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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8 지방자치의 시작
- 2015.10.26 1985년 첫 이산가족 만남
- 2015.10.15 前車覆 後車戒 (5)
- 2015.10.05 1905년 해강 김규진이 촬영한 고종의 사진
1949 지방자치법 공포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60906.22005213620
1952 첫 지방의회 선거
http://www.ehistory.go.kr/page/pop/photo_pop.jsp?photo_PhotoSrcGBN=BK&photo_PhotoID=2&detl_PhotoDTL=309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0/27/0200000000AKR20151027013800004.HTML
http://www.ptlnews.kr/bbs/board.php?bo_table=news01&wr_id=100956
http://www.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68391
1991년 부산시의원 선거 합동유세
http://pictorial.hani.co.kr/slide.hani?sec1=099&sec2=001&sec3=113&seq=0&_fr=mt4
2008 서울 교육감
http://heartone.tistory.com/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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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bs.co.kr/news/view.do?ncd=3170277
60여 년 동안 생이별했던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가기록원이 1985년 첫 이산가족 상봉 행사 사진 89점을 언론에 공개했다.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진행된 30년 전 첫 상봉에서는 65가족, 총 157명이 헤어진 가족을 만났다.
대부분 여든 살이 넘는 올해 상봉 대상자들에 비해 30년 전 사진 속 주인공들은 훨씬 더 젊다. 옷차림에서는 세월의 흐름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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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gye.com/list.jsp?seriesId=1000096&page=5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끝까지 남에게 뒤지게 마련이다. 스스로 일가를 이뤄야 비로소 참다운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隨人作計終後人 自成一家始逼眞)
-중국 송나라의 학자이자 시인인 황정견의 이우군서수종증구십사(以右軍書數種贈丘十四)
하늘과 땅은 잠시도 머물 수 없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것이기에, 옛것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天地不可留 故動 化故從新)
-춘추시대 명재상 ‘관자’
청렴한 공직자를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그가 지나는 곳의 자연만물이 모두 맑은 빛을 입기 때문이다(所貴乎廉吏者 其所過山林泉石 悉被淸光)
-‘만세의 청백리’ 다산
사람들이 민둥산을 보고 나무가 자란 적이 없다고 여기지만 어찌 산의 본성이 이런 것이겠는가(人見其濯濯也 以爲未嘗有材焉 此豈山之性也哉). 만약 자양분을 얻는다면 자라지 않는 사물이 없고 자양을 잃으면 소멸하지 않는 사물은 없다(苟得其養 無物不長 苟失其養 無物不消)
천지에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夫物之不齊 物之情也)
힘에 의존하는 나라의 백성들은 잠시 환희에 차 있지만, 인의에 바탕한 나라의 백성은 밝고 화평하다(覇者之民 驩虞如也 王者之民 皞皞如也)- 맹자
사람 간 차이는 있으나 차별은 하지 말아야 한다(有差無別)
천지가 넓어 고루 생육하고 만물만사 많아도 하나로 다스려진다
(天弘地廣化均隆 物衆人多治一通)-장자
잘 훈련된 장병이 무기를 준비해 적을 기다리며, 신묘한 공격과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필승의 작전을 펴는 지혜로운 장수와 군대는 크게 이긴다(鍊武磨矛待敵兵 神攻妙勝無知跡 智將强軍有大成)-‘손자병법’
천하를 다스리는 이는 법도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니(天下從事者 不可以無法儀) 법도가 없으면서 그의 일을 이룩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無法儀而其事能成者無有也)-‘묵자’
악행은 꿀처럼 달콤하다. 그러나 악행이 무르익으면 죄과를 받아 재앙을 당하게 된다(過罪未熟 至其熟時 自受大罪)-불교 ‘법구경’
군자는 정의에 밝지만 소인배는 이익에 밝다(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 행동하면 원망을 많이 산다(放於利而行 多怨)-공자는 ‘논어’에서
이익에 눈이 멀면 지혜를 어둡게 한다(利令智昏)- 사마천 ‘사기’에서
나라를 유지하는 데는 예의염치(禮義廉恥) 즉 예의, 정의, 청렴, 염치 등 네 기둥(四維)이 필요하다,
예의는 절제를 넘어서게 하지 않고, 의로움은 혼자 나가는 게 아니며, 청렴은 자기 잘못을 감추지 않는 것이고, 부끄러움은 잘못된 바를 따르지 않는다(禮不逾節 義不自進 廉不蔽惡 恥不從枉)-춘추시대 ‘관자’ 목민(牧民) 편에서
나무가 부러지는 것은 반드시 벌레가 파먹었기 때문이고,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반드시 틈이 생겼기 때문”이라며 “사사로운 의리, 곧 부정부패가 횡행하면 나라는 혼란해지고, 공의가 행해지면 나라는 강대해진다(私義行則亂 公義行則治)-한비(韓非)의 저서 ‘한비자’ 망징(亡徵) 편에서
군자는 반드시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가고 경계해야 한다(君子必愼其獨也)
군자는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고(戒愼乎 其所不睹), 들리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두려워해야 한다(恐懼乎 其所不聞)
숨겨져 있는 것보다 더 잘 보이는 것은 없고(莫見乎隱), 아주 작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莫顯乎微)-‘중용’
잘못된 관례는 굳은 의지로써 고치려 노력하고, 혹 고치기 어려운 게 있으면 나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凡謬例之沿襲者 刻意矯革 或其難革者 我則勿犯)-정다산의 ‘목민심서’
성인이 펼치는 정치의 방도는 논의의 명분을 바로 세우는 일(聖人治道正論名)
개인 이득을 위한 사사로운 법을 폐지하고 공의로운 법을 제정해 공평함을 나타내야 한다(廢私立法示公平)-한비자
중용에 가까워지려면 부지런히 일하고 겸손하며 삼가고 경계해야 한다(庶幾中庸 勞謙謹勅)- ‘중용(中庸)’
지인지감(知人之鑑)-.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는 감식력
어진 이를 밀어주고 능력 있는 이에게 관직을 양보하면 모든 이들이 화합할 수 있다(推賢讓能 庶官乃和)- 주나라 성왕
도리에 따라 간언함으로써 군주를 변화시켜야 한다(忠諫化君)
직언으로 보필하는 신하는 군주의 보물이지만, 벼슬을 지키려 아첨하는 자는 국가의 도적이다(輔行諫止爲君寶 貪祿阿諛同賊蚤)- ‘순자’
http://www.huffingtonpost.kr/2015/10/05/story_n_8242448.html?1444022135&ncid=tweetlnkushpmg00000067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지난 4월 미국 뉴어크박물관(Newark Museum)에서 한국 문화재를 조사하던 중 1905년 해강 김규진이 촬영해 미국 외교사절에 선물한 고종의 사진을 찾아냈다고 5일 밝혔다.
사진의 크기는 가로 22.9㎝, 세로 33㎝이며
한편에 '대한황제진 광무구년 재경운궁'(大韓皇帝眞 光武九年 在慶運宮)과 '김규진조상'(金圭鎭照相)이라는 글씨가 인쇄돼 있다.
광무구년은 1905년, 경운궁은 오늘날의 덕수궁을 뜻한다. 구체적인 촬영 장소는 초상사진의 바닥 타일을 통해 궁내 중명전 1층 복도로 추정된다.
특히 흑백사진으로 인화한 뒤 황제의 복식인 노란색 황룡포와 보라색 익선관 등 일부를 채색한 점이 독특하다. 재단 측은 이처럼 채색된 고종 사진은 미국 워싱턴 프리어 새클러 미술관이 소장한 사진을 포함해 두 점뿐이라고 설명했다.
고종은 1905년 미국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아시아를 순회하던 사절단을 만나 미국 재벌인 에드워드 해리먼에게 이 사진을 건넸고, 해리먼의 부인이 1934년 뉴어크박물관에 기증했다.
하지만 미국 사절단은 한국 방문에 앞서 일본에서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상호 인정하기로 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첼결한 상태였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는 "일본의 압박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고종은 여러 열강으로부터 도움을 얻고자 했다"면서 "밀약을 몰랐던 고종은 미국의 힘을 빌리고자 사절단을 극진히 대접하고 사진을 선물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사진을 찍은 김규진은 대한제국 황실의 사진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졌으나, 남아 있는 황실 관련 작품이 없었다. 그는 1907년부터 천연당사진관을 운영했고, 1909년에는 매천 황현의 초상사진을 촬영했다.
한편 뉴어크박물관 조사에서는 고종 초상사진 외에도 구성품이 완전하게 남은 고급 갑주(甲胄) 일괄품과 조선 후기 화원화가인 석연 양기훈의 노안도(蘆雁圖) 두 폭도 확인됐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장진성 서울대 교수는 "고종 초상사진은 여러 점이 전하지만, 뉴어크박물관 소장본은 연대와 작가가 함께 기록된 유일한 예"라면서 "미술사적 가치를 넘어 격동하던 한국 근대사의 양상을 알려주는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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