에 미군의 각종 대포는 구경이 크고 사거리가 길며 파괴력이 뛰어나 삽시간에 조선군 수비대의 진지 중심부를 파괴시키는 위력을 과시하였다. 병마 첨사 이렴이 지휘하는 조선군의 초지진 수비부대는 미군이 초지진에 접근하는 초동단계에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여 그 상륙을 저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측 함포의 위력으로 말미암아 진지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속출하자 조선군은 일단 진지를 포기하고 후방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미군은 조선군이 초지진을 버리고 후방으로 퇴각하여 함포의 사격권에서 벗어난 것을 알지 못한 채로 약 2시간에 걸쳐 초지진의 좌우 측방과 후방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대하여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가하여 이를 초토화시켰다.이와 같이 하여 함포공격이 완료되자, 오후 2시경부터 킴벌리 중령이 해군과 해병의 혼성부대를 이끌고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20여 척의 상륙용 소형 보트에 분승한 상륙군 부대는 선박을 초지진 남쪽 해안지역 일대에 접안하였다. 그런 다음, 부대를 3개 경로로 분진시켜 초지진으로 접근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개 부대는 곡사포 4문을 인력으로 운반하면서 갯벌지역을 통과하여 초지진 서측방으로 접근하였다. 이는 미군 상륙부대가 초지진을 동.서.남 3면에서 협공하려는 기도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이때 미군 상륙부대는 초지진 남쪽에 펼쳐진 넓은 갯벌을 통과하여 상륙하였기 때문에 중량이 무거운 곡사포를 운반하는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였다. 더구나 이 지역은 도보행진조차 곤란한 지경이었으므로 상륙을 개시한 지 무려 2시간이나 경과한 오후 4시 경에야 가까스로 상륙을 완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초지진 일대가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거의 초토화된 다음이었으므로 미군은 조선군의 저지를 받지 않고 무혈로 상륙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하여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상륙부대는 텅 빈 초지진을 점령하고,무기고를 비롯한 창고 및 부속 건물들 가운데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몇몇 건물만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미군은 이밖에도 대포와 같은 무기류를 빠짐없이 수거하여 앞바다에 수장시켜 다시는 사용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어서 날이 어두워지자 초지진 서북쪽에 해병대의 야영지를 설치하여 조선군의 야간공격에 대비하도록 하는 한편, 초지진 서측방의 초지리(草芝里)에는 상륙부대의 본대가 숙영을 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초지진에서 퇴각한 이렴의 조선군은 미군이 초지진을 유린하고 그 부근 일대에서 야영을 하자, 야간기습 공격으로 이들을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초지 첨사 이렴은 병력 수십명을 이끌고 이날밤 자정 무렵에 미군 해병대 숙영지에 대한 야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기습 공격을 예상하고 이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던 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조선군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고 광성보 방면으로 패퇴하였다.

(6)덕진진 전투

*덕진진의 방어 실태
덕진진(德津鎭)은 초지진 북쪽에 위치한 군진으로서 병인양요 당시 순무 천총 양헌수(梁憲洙)가 정족산성(鼎足山城)으로 진입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상륙하였던 곳이다. 이 덕진진은 덕진돈대(德津墩臺)와 용두돈대(龍頭墩臺)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대포 10문과 진선 2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진이 창설된 당시에는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종 4 품)가 배치되었으나 1666년(헌종 7)에 강화 유수의 건의에 蕙병마 첨卉┿怜nbsp; 陸通津)에 주재하게 되자, 그 대신에 이곳에는 별장(別將:종 9 품)이 배치되어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그 후 1677년 (숙종 3)부터는 만호(萬戶:종5품)가 부임하여 진을 지휘하였으며,편제상 100여 명의 수비군이 주둔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에 훨씬 미달하였다.

*덕진진 공방전
초지진을 점령한 미군은 강화해협(황산도 입구부터 초지대교 방면)을 따라 북상하여 6월 11일 새벽부터 포함 모노카시호로 덕진진에 맹렬한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그러자, 덕진진의 조선군 수비부대는 제대로 응사조차 해 보지도 못한 채 많은 피해를 입고 대모산(大母山) 후방 신현리(新峴里)쪽으로 퇴각하였다.한편, 초지진 후방의 구릉지대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킴벌리 중령 휘하의 미군 상륙부대는 11일 새벽 4시경에 기상하여 일부 병력을 초지진으로 보내어 나머지 건물들과 각종 방어시설들을 남김없이 파괴하여 초토화시키는 한편, 덕진진에 대한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공격준비를 완료한 킴벌리 부대는 아침 6시경부터 해병대를 첨병부대로 내세워 조선군의 기습공격에 대비하면서,북쪽으로 약 2키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덕진진을 향하여 이동을 개시하였다. 이때는 이미 포함 모노카시호가 덕진진 앞 바다에서 함포사격으로 덕진진 수비대를 전혀 우려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들이 통과할 지역이 갯벌과 저습지대였으므로 당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미군 상륙부대는 7시 30분경에 덕진진 직후방에 이르렀다. 이때 덕진진은 조선군 수비대가 모노카시호의 함포사격에 견디지 못하고 모두 퇴각해 버린 뒤였으므로 이미 무인지경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요 시설물들은 치열한 함포 사격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화약과 포환이 장전된 대포도 무려 수 십문씩이나 버려져 있었다.

이와 같이 하여 미군은 덕진진을 무혈로 점령하고,이곳의 각종 시설물과 무기류들을 소각시키거나 덕진진 앞 바다에 수장시켜 버렸다. 한편, 덕진진에서 퇴각한 조선군 수비대는 모노카시호의 함포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자 신현리 일대에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던 중,미군의 함포사격이 끝나고 킴벌리 중령의 미군 상륙부대가 덕진진에 진입하자, 이들에 대한 기습공격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미군들이 덕진진의 각종 창고와 무기고에 방화하면서 부근 일대를 유린하느라고 어수선해진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선군은 미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오히려 기선을 제압당하여 전의를 상실한 채 많은 사상자를 내고 뿔뿔히 흩어져 패주하고 말았다. 덕진진을 점령한 킴벌리 중령의 상륙부대는 조선군의 반격을 물리치고 각종 시설물들을 철저히 파괴한 후,일단 부대를 휴식시키면서 광성보(廣城堡)을 향하여 북상을 계속할 준비를 갖추었다.

(7) 광성보 전투

*광성보의 방어실태
1658년(효종 9)에 축조된 광성보는 별장(別將) 휘하에 100여 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광성돈대와 오두돈대 화도돈대를 관장하고 ,진선 5척을 거느리는 강화해협 최대의 요새지였다. 또한 이곳은 강화해협에서 가장 굴곡이 심하여, 손돌목이라 불리우는 거센 급류가 흐르는 곳이로서 강화해협을 통과하는 선박들이 가장 위협을 느끼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천연의 요지인 광성보에는 6월 2일부로 진무영 중군에 임명된 어재연(魚在淵)이 사태의 심각성에 제반 절차를 생략한 채 서둘러 부임해 와서 직접 부대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어재연은 부임 당시에 훈련도감 2초(哨)와 금위영. 어영청.총융청군 각 1초씩을 선발하여 총 5초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도착하였으므로 광성보의 전력이 종전에 비하여 크게 강화된 상태였다.

어재연은 1823년(순조 23)에 경기도 이천(利川) 태어나 19세에 무인의 길을 택하여 무과(武科) 정시(庭試)에 급제한 이래로 광양 현감,평안도 순영중군 등을 거치면서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그리하여 조정은 그에게 양요를 수습하라는 중임을 맡기어 곧바로 광성보에 급파한 것이었다. 진무 중군 어재연은 광성보에 도착하자마자,총 1,000여 명에 이르는 군사를 수습하여 광성보 소속된 3개 돈대에 조정 배치하였다.

그리고 각종 대포 143문을 총동원하여 재배치함으로써 항전태세를 강화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화해협 제일의 요새인 광성포대를 중심으로 주력부대를 배치한 어재연은 광성보 중앙부에 대장(大將)의 기호(旗號)인 '자기(帥字旗)'를 높이 세워서 이곳에서 결사항전을 전개할 결의를 나타내었다.

*광성보 공방전
킴벌리 중령의 미군 상륙부대는 광성보 후방 봉화곡(烽火谷)에 집결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광성보에 대한 공격준비를 서둘렀다. 이 무렵. 블레이크 중령이 지휘하는 미군의 해상 지원부대도 덕진진 앞 바다에서 광성보 앞 바다로 북상하여 상륙부대를 지원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미군의 해상 지원 부대는 11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부터 어재연의 주력부대가 방어하고 있는 광성돈대 등,광성보 일대에 대한 함포사격을 개시하였다.

그러자 이와 때를 맞추어 봉화곡 일대에서 공격준비를 완료한 채 대기하고 있던 킴벌리 중령의 상륙부대도 4문의 곡사포를 광성보의 조선군 진지에 지향하여 집중 포격을 가하였다. 따라서, 광성돈대 일대에 위치한 어재연은 전방으로부터는 미군해상 지원부대의 강력한 8인치 함포사격을 받게 되었으며, 후방의 상륙부대로부터는 곡사포 공격을 받게 됨으로써 전후방 양면에서 협공을 당하는 진퇴양난의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무려 1시간 이상에 걸친 미군의 양면 포격이 계속되어 어재연의 조선군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반면에 ,광성보의 조선군의 보유하고 있는 대포는 소구경에다가 사거리가 극히 짧았을 뿐만 아니라,위력이 미약한 포환을 사격하였으므로 미군에게 타격을 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미군 상륙부대느 해상 지원부대의 함포사격이 끝나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곡사포 사격을 멈추고 붕화곡을 떠나 광성돈대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햔편, 광성보의 조선군은 미군의 포격이 그치자 서둘러 전열을 재정비하고 미군의 지상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부상자에 대한 응급처치와 파괴된 성벽의 긴급 보수 및 병력, 대포의 재배치 등이 이루어졌다.

킴벌리 중령이 이끄는 미군 상륙부대는 광성돈대 부근의 해발 40미터 구릉 하단부에 이르자 전면에서 돌격태세를 갖추었다. 잠시 후, 돌격 부대가 완료되자 미군은 광성보를 향하여 돌격을 개시하였다. 진무중군 어재연 휘하의 조선군은 미군 상륙부대가 광성보 요새로 접근해 오자 사격 준비를 완료한 채 미군 돌격부대가 사정거리 안으로 접근해 오기를 기다리면서 우렁차게 군가를 합창하여 기세를 올렸다.

그리하여, 미군의 공격에 대한 조선군의 응전으로 양군 사이에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미군이 서.남. 북 3면에서 포위망을 좁히면서 공격의 기세를 강화함에 따라 조선군은 현저한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단시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당시 미군은 남북전쟁(1861-1865)을 통하여 성능이 우수한 각종의 화기를 개발하여 보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전투기술도 눈부시게 향상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비하면 조선군은 화력과 전투기술에 있어서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이 두꺼운 목면으로 만든 방탄용 전투복을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무더운 여름 날씨에 기동력마져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처지였다.따라서, 20여 분 간에 불과한 공방전에서 조선군은 이미 재기가 불능한 정도의 심대한 타격을 입고 광성돈대로 밀려 들어가 배수진을 친 채 최후의 결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미군 상륙부대는 광성돈대를 중심으로 하여 3면에서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잠시 후에는 광성돈대를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최후 방어선을 돌파하고 동쪽 해안의 절벽 쪽으로 어재연군을 밀어붙였다. 조선군은 이에 앞서 이미 미군의 함포 및 곡사포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어 전력이 크게 악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전열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강력한 광성돈대 부근에서 상륙부대로부터 정면공격을 받게 되자 급기야는 광성돈대 부근에서 백병전으로 미군의 공격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군은 화승총에 실탄을 장전할 겨를도 없이 미군이 진내에 돌입하자, 돌멩이아 진흙을 집어던지는가 하면 소총을 몽둥이처럼 휘둘러 미군의 진입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급기야는 쌍방이 서로 한데 엉키어 창검으로 어지러이 치고 받는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이때 광성돈대에서 조선군을 지휘하던 진무 중군 어재연은 전투가 백병전의 단계에 이르자 손수 장검을 빼어들고 군사들과 한데 어우러져 선전분투하였다.

이때 민간인 신분으로 종군하여 함께 싸우고 있던 어재연 아우 어재순(魚在淳)도 그 형을 따라 혼전의 와중에 뛰어들었다. 중군 어재연은 그를 다음과 같이 만류하였다.
"너는 일개 백성의 신분이다. 군인으로서 전장에서 죽는 나와는 처지가 다르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에 어재순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는 일에 어찌 군과 민이 다를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그 형의 만류를 뿌리치고 진영을 떠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여 중군 어재연 형제를 비롯한 조선군의 전장병은 일치단결하여 끝까지 싸웠으나 결국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중군 어재연과 천총 김현경(金鉉暻).광성 별장 박치성(朴致誠) 등 350여 명의 장병들이 장렬한 최후를 마치자 광성보는 미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살아 남은 일부 장병들은 미군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거나,부상당한 몸으로 강화해협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어 버렸다.

다만 스스로 목숨조차 끊을 수 없는 중상자 20여 명만이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미군은 이 전투에서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를 내는 가벼운 손실을 입는 데 그쳤다. 한편,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이 보여준 불굴의 투쟁정신은 상대방인 미군측에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킴벌리 중령 휘하에 부관으로 참전했던 슐레이(W.S. Schley) 소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이다."

광성보의 조선군 진지를 점령한 미군은 11일 오후 1시경에 조선군의 '수자기(帥字旗)'를 내리고 자국의 '성조기(星條旗)'를 게양한 후, 사상자를 포함 모노카시호로 후송하였다. 그런 다음,각종 화기와 서적류 등 노획물들을 수습하여 후송할 수 있도록 조치하는 한편, 광성보 일대의 축성 구조물 일체를 철저히 파괴하였다. 이날 밤, 미군 상륙부대는 조선군의 야간 기습 공격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한 후, 광성보 일대에서 숙영을 하였다.

이튿날(12일) 날이 밝자, 그들은 당초 계획대로 모함기지로 철수하기 위하여 해상지원부대와 함께 준비를 서둘렀다.미군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각종 노획물과 조선군 포로들을 모노카시호에 옮겨 싣고 강화해협에서 유유히 빠져 나갔다.

지역신문인 강화신문에 게재된 수자기의 반환경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71년 신미양요때 미군에 빼앗긴 강화 장수깃발의 반환을 촉구한 인천시의회의 결의안이 결실을 맺어 어재연 장군의 통한이 서린 장군기가 136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어재연 장군기의 영구반환을 추진했으나 미국해군사관학교측이 관련 법령과 절차상의 이유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함에 따라 최장 10년간(2년간 최대 5차례까지 연장가능)장기 대여키로 했다고 9일 밝혔다.이에 따라 장군기는 2007년 10월 15일,6일 이틀간 상태점검을 받은 뒤 오는 1 9일 오후 5시께 인천공항을 통해 돌아왔으며,문화재청은 이후 국립고궁박물관과 인천시립박물관,강화박물관에서 순차적으로 전시할 계획이다.

가로, 세로 각각 4.5미터 정도에 재질은 삼베나 광목으로 추정되는 어재연 장군기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수자기(鎭중이나 營門의 뜰에 세워진 大將의 軍旗)로 국내에도 매우 희귀한 군사자료다. 미국전사에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어재연(1828-1871)이 조선군 350명과 병력.무기에서 절대열세임에도 불구. 광성진에서 미군과 48시간 동안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으며,미군은 전투가 끝난 광성진 손돌목 돈대에 높이 휘날리던 장수깃발을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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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나바위 학생들

1900년 동대문 밖

1900 남대문

구식군대의 지휘관군복을 차려 입고 칼을 잡고 있는 구식군대의 지휘관. 도도한 자세에도 쇠잔해 몰락해가는 권위가 엿보이는 듯하다.

구식군대의 지휘부남한산성을 수비하던 구식군대의 지휘관과 그 막료들이다. 지휘관이 ‘남한수어제군사령(南漢守禦諸軍司令)’이라고 쓰인 군령기를 들고 있다.

관리와 순검관복을 입고 앉은 관리와 서양식 칼을 찬 순검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전통과 근대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관리의 하인놀란 표정으로 사진기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는 복장으로 보아 관리의 하인이다.

장교와 병사서양식 군복 차림의 장교와 병사. 왼쪽 탁자에 깃 달린 장교모자가 놓여 있다.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태극기와 일본기를 배경으로 한 사진의 오른쪽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왼쪽은 조선군사령관을 역임하고 뒤에 조선총독이 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절의 종각에 스님과 신도가 한가롭게 앉아 있다 사진에 찍혔다. 동(銅)으로 만든 종은 대중을 모으거나 때를 알리는 데 사용됐다.

계룡산 갑사(甲寺) 불단사찰의 대웅전에 불상이 안치돼 있다. 여러 형태의 불상이 안치된 이곳은 계룡산에 있는 갑사로 삼국시대 이래 여러 차례 중건된 절이다.

절에서 열린 잔치절에서 환갑잔치라도 연 듯하다. 앞쪽에 행사의 주인공이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 있고, 뒤쪽에 스님들이 앉았다. 나이 든 스님은 경건하게 합장을 한 반면 젊은 스님은 사진에 정신을 빼앗긴 듯 보인다.

서울 남산 국사당의 무신도(巫神圖)남산 국사당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국가의 공식행사인 기우제나 제사 등을 지냈다. 조선 말기에 그려진 무신도가 걸려 있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하며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겼다.

장승과 솟대동네 어귀나 길가에는 장승과 솟대가 세워졌다. 마을을 지켜준다는 단순한 민간신앙뿐만 아니라 지역과 지역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이정표의 기능을 갖는 상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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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민영익(閔泳翊·1860∼1914)이 1893년 조선보빙사 자격으로 구미 순방 때

사용한 명함.우리나라 최초의 명함으로 추정.미국산 종이에 요즘 명함 크기와 비슷

한 가로 5.5㎝ 세로 9㎝인 이 명함에는 민영익 특유의 필체로 이름이 씌어 있다(연

세대학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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