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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11 이왕가 사진첩
  2. 2007.01.11 부인의 외출
  3. 2007.01.11 황성신문
  4. 2007.01.11 옛 수원
2007. 1. 11. 22:10

고종

순종과 순종비

영친왕 방자비

영흥선원전(永興璿源殿)

덕수궁 대한문(德壽宮大漢門)

동경조거판어전(東京鳥居坂御殿)

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

1919년 일본 동경 반도신문사(東京半島新聞社)에서 발행한 조선 이왕가 기념 사진첩이다. 서언(敍言)에서 태조와 세종의 큰 덕을 칭송하고, 고종황제가 동양대세에 의해 일한합병한 후 훙거하여 유감이라 하고, 약력과 장례 광경을 부록으로 수록하고 있다. 위 자료는 목차에 나오는 사진으로 태조대왕 단(旦=이성계)과 고종황제 희(熙), 이왕전하 척과 이왕세자전하 은(垠)의 약력을 기록한 뒤 사진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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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11. 22:08

부인의 외출- 스테레오 뷰 사진

1904년 가마를 타고 외출을 하는 양반 댁 마님을 외국인이 촬영한 스테레오 뷰 사진이다. 갓을 쓰고 수염을 기르고 흰 바지 저고리에 짚신을 신은 하인의 모습과 부인의 표정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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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11. 22:05

황성신문 1899년 4월 5일자

1898년(광무 2) 9월 5일에 창간된 일간신문으로 남궁 억(南宮檍),나수연(羅壽淵),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유근(柳瑾) 등이 주 2회간이던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하고 일간신문으로 창간한 것이다.
국한문 혼용의 이 신문은 애국적 논필로 풍운의 한말 정국을 매섭게 비판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을 맞아 사장 장지연의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장지연이 구금되고, 신문도 정간당하였다가 수개월 만에 복간되었다. 이 신문은 고종황제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으며, 독자도 중류층 이상에 두었는데, 일본의 국권침탈로 1910년 8월 30일 《한성신문》으로 개제하여 발행하다가 동년 9월 14일 제3470호로 폐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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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11. 19:28

수원 화성 팔달문

화성(華城)은 정조(正祖) 20년(1796)에 완성된 성으로 정조 임금의 효심과 개혁의 뜻이 담긴 성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은 무엇보다도 축성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남아있어 본래의 모습을 되찿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 팔달문(八達門) 앞 상점의 모습과 2층 누각의 뜯겨진 벽이 보인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용연(龍淵)

동북각루(東北角樓)인 방화수류정과 그 아래 연못 위에 솟아오른 바위는 광교산의 일맥이 용 머리가 되어 솟은 것이라고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말하고 있다.
한국 정자를 대표할 만큼 아름다운 이 각루는 평면구조가 아닌 다각화된 형상으로 사계절 변화의 미가 지금도 독특하다.

화홍문(華弘門)

광교산에서 흐르는 개천이 성내를 관통하는 곳에 북수문과 남수문을 설치하였다.
북수문은 풍광이 아름다운 동북각루(방화수류정) 아래에 일곱 개의 아치형 석조 수문을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누각을 세웠다.
이것이 화홍문으로 방화수류정과 함께 화성(華城)내에서 가장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성벽은 장안문(長安門)과 연결되어 있다.

수원 서호천

정조(正祖)임금이 화성(華城)을 축성하면서 관개용수 공급을 위해 1799년 축만제(祝萬堤)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농업진흥청 안에 있는 서호(西湖)이다.
예전에는 경치가 아름다워 수원 팔경의 하나인 '서호낙조(西湖落照)'로 유명했다

수원지지대(遲遲臺)

정조(正祖)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顯隆園)을 바라보며 더딘 발길을 재촉하던 이 긴 고개가 지지대 고개이다.
고개 마루에는 정조의 효심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순조7년(1807)에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師國)이 쓴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이 비각 안에 있는 지지대비(遲遲臺碑)이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일제 식민지 치하 식량 수탈을 위한 농업 연구를 위한 학교를 수원에 설치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수원신사(水原神社)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 말살 정책의 하나로 일본 황실과 그 공로자들 추모하는 곳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경성지방법원수원지청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인을 탄압하기 위해 설치한 재판소이다.

화성 창룡문(華城蒼龍門)

현재는 다시 복원되었지만 이 엽서 사진은 6.25 동란 중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얕은 언덕에 옹성을 두르고 연무대(鍊武臺)와 마주하고 있는 동쪽 성문으로 장안문이나 팔달문에 비해 규모가 작다.

화성 화서문(華城華西門)

사진처럼 예전에는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가파른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서쪽문이다.
한가로이 소가 풀을 뜯는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사람들은 직접 성문 안으로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주변이 도시화되어 그 면모를 잃었다.
그 규모는 창룡문과 비슷하다

화성 연무대(華城鍊武臺)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성내를 조망할 수 있는 등성이에 건물과 조련장을 마련하였다.
앞에는 창룡문 옆으로는 동북공신돈과 연결되어 있다.

수원역

1930년대 조선 풍물 안내첩에서 수원역을 소개하는 사진이다.
전통 관청 건축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오늘날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수원역사 건축은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華城)과 더불어 이러한 면모를 보여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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