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 9. 02:02
구한말 조선
홍 지문은 한북문이라고도 하는데,
인왕산 뒷 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 대성의 성문이다.
홍지문 문루와 오른쪽의 홍지문
스 튜디오에서 촬영한 풍속 사진.
‘조선 풍속’엽서에 실린 사진 중 상당수 는
스튜디오에서 조선인 모델을 고용해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
무대 배경에는 서구식 장식물이 등장하고
조선인 모델들은 촬영 자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 풍속 이미지로 팔려나갔다.
회식(우편 엽서)
숭 실학교 학생들
서 광범
국 민소학독본
이 사진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풍속 사진엽 서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엽서는
관광 기념용 사진엽 서 가운데 한 장이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 되었던 '상품'이다.
죄인들(우편엽서)
혜 화문과 성곽
서 울 60리 둘레를 현무도의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호위하고 있는 한양의 도성은 애초 남산과 북악산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이것을 세종이 모두 돌로 쌓았으니,
연 인원 32만 2,400명이 동원되어 98 일만에 완성을 보았다.
대규모 인력 동원을 통한 단기의 공사였다 .
옛 법도대로 따르자면 성곽은 사각형 모양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 양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짓다보니
굽이굽이 산성이 되어 물결쳤다 .
성곽의 기본 출입문은 동·서·남 ·북의 4대문이었으나,
이외에 도 4소문과 그 밖의 여러 문이 있었다.
4소문은 혜화문·창의문·소의문· 광희문이다.
그 가운데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 체는 반드시 서쪽은 서소문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나가게 하고,
다른 문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수구문이라는 명칭은 청계천이
수문 근처를 통해 성 밖으로 흘러나가고,
남산의 물이 광희문 부근을 통과하여
나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에서는 콜레라 등의 전염병 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곤 하였다.
이에 시골 사람들은 “한양에 가거든 수구문 돌담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고 부탁하 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광희문 밖 돌가루가 병마를 물리치는데
효 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광희문이란 이름보다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못된 바람은 시구문으로 분다 ’는 말도 있었다.
또 다 죽게 된 사람을 ‘시구문 차례’라고 했으니 ,
양반은 물론 보통 사람도 이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도성(인왕산 곡성)
1890년대 보신각
윤 치호
박영효와 윤치호
마 패
남대문(숭례문)
궁 녀
경복궁과 육조거리
숭 례문(남대문)
왼 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엄씨.덕혜옹주.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 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인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 형제, 민영 환의 사위)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 대한사진예술가협 회
구한말 고종,순종,영친왕..구한말 황실
육 상궁(毓祥宮)은 원래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봉사하는 사당이었다 .
1908년에 저경궁 · 대빈궁 · 연우궁 · 선희궁 · 경우궁이
합 사되어 6궁으로 불렸으며,
1929년에 덕안궁이 경내로 옮겨와 7궁이 되었다 .
육상궁
조 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
영조가 감고당 편액을 내렸고,
명성황후가 책봉되기 이전에 거처 하기도 하였다.
감고당(感古堂, 현 안국동 덕성여고 자리 )
전 란 등 비상시 왕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행궁이다.
북한산성 행궁
사 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자리
경모궁의 일부
창 덕궁
경 운궁(덕수궁)
1892 창경궁과 홍화문
서울 - 천변(川邊)마을
뒤에 보이는 다리가 수표교.
서울은 지형적으로 북쪽에 산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 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하천들은 도심을 흘러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
도성 안을 흐르는 하천들은 청계천을 비롯하여 중학천 등이 있었다.
서울 - 청계천에서 빨래 하는 여인들
1940.01.01 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일황부부사진을 실은 조선일보 신년호
1907 윤치호가 쓴 애국가
이 토 히로부미(왼쪽)와 한국 주재 일본군 사령관(오른쪽)
1905.11.29 경성역 - 일본정부 칙사로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
포 도청은 1895년 경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조선왕조에 경찰기관이다.
1890 포 도대장
한 말 훈장과 학동들
한 말 대구 - 서문시장
한 말 서울 소공동 - 사진관
한 말 서울 - 싸전거리
한 말 인력거
1909 전주 - 신흥학교 수업 광경,
안창호가 설립한 평 양대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명 성황후의 시신이 홍농 장지로 떠나기 전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기념촬영한 것이다.
1899 슬픔에 잠긴 고종황제
강 화도 초지진 포대
1876 전차에 오르는 승객들
장 춘단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순절한
훈련대 연 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왕실을 위해 충절을 바친 여러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제사단이다.
1908년 일제 는 제사를 폐지시키고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어 가행렬
융 희 2년(1908) 장충단에서 거행되었다.
가운데 좌우로 서있는 사람은 조희 연(趙羲淵)과 김윤식(金允植).
1908 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 희생자 추도 회
마 지막 황제 순종과 대신들
1902 고종의 칙명
원 구단 일대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짐꾼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1904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정공 민영환의 컬러 유리 원판 사진.
출처 : 정성길 화성테마박물관장
1904 민영환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젖을 먹이고있는 여인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출 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양반댁마님과 가마꾼
출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서당의 서동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상류층 부인을 태운 가마
출 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상류부인과 규수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빨래터에 가는 여인과 아이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물지게꾼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목재를 파는 소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목재를 나르는 소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에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떡 만드는 사람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오 라버니에게 심신의 아픔을 절절히 적어 보낸 명성황후의 편지 두 통.
청나 라제 예쁜 색지에는 대나무와 꽃이,
편지 봉투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다 .
1874 명성황후의 편지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돼지 팔러가는 사람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돼지 팔러가는 사람
출 처 : J.Z.Moore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10 평양부근 - 길 옆의 칠성당 출처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서울 신사들
1908~10 서울 - 짐꾼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서울 - 승려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상여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한양 - 주민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한양 - 짐꾼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빨래터
1907 원구단과 황궁우
1899년에 여러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원구단의 북쪽에 지은 8각 3층의 건축물이다.
지금은 소공동 조선호텔 뒤에 있으며 ,
사적 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궁우
고 종이 1897년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원구단은
1913년 일제에 의해 파괴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원구단의 정자
조선 여인(우편엽서)
1903 조선여인(우편엽서
광희문(시구문) 밖
도성 동남쪽에 위치한 4소문의 하나이다.
문의 좌우 성 벽은 일제 때 헐렸다가
1975년 남쪽으로 15m 옮겨져 복원되었다 .
1892 광희문
홍 지문은 한북문이라고도 하는데,
인왕산 뒷 편 끝자락에 있는
탕춘 대성의 성문이다.
홍지문 문루와 오른쪽의 홍지문
스 튜디오에서 촬영한 풍속 사진.
‘조선 풍속’엽서에 실린 사진 중 상당수 는
스튜디오에서 조선인 모델을 고용해
찍은 것으로 추측된다 .
무대 배경에는 서구식 장식물이 등장하고
조선인 모델들은 촬영 자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 풍속 이미지로 팔려나갔다.
회식(우편 엽서)
숭 실학교 학생들
서 광범
국 민소학독본
이 사진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풍속 사진엽 서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엽서는
관광 기념용 사진엽 서 가운데 한 장이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 되었던 '상품'이다.
죄인들(우편엽서)
혜 화문과 성곽
서 울 60리 둘레를 현무도의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호위하고 있는 한양의 도성은 애초 남산과 북악산을
제외하고는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
이것을 세종이 모두 돌로 쌓았으니,
연 인원 32만 2,400명이 동원되어 98 일만에 완성을 보았다.
대규모 인력 동원을 통한 단기의 공사였다 .
옛 법도대로 따르자면 성곽은 사각형 모양이 되어야 하겠지만
한 양의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짓다보니
굽이굽이 산성이 되어 물결쳤다 .
성곽의 기본 출입문은 동·서·남 ·북의 4대문이었으나,
이외에 도 4소문과 그 밖의 여러 문이 있었다.
4소문은 혜화문·창의문·소의문· 광희문이다.
그 가운데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 : 시체가 나가는 문)으로 불려졌다.
조선시대에 사람이 죽으면 그 시 체는 반드시 서쪽은 서소문으로,
동쪽은 광희문으로 나가게 하고,
다른 문으로는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시구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수구문이라는 명칭은 청계천이
수문 근처를 통해 성 밖으로 흘러나가고,
남산의 물이 광희문 부근을 통과하여
나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에서는 콜레라 등의 전염병 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광희문 밖에 내다 버리곤 하였다.
이에 시골 사람들은 “한양에 가거든 수구문 돌담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고 부탁하 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광희문 밖 돌가루가 병마를 물리치는데
효 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광희문이란 이름보다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 불렀다.
그리고 ‘못된 바람은 시구문으로 분다 ’는 말도 있었다.
또 다 죽게 된 사람을 ‘시구문 차례’라고 했으니 ,
양반은 물론 보통 사람도 이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도성(인왕산 곡성)
1890년대 보신각
윤 치호
박영효와 윤치호
마 패
남대문(숭례문)
궁 녀
경복궁과 육조거리
숭 례문(남대문)
왼 쪽부터 영친왕.순종.고종.귀비엄씨.덕혜옹주.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 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인
고 이해선(순종의 육촌 형제, 민영 환의 사위)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 대한사진예술가협 회
구한말 고종,순종,영친왕..구한말 황실
육 상궁(毓祥宮)은 원래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봉사하는 사당이었다 .
1908년에 저경궁 · 대빈궁 · 연우궁 · 선희궁 · 경우궁이
합 사되어 6궁으로 불렸으며,
1929년에 덕안궁이 경내로 옮겨와 7궁이 되었다 .
육상궁
조 선 숙종의 비인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된 후 거처하던 곳이다 .
영조가 감고당 편액을 내렸고,
명성황후가 책봉되기 이전에 거처 하기도 하였다.
감고당(感古堂, 현 안국동 덕성여고 자리 )
전 란 등 비상시 왕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행궁이다.
북한산성 행궁
사 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
현재의 서울대학교 병원자리
경모궁의 일부
창 덕궁
경 운궁(덕수궁)
1892 창경궁과 홍화문
서울 - 천변(川邊)마을
뒤에 보이는 다리가 수표교.
서울은 지형적으로 북쪽에 산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도시 곳곳에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 이 흐르고 있었다.
그 하천들은 도심을 흘러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
도성 안을 흐르는 하천들은 청계천을 비롯하여 중학천 등이 있었다.
서울 - 청계천에서 빨래 하는 여인들
1940.01.01 일장기를 제호 위에 올리고
일황부부사진을 실은 조선일보 신년호
1907 윤치호가 쓴 애국가
이 토 히로부미(왼쪽)와 한국 주재 일본군 사령관(오른쪽)
1905.11.29 경성역 - 일본정부 칙사로 조선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
포 도청은 1895년 경무청이 설치될 때까지 조선왕조에 경찰기관이다.
1890 포 도대장
한 말 훈장과 학동들
한 말 대구 - 서문시장
한 말 서울 소공동 - 사진관
한 말 서울 - 싸전거리
한 말 인력거
1909 전주 - 신흥학교 수업 광경,
안창호가 설립한 평 양대성학교 교사와 학생들
명 성황후의 시신이 홍농 장지로 떠나기 전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기념촬영한 것이다.
1899 슬픔에 잠긴 고종황제
강 화도 초지진 포대
1876 전차에 오르는 승객들
장 춘단
장충단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순절한
훈련대 연 대장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이하
왕실을 위해 충절을 바친 여러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제사단이다.
1908년 일제 는 제사를 폐지시키고
이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었다
어 가행렬
융 희 2년(1908) 장충단에서 거행되었다.
가운데 좌우로 서있는 사람은 조희 연(趙羲淵)과 김윤식(金允植).
1908 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 희생자 추도 회
마 지막 황제 순종과 대신들
1902 고종의 칙명
원 구단 일대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짐꾼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지게로 옹기를 나르는 사람
1904년경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정공 민영환의 컬러 유리 원판 사진.
출처 : 정성길 화성테마박물관장
1904 민영환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젖을 먹이고있는 여인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출 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양반댁마님과 가마꾼
출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서당의 서동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상류층 부인을 태운 가마
출 처 :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 상류부인과 규수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빨래터에 가는 여인과 아이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10 물지게꾼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목재를 파는 소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목재를 나르는 소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에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떡 만드는 사람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오 라버니에게 심신의 아픔을 절절히 적어 보낸 명성황후의 편지 두 통.
청나 라제 예쁜 색지에는 대나무와 꽃이,
편지 봉투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다 .
1874 명성황후의 편지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돼지 팔러가는 사람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돼지 팔러가는 사람
출 처 : J.Z.Moore 1908년 National Geographic誌 7월호
기사 'Notes And Scenes From Korea'
1908~10 평양부근 - 길 옆의 칠성당 출처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서울 신사들
1908~10 서울 - 짐꾼들
출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서울 - 승려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상여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한양 - 주민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한양 - 짐꾼들
출 처 : 1910년 National Geographic誌 11월호
William W.Chapin의 기사 'Glimpses Of Korea And China'
1908~10 빨래터
1907 원구단과 황궁우
1899년에 여러 신위를 모시기 위하여
원구단의 북쪽에 지은 8각 3층의 건축물이다.
지금은 소공동 조선호텔 뒤에 있으며 ,
사적 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궁우
고 종이 1897년에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던 원구단은
1913년 일제에 의해 파괴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철도호텔(현 조선호텔)이 들어섰다.
원구단의 정자
조선 여인(우편엽서)
1903 조선여인(우편엽서
광희문(시구문) 밖
도성 동남쪽에 위치한 4소문의 하나이다.
문의 좌우 성 벽은 일제 때 헐렸다가
1975년 남쪽으로 15m 옮겨져 복원되었다 .
1892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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