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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7.25 구한말 주한 미국 공사관 사진.
- 2008.07.25 하와이 이민선.
- 2008.07.25 아관파천
- 2008.07.24 한성순보
구한말 주한 미국 공사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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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설탕재배자 협회는 이민의 모집, 운송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동아개발공사를 설립, 최초의 이민선이 1902년 12월 22일 위 사진의 이민선을 타고 인천을 출발하였다. 이때부터 1905년까지 65척의 이민선이 7,226명의 한국인을 하와이로 이주시켰으며 하와이는 한국인의 해외발전의 교두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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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덕수궁 돈덕전(惇德殿) 모습을 담은 사진이발견됐다.(사진 1)
이 사진을 통해 그간 아관파천(1896년) 당시 고종이 평복에 갓을 쓰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을 때(사진 2) 일본군이 고종의 뒤를 쫓아 무력 시위하는 것(사진 3)으로 알려졌던 사진의 배경이 러시아공사관이 아니라 돈덕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시기도 1896년이 아니라 1907년 7월이며, 일제가 고종에게 황제 양위를 요구하며 궁궐 안마당까지 군사력을 동원, 무력 시위를 벌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 사진은 서울대 이태진(李泰鎭·근대사) 교수가 일본 가쿠쇼인(學習院)대학에 소장된 ‘한국사진첩’(1910년 통감부 발행)에서 발견, 21일 본지에 공개했다.
돈덕전은 1900년대 초반에 지은 서양식 건물로 덕수궁 석조전 뒤편 현 포덕문 북동쪽에 있었다.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1907년)했으며 1920년대 초반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사진에서 돈덕전이 확인됨에 따라 이 건물에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오얏꽃 무늬가 기둥과 난간에 새겨져 있는 것 등을 알 수 있게 됐다.
러시아 공사관 앞에서 아관파천에 집단 항의하는 일본군(1896.2.11) 으로 알려 졌으나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가 기둥과 난간 등에 장식된 덕수궁 돈덕전. ③덕수궁 돈덕전에서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며 무력 시위하는 일본군. 1907년 7월 22일 고종을 위한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려던 대한제국 시위대를 제압한 뒤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집단 항의하는 일본군을 내려다 보는 고종황제
일본군을 내려다보고 있는 고종황제(2층 흰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중 오른쪽, 왼쪽은 황세자 순종)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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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교수는 아관파천 때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 2, 3의 날짜를 1907년 7월 22일로 추정했다. 당시 일제는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1907년 6월)에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3인을 특사로 보내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을 호소하려 한 것을 빌미로 황제 퇴위를 강요했다.
7월 22일 새벽 덕수궁을 지키던 시위대 일부 병력이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이완용 등 친일 대신들이 이를 먼저 감지해 일본군 1개 대대가 시위대를 진압하고 돈덕전 앞에서 고종의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무력 시위를 벌였다.
당시 사건을 현장 취재했던 오사카 매일신문 나라사키(楢崎桂園)기자는 ‘한국정미정변사(韓國丁未政變史)’라는 책에서, 이날(7월 22일) 일제는 황제 양위에 응하지 않는 고종과 황태자(순종)를 대신해 환관 2명을 대역(代役)으로 내세워 황제 양위식을 치렀다고 기록했다.
대한제국 군대도 그해 8월 1일 해산됐다. 무장 해제된 대한제국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 무장 항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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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의 번역어인 ‘신문’이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883년《한성순보》가 발간되던 때부터다.
열흘마다 발행되며, 잡지의 형식을 띠었다. 또한 급박한 사건, 사고를 많은 사람들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도한다는 근대적 저널리즘의 모토를 따르기보다는 외국의 신문을 번역해 게재하거나, 정부 관리들의 소식지인 관보를 그대로 옮겨놓거나, 근대적 지식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전달하거나 하는 기사로 지면이 채워졌다.
순한문으로 쓰여졌다는 점과 발행주체가 정부였다.
순한글의 민간지로 등장한 것이 바로 《독립신문》이다.
독립신문의 논조가 미국 유학파와 급진적 개화사상으로 일관한 ‘자유주의’ 모델을 따랐다면, 독립신문이 폐간될 무렵 발간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개명한 유교 지식인들의 활동무대였다.이들 신문 외에 천도교에서 발행한 《만세보》, 여성들에게 널리 읽힌 《제국신문》, 논설이 아닌 사회면 기사를 1면에 실은 《대한민보》 등이 1900년대에 등장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모든 신문은 폐간되었으며,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만이 1910년대를 기록한 유일한 신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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