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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11 일제시대 교육 흔적
  2. 2007.01.11 1900년의 삶
  3. 2007.01.11 대한매일신보
  4. 2007.01.11 근정전 근위병
2007. 1. 11. 22:26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兪吉濬)이 지은 것으로 국어 문법서 중 최초로 출판된 책이다.
이 책은 언어론과 문장론 두 편으로 되어있고 서(序)에서 우리 민족이 단합할 수 없는 것이 문장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친구 최광옥(崔光玉)이 이를 근심해 썼다는 내용이 있으나, 유길준의 저술이다

고사통(故事通)

1943년 최남선(崔南善)이 1930년<동아일보>에 연재된 「조선역사강화」를 증보하여 삼중당(三中堂)에서 단행본으로 만든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과의 관계에 관한 것은 그들의 침략을 미화하는 쪽으로 수정하였으며, 서문의 끝에 황기 2603년 성도(星島)함락기념일에 썼다는 기록이 있다.
저자의 친일 행동은 이러한 역사 인식의 한계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옆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1923년 일본어로 번역되어 조선문화 침탈을 위한 연구서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1925년도 경성제일고등 보통학교입학요강

조선어시험 답안지

1940년대의 조선어 시험답안지

글씨와 그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소학교 학생이 습자지에 쓴 글씨와 그림이다. 비틀거리는 조선 학생의 모습에서 어떤 희망도 읽을 수 없다. 이것이 당시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다.

검도 승급 증서

1938년 설립된 성남중학교의 해방전 1945년도의 검도 승급 증서이다. 일제 말기 창씨 개명하고 일본군으로 내몰렸을 당시의 흔적들이다.

졸업증서

1916년 보통학교 졸업증서, 1940년 심상고등소학교 졸업증서, 1946년 국민학교 졸업증서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와 해방직후의 졸업증서로 근대 교육의 암흑기를 걸어온 흔적들이다.

수원팔달학교

1942, 1943년도 수원팔달학교 상장과 수료증서로, 일제말기 창씨개명한 학생들의 어둠의 단편들이다.

개 근 상 장

1938년 YMCA에서 운영하던 학교에서 수여한 개근상장이다.
YMCA의 창설은 선각자들과 청년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서재필,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운동과 1899년 한국청년 150명의 기독교청년회(YMCA) 설립청원운동이 그러한 것이다.
한국YMCA는 1901년 최초의 학생YMCA로 배재학당 학생Y가 조직되고, 1903년 최초의 시청년회(City YMCA)로 황성기독교청년회가(지금의 서울YMCA) 창립되면서 역사의 표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후 한국YMCA는 이상재, 윤치호, 김정식, 남궁억 등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상동교회의 진덕기를 비롯한 평민출신의 청년 애국지사들이 가담하면서 교육 계몽, 선교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1911년 테라우찌총독 암살모의사건(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YMCA와 신민회 등 기독교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하여 1923년105인 사건과 유신회 사건 등 잇달은 일제의 탄압으로 윤치호, 김규식, 이승만 등 주요 지도력들이 투옥, 망명, 추방당하는 속에서도 한국YMCA는 1914년 4월 개성 한영서원에서 1개 시청년회(황성기독교청년회 -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강제개명)와 9개 학생Y 대표 45명이 모인 가운데 전국조직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3.1운동의 과정에서도 YMCA는 그 가교의 역할을 다하였다.

통지표

위의 것은 1937년 일제치하 보통학교의 성적통지표이다.
학업성적과 신체 상황을 기록하게 되어있고 총점,석차,출결을 별도로 기록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 현대 교육의 출발이었으니 왜곡된 교육이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병들게 만들었다

보성학교(普成學校) 운동회 엽서

보성전문학교,보성학교,보성초등학교 운동회 풍경 엽서이다.
1905년 대한제국 내장원경(內藏院卿)이었고 구국계몽 운동에 앞장섰던 이용익(李容翊 1854~1907)이 세운 학교로 현재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분 판

조선 시대 붓으로 글씨 연습을 할 때 쓰고 닦을 수 있도록 만든 판이다. 위의 것은 나무로 틀을 만들고 여러 겹 한지에 당채로 칠을 한 다름 콩 기름을 먹여 만든 글씨 연습 도구이다. 아래는 한지를 두껍게 겹으로 붙여휴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 산

글을 읽고 나서 그 읽은 횟수를 표시하기 위해 한지로 문양을 내어 만든 도구로 십진법으로 표시하도록 되어있다.

한 글

임경재, 장지영,최두선 등이 '조선어학회'를 이끌어 오면서 말과 글을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는 일의 하나로, 1927년2월10일 창간한 월간 기관지이다.
일제의 탄압으로 휴간하기도 하였으나, 1946년4월에 속간되었고, 6.25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54년에 다시 속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가 지식인 검거와 한글 운동 폐지를 위해 관련 인사들을 모두 검거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한 사건이다.
1949년 9월5일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기 까지 우리말과 글을 지키려는 정신으로,(1)1928년 한글날 제정,(2)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3)1935년 표준말 사정,(4)1941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5)1957년 큰사전 편찬 등, 우리말과 글의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음악독본

1947년 성경린(成慶麟)이 짓고, 조선아동문화협회가 발행한 조선 음악에 대한 이야기 책이다.
우리 음악의 역사, 음계, 악기, 악곡, 악보, 음악가 등을 이해하기 쉽게 간략히 그림을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조선어 표준말 모음

제40회 한글 반포 기념일인 1936년 10월28일 조선어학회에서 펴낸 표준말 어휘집이다.
이 책은 (1)같은 말, (2)비슷한 말, (3)준말과 부록으로, 한결로 처리한 말떼(語群), 한자의 전음(轉音)으로 되어 있다.
특히 사정(査定)한 어휘수는 표준어 6,231개, 약어(略語) 134개, 비표준어 3,082개, 한자어 100개 등 총 9,547개이다.
따라서 이 책은 우리말을 과학적으로 정리한 표준말의 헌법과 같은 소중한 책이다

수업료 납입 영수증

1922년 경주공립보통학교의 수업료 납입 영수증이다

초등지도(初等地圖)

1943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초등지도 교과서이다. 막바지 대동아 전쟁을 치르면서 조선은 흔적도 없고, 대륙과 동남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음흉한 속셈이 곳곳에 나타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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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11. 22:24

토담쌓기

장기두기.


널뛰기

기중기 도구


김재남: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을 이끌고 봉기함)

여자 궁도대회

장승 1903년, 장승은 이정표역할도 하고 액운을 비는 민간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마을앞 장승

키질과 체질

연자매(1900년)

돗자리 짜는 노인 1900년.


멧돌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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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11. 22:19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4년부터 국권피탈 때까지 발간되었던 일간신문이다. 1904년 2월에 일어난 노일전쟁(露日戰爭)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版) 6페이지로서 그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 ·한글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 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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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11. 22:17

근정전 근위병의 스테레오뷰 사진

1903년 미국 그레이브가 찍은 근정전의 청동 향로와 근위병의 모습이다. 외세의 눈에 비친 망국의 현장으로 바닥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화면에는 시름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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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