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22. 19:29

철면피 공화국

임영준

그간에 쌓은 허물이 
산성의 부실한 축대가 되었는데 
끝내 뉘우치지 않는구나 
추종하던 패거리들이 뇌물로 
국정을 함부로 농락했는데 
실소로 대충 넘어가려 하는구나 
최상의 자리에서 일말의 공경도 
끌어내지 못한 주제에 
자화자찬으로 구토만 유발케 하는 
저 철면피의 공화국에선 
민주주의를 남발하는 사이비들은 
왜 거의 모두가 하나같이 
영달의 선상에 올라서 있는 건가

송나라 때 손광헌이 지은 <복몽쇄언>이란 고사성어집에 등장하는 왕광원이란 사람은 얼마나 출세욕이 컸던지 상관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어떠한 모욕을 줘도 태연하게 웃으며 오히려 이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려는 모습을 지켜본 주변 사람들이 “광원의 낯가죽은 두껍기가 열 겹 철갑 같다”고 말하면서 ‘철면피(鐵面皮)같은 사람’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얼굴에 철판을 깐 듯 수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뻔뻔스러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철면피 같은 사람의 파렴치한 모습을 폭로하여 참모습을 밝힌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박면피(剝面皮)'는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전국시대 한나라의 대신 엄중자가 조정에서 협루라는 재상에게 면박을 당한 것에 한을 품고 섭정이라는 살인 청부업자에게 그의 암살을 의뢰하게 되었는데, 섭정이 이를 성공시킨 후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면 의뢰자인 엄중자와 단 한 명의 육친인 누나에게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해 칼로 자신의 얼굴가죽을 벗기는 장면에서 유래되었다

아무튼 이 둘의 공통점은 얼굴가죽의 두께와 뻔뻔스러움은 비례한다는 것으로, 사람의 뻔뻔스러움을 왜 얼굴가죽의 두께에 비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재미있는 비유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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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5. 22:14

[천지일보=김현진 기자] 

우리나라 최초 ‘안무가’의 사진이 공개됐다. 본지는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명예박물관장으로부터 1910년 전인 1907~1909년 사이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남장여자를 한 안무가 사진 2장을 입수했다.

사진은 남자 한복을 입고 머리에 갓을 쓴 채 다양한 동작의 안무를 하고 있는 남장여자가 익살맞은 표정을 짓고 있다. 현대 가수들의 춤의 원조가 바로 옛 안무가의 안무(춤동작)들이다. 1910년대 당시에는 무용이 인기가 많았던 반면, 안무가는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안무가들이 무용수로 전환하기도 했다.

정성길 관장은 “당시는 남자 안무가가 거의 없었지만, 남장여자는 더더욱 찾기 힘들었다. 이 같은 희귀한 상황 중에서 사진에 담긴 이 남장여자를 최초 안무가로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 관장은 “안무가는 남사당과는 다른 안무였다. 이들 안무가는 늘 그늘진 곳에서 활동해 제대로 꽃피워보지 못했지만, 오늘날 세계적 가수가 된 싸이의 안무가 나온 것도 원조 안무가의 뿌리가 있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244318&utm_medium=twitter&utm_source=twitterf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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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22. 22:26

메이지 37~38년은 러일전쟁(1904~1905) 시기다.


서지학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발굴한 <극비(極秘) 메이지(明治) 37~38년 해전사>에 의하면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 이후 러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10개년 군비증강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1898년 4월 쿠바에서 미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해군 장교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파견돼 전쟁을 참관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것은 통신과 해저케이블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세계 최고의 항해력을 자랑하던 스페인 함대가 미군이 전함에 설치한 무선 전신시설로 서로 연락해 협공하는 작전으로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키야마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무선기술을 받아들이는 게 유일한 방어책이라는 것을 깨닫고, 1899년 6월 외무대신에게 무선기술 개발과 망루 설치를 제안했다. 망루는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다. 그가 제시한 안에는 대만에서 시작해 일본과 한국에 무선 망루를 세우는 계획이 들어갔다. 이어 석 달 만에 이 안에 대한 허가가 떨어졌다. 

일본은 이후 자국의 규슈와 주 고쿠, 한국의 죽변만(울진), 울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에 망루와 통신용 해저케이블을 설치했다. 실제로 러일전쟁을 지휘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한국의 진해에서 무선 전신을 받고 지시를 내렸다. 


독도는 러시아의 동해 종단 계획과 일본의 동해 횡단 계획의 교차지점에 있다. 군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일본 군함이 독도를 여러 차례 실사했다.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의 시작점인 1904년 5월15일 중국 뤼순항 전투에서 최신예 해군 전력의 3분의 1을 상실했으나 이후 울릉도에 망루를 설치하는 방법으로 전력 부족을 보완했다. 독도 망루 설치는 1904년 9월25일 해군 군령부가 조사를 명령하면서 시작됐다. 1905년 7월25일 기공해 8월19일 준공했다.

일본이 러시아 발틱함대를 쓰시마(對馬)에서 격파한 뒤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서 동해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러일전쟁은 종결된다. 러시아 발틱함대 사령관 로세스트벤스키 중장이 중상으로 의식을 잃은 채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곳은 울릉도 서남방 약 40해리 지점이었고, 함대 지휘권을 장악한 네보가토프 소장이 주력 잔함을 이끌고 일본군에 투항한 곳도 독도 동남방 약 18해리 지점이었다.


최서면 원장은 “일본은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였고 이를 재확인하기 위해 1905년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고 주장하지만, 1899년부터 군사적 목표 아래 기지를 세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며 “독도는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된 것”이라고 말했다.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는 “아베 신조 총리 취임 이후 일본의 군사대국화 흐름에서 일본이 독도에 집착하는 현상의 이면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며 “독도 경제수역 확보로 어장과 대륙붕을 이용하려는 경제적 측면보다 군사적 측면이 독도에 집착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Posted by qlstnfp
2014. 3. 22. 22:15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의사 면허 제도를 실시한 나라는 영국으로 1858년부터이다. 국가에 의한 의사 면허 제도가 실시되기 전에는 사실상 ‘누구든지’ 의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의사 면허 제도가 한국에 처음 도입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이다.

1900년 1월2일 대한제국 내부(지금의 안전행정부)는 내부령 제27호로 ‘의사 규칙(醫士規則)’을 제정했다. 이 법령에는 의사, 한의사가 구분되어 있지 않으며 정부(내부)가 자격 있다고 인정한 사람에게 똑같이 ‘의사(醫士) 인허장’을 부여했다. 


대한제국 시기 정부로부터 면허를 받은 의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조선총독부 통계요람>(1911년 11월 발행)에 의하면 일제강점 직전인 1909년 12월말 현재 등록된 한국인 의사 수는 2659명이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요즈음 식으로 말해 한의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근대서양식 의사와 전통 의료인을 구분하고 차별하게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11월15일 ‘의사 규칙’, ‘의생 규칙’을 제정하고 1914년 1월1일부터 시행했다. 이로써 전통 의료인은 의사(醫師)가 아닌 의생(醫生)으로 격하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 면허 의사 수는 1911년 479명, 1912년 72명으로 급감했다. (전통)의사들은 나라와 면허를 함께 빼앗긴 것이다.


의생 규칙이 시행된 지 1년 뒤인 1914년 말 당국에 등록된 의생 수는 5827명이었는데 해방 직전인 1943년에는 3337명으로 30년 사이에 40% 이상 감소했다. 1914년 이후로는 새로운 의생 면허를 거의 발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고서도 여전히 의생으로 불리던 전통 의료인은 1951년 ‘국민의료법’이 제정되면서 40년 만에 (한)의사 호칭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1년 법 제정 당시 한의사(漢醫師)이던 호칭이 1986년 ‘의료법’이 개정되면서 한의사(韓醫師)로 바뀌었다.



최초의 근대서양식 한국인 의사는 국내가 아니라 외국에서 탄생했다.  두 사람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서재필(徐載弼·1864~1951)은 1890년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얻고 1892년 컬럼비안 의과대학(3년제)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95년 말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조선에 머문 2년 반 동안 중추원 고문으로 활동했으나 의사로 활동한 적은 없었다. 


두번째 인물인 김익남(金益南·1870~1937)은 

갑오개혁 정부의 학부(교육부)가 실시한 일본 유학시험에 합격후 도일해서 1899년 7월 도쿄 지케이(의원) 의학교(4년제)를 졸업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는 최초로 근대식 정규 의학교육을 받고 의사가 된 것이다.



 1년 동안 모교인 지케이의원에서 당직의사(인턴/레지던트 격)로 근무한 뒤 귀국해서 조선 정부가 갓 설립된 조선병원(朝鮮病院) 의학교의 교관이되었다. 교장 지석영이 의학교의 정신적 지주였다면, 김익남은 직접 교육을 맡은 의사 양성의 산파였다. 그리하여 1902년 7월4일, 한국 역사상 최초로 방한숙, 유병필, 김교준 등 근대식 의사 19명이, 이어서 1903년에는 13명이 배출되었다.


김익남은 일제의 중요한 이용 대상이었지만 일제에 포섭되거나 협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1907년 6월 이토 히로부미 암살 기도가 실패하자 자결한 정재홍을 추모하는 등 일제의 눈에 벗어난 행동은 뚜렷했다. 따라서 김익남이, 일제가 한국 의료계를 장악하기 위해 1908년부터 부여하기 시작한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못했다.


http://m.khan.co.kr/view.html?category=1&med_id=khan&artid=201403212021105&code=210100



최초의 근대 의사 김익남, 그의 진짜 정체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6264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