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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1.09 구한말의 조선
  3. 2007.01.08 1890-1900
  4. 2007.01.08 1890-1900 조선의 여인2
2007. 1. 9. 02:09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황제




고종과 순종.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입었던 붉은색 곤룡포 차림으로 1890년무렵의 모습이다. 아직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기 전이라, 고종이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황룡포가 아닌 홍룡포 차림이다




고종황제와 신하들의 모습.




1910년 한일병탄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자리를 함께 한 조선총독부 고위관리들과 대한제국 황족들. 앞줄 가운데 모자를 벗은 사람이 고종 황제이고, 그 오른쪽이 순종, 고종의 왼쪽은 영친왕이고, 그 옆은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






고종이 대한제국 초기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국한문친서. 고종은 1909년 초 국외망명을 시도할 정도로 일제의 한국침략에 강경하게 맞선 군주였다.




일본 관리들이 쓰는 모자와 의상을 입고 궁궐을 나선 고종. 왕의 행차때 사용하는 일산을 받쳐들고 있지만 어가를 매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다. 1919년 촬영.



1919년 집무를 보기 위해 겨울옷을 입고 선원정에서 인정전으로 나서고 있는 고종황제의 모습




러시아 공사관 내 고종 황제 거실. 황제용 더블 베드-황태자용 싱글 베드-응접 세트가 전부였고, 옆 방에서 상궁 둘이 번갈아 기거하며 수발을 들었다.




고종이 파천해 집정할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고종황제의 후궁 양씨(1882년생, 덕혜옹주의 생모).




엄황귀비. 명성황후의 상궁으로 있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황제를 모셨고, 이어 왕자 은(영친왕)을 낳았다. 1906년에 진명여학교를 설립, 한국 근대교육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권오창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진영.




1903년 11월 29일자 [보스턴 선데이 포스트]지에 보도된 고종황제와 미국인 에밀리 브라운양 결혼 기사. [유일한 미국인 황후 어떻게 대관했는가]라는 제목으로 브라운양의 클로즈업된 모습과, 고종과 브라운 양이 일산(日傘)으로 가린 연(輦.임금의 수레)을 타고 궁을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한문 앞을 지나고 있는 고종황제의 국상행렬.




고종황제 국장때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고종황제 국상 전날의 대한문 앞 모습.




1921년 고종황제 제사때의 모습. 중앙이 순종황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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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1900 조선의 여인2  (0) 2007.01.08
Posted by qlstnfp
2007. 1. 9. 02:02
구한말 조선





홍 지문은 한북문이라고도 하는데,

인왕산 뒷 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 대성의 성문이다.

홍지문 문루와 오른쪽의 홍지문





스 튜디오에서 촬영한 풍속 사진.

‘조선 풍속’엽서에 실린 사진 중 상당수 는

스튜디오에서 조선인 모델을 고용해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

무대 배경에는 서구식 장식물이 등장하고

조선인 모델들은 촬영 자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 풍속 이미지로 팔려나갔다.

회식(우편 엽서)





숭 실학교 학생들





서 광범





국 민소학독본





이 사진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풍속 사진엽 서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엽서는

관광 기념용 사진엽 서 가운데 한 장이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 되었던 '상품'이다.

죄인들(우편엽서)





혜 화문과 성곽





서 울 60리 둘레를 현무도의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호위하고 있는 한양의 도성은 애초 남산과 북악산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이것을 세종이 모두 돌로 쌓았으니,

연 인원 32만 2,400명이 동원되어 98 일만에 완성을 보았다.

대규모 인력 동원을 통한 단기의 공사였다 .

옛 법도대로 따르자면 성곽은 사각형 모양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 양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짓다보니

굽이굽이 산성이 되어 물결쳤다 .

성곽의 기본 출입문은 동·서·남 ·북의 4대문이었으나,

이외에 도 4소문과 그 밖의 여러 문이 있었다.

4소문은 혜화문·창의문·소의문· 광희문이다.

그 가운데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 체는 반드시 서쪽은 서소문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나가게 하고,

다른 문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수구문이라는 명칭은 청계천

수문 근처를 통해 성 밖으로 흘러나가고,

남산의 물이 광희문 부근을 통과하여

나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에서는 콜레라 등의 전염병 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곤 하였다.

이에 시골 사람들은 “한양에 가거든 수구문 돌담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고 부탁하 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광희문 밖 돌가루가 병마를 물리치는데

효 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광희문이란 이름보다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못된 바람은 시구문으로 분다 ’는 말도 있었다.

또 다 죽게 된 사람을 ‘시구문 차례’라고 했으니 ,

양반은 물론 보통 사람도 이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도성(인왕산 곡성)





1890년대 보신각







윤 치호

박영효와 윤치호





마 패





남대문(숭례문)





궁 녀





경복궁과 육조거리





숭 례문(남대문)





왼 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엄씨.덕혜옹주.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 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인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 형제, 민영 환의 사위)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 대한사진예술가협 회

구한말 고종,순종,영친왕..구한말 황실





육 상궁(毓祥宮)은 원래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봉사하는 사당이었다 .

1908년에 저경궁 · 대빈궁 · 연우궁 · 선희궁 · 경우궁이

합 사되어 6궁으로 불렸으며,

1929년에 덕안궁이 경내로 옮겨와 7궁이 되었다 .

육상궁





조 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

영조가 감고당 편액을 내렸고,

명성황후가 책봉되기 이전에 거처 하기도 하였다.

감고당(感古堂, 현 안국동 덕성여고 자리 )





전 란 등 비상시 왕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행궁이다.

북한산성 행궁





사 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자리

경모궁의 일부





창 덕궁





경 운궁(덕수궁)





1892 창경궁과 홍화문





서울 - 천변(川邊)마을





뒤에 보이는 다리가 수표교.

서울은 지형적으로 북쪽에 산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 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하천들은 도심을 흘러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

도성 안을 흐르는 하천들은 청계천을 비롯하여 중학천 등이 있었다.

서울 - 청계천에서 빨래 하는 여인들





1940.01.01 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일황부부사진을 실은 조선일보 신년호





1907 윤치호가 쓴 애국가





이 토 히로부미(왼쪽)와 한국 주재 일본군 사령관(오른쪽)

1905.11.29 경성역 - 일본정부 칙사로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





포 도청은 1895년 경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조선왕조에 경찰기관이다.

1890 포 도대장





한 말 훈장과 학동들





한 말 대구 - 서문시장





한 말 서울 소공동 - 사진관





한 말 서울 - 싸전거리





한 말 인력거





1909 전주 - 신흥학교 수업 광경,

안창호가 설립한 평 양대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명 성황후의 시신이 홍농 장지로 떠나기 전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기념촬영한 것이다.

1899 슬픔에 잠긴 고종황제





강 화도 초지진 포대



1876 전차에 오르는 승객들





장 춘단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순절한

훈련대 연 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왕실을 위해 충절을 바친 여러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제사단이다.

1908년 일제 는 제사를 폐지시키고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어 가행렬





융 희 2년(1908) 장충단에서 거행되었다.

가운데 좌우로 서있는 사람은 조희 연(趙羲淵)과 김윤식(金允植).

1908 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 희생자 추도 회





마 지막 황제 순종과 대신들





1902 고종의 칙명





원 구단 일대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짐꾼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1904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정공 민영환의 컬러 유리 원판 사진.

출처 : 정성길 화성테마박물관장

1904 민영환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젖을 먹이고있는 여인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출 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양반댁마님과 가마꾼





출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서당의 서동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상류층 부인을 태운 가마





출 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상류부인과 규수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빨래터에 가는 여인과 아이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물지게꾼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목재를 파는 소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목재를 나르는 소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에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떡 만드는 사람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오 라버니에게 심신의 아픔을 절절히 적어 보낸 명성황후의 편지 두 통.

청나 라제 예쁜 색지에는 대나무와 꽃이,

편지 봉투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다 .

1874 명성황후의 편지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돼지 팔러가는 사람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돼지 팔러가는 사람





출 처 : J.Z.Moore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10 평양부근 - 길 옆의 칠성당 출처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서울 신사들





1908~10 서울 - 짐꾼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서울 - 승려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상여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한양 - 주민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한양 - 짐꾼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빨래터





1907 원구단과 황궁우





1899년에 여러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원구단의 북쪽에 지은 8각 3층의 건축물이다.

지금은 소공동 조선호텔 뒤에 있으며 ,

사적 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궁우





고 종이 1897년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원구단은

1913년 일제에 의해 파괴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원구단의 정자





조선 여인(우편엽서)





1903 조선여인(우편엽서





광희문(시구문) 밖





도성 동남쪽에 위치한 4소문의 하나이다.

문의 좌우 성 벽은 일제 때 헐렸다가

1975년 남쪽으로 15m 옮겨져 복원되었다 .

1892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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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 8.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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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 8.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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