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45'에 해당되는 글 135건

  1. 2007.01.09 일제하의 공산주의
  2. 2007.01.09 일제강점기
  3. 2007.01.09 서울남산의 일본신사
  4. 2007.01.09 대한민국 임시정부
2007. 1. 9. 21:33
원산총파업(1929.1-4)
(한길사,한국사-15, 1994, 40)
오른쪽 - 원산부도노동자 대파업 광경.
왼쪽 - 원산노동연합위원장의 수감기사를 실은 {조선일보} 1929년 2월 11일자 기사.
1929년 1월에서 4월에 걸쳐 원산의 노동자 3천여명이 군대와 경찰의 탄압을 둟고 3개월에 이르는 동맹파업을 감행하였다.
한 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의 횡포에 대한 규탄으로 발단된 이 동맹파업은,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 등의 요구를 내걸고, 원산 시민들까지 가담한 투쟁이 되었다. 소련, 중국, 프랑스의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도 받았다.
을밀대에서 농성하는 강주룡(1931)
(역사학연구소, 우리역사를 찾아서 3, 심지, 1994, 119)
1931년 5월 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은 회사 쪽의 일방적인 임금인하 통고에 대응하여 파업을 시작하였다. 5월 28일 노동자들은 단식투쟁을 결의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폭력에 의해 회사 밖으로 쫓겨났다. 밤 11시, 회사에서 쫓겨난 강주룡은 밤새 광목을 마련하였다. 광목을 찢어 줄을 만들고 을밀대 누각에 던져 걸치고 줄타기를 해서 12미터 높이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농성을 시작하였다. 그는 일제가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착취와 수탈을 고발하면서 9시간 반 동안이나 외치고 외쳤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76시간 동안 단식으로 대항하다 검속기간 만료로 일단 풀려났다. 평원공장 파업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를 때 평양서는 '정달헌 중심의 당조직사건'을 발표하고, 강주룡은 6월 9일 동료 노동자 최용덕과 함께 검거되었다. 강주룡은 또 다시 옥중단식을 벌인 뒤 '극심한 정신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보석되었다가 8월 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졌다.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경남 적색교원노동협의회사건(1933)
(최인진, 한국신문사진사, 열화당, 1992, 193)
경남 적색교원노동협의회 사건에 관한 {동아일보} 1933년 12월 12일자 본지 부재록(不再錄) 호외. 적색교원노동협의회 사건으로 검찰에 송치된 열아홉 명의 인물사진을 전부 삭제했다. 많은 인물사진을 삭제한 경우의 하나이다.
브나로드 운동
(한길사,한국사-15, 1994, 43)
민족주의 우파 계열이었던 동아일보는 1931년 7월부터 방학을 이용하여 '문맹'과 '비위생적인 상태'에 있는 농민을 계몽한다는 목표로 '배우자, 가르키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했다. 브나로드운동은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혁명적 농민운동
(한길사,한국사-15, 1994, 44)
함경도 단천과 명천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보도한 신문기사.
해방전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들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중간 사진)
1930년대 초.중반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한 해방전후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들.
왼쪽부터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신화적 인물인 이재유, 경성콩그룹.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의 지도자 박헌영, 해방직후 초기 북한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 현준혁,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허헌, 남로당의 2인자 이승엽.
이재유
(김경일, 이재유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3)
이재유의 체포를 대서특필한 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
간도공산당 사건(1938)
(전민조, 이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7, 문치장 촬영)
1938년 12월 20일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압송되는 사회주의자들. 경성지방법원 대법정 앞. 하나같이 머리에 용수가 씌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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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9. 04:39
일본식 한국 문화 교육 현장

▲ 일본식 한국문화 교육
일본어로 한국 부채춤을 설명하고 있다. 일제는 한국문화의 원류가 일본이라며 교육을 통해 일종의 ‘의식화’를 꾀했다. 일제는 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우리 고유의 가락을 SP음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1937)

-조선일보 2004.2. 26-

창씨개명 강요 현장


▲ 창씨개명 독려
한국인의 성명에 관한 특명을 발표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개명하라고 강요했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장려하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했다. 사진은 서울 남대문역에서 창씨개명을 한 노인들에게 무료로 열차여행을 시켜주는 모습. 천막을 치고 창씨개명을 확인하는 일본관리들과 한복을 입은 조선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각종 불이익을 준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편지발송, 소송, 학교입학, 식량배급 등 생활전반에 걸쳐 이름을 바꾸지 않은 조선인들에게 불이익을 가했다.

-조선일보 2004.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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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9. 04:23
서울 남산의 일본신사


일제강점기 서울 남산에 세워진 일본 신사(현재의 남산 식물원)에서 내려다본 1930년대 서울 시내 모습. 사진 제공 정성길 씨.
200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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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9. 04:21
대한민국 임시정부

▲ 7인의 국무위원 임정이 항주를 떠나기 직전인 1935년 11월 선임된 새 국무위원들. 앞줄 왼쪽부터 조완구·이동녕·이시영, 뒷줄 왼쪽부터 송병조·김구·조성환·차이석.


▲ 이동녕 장례식 1940년 3월 임정이 기강에 있을 때 별세한 이동녕의 장례식 모습. 이동녕은 1920~30년대 임정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으며 김구의 후견인이었다.


▲ 윤봉길 의거 현장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 공원)의 윤봉길 의거 현장에 세운 "매원". 안쪽으로 기념비가 보인다. 이선민 기자.


▲ 임정이 설립한 인성학교의 교사와 학생들. 상해 지역 민족교육의 중심이었던 인성학교는 1935년 일제와 친일 한인의 압력으로 문을 닫았다.


▲ 신규식 선생 상해 한인사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신규식(왼쪽). 그가 묻혔던 상해 외국인 묘지에는 묘지석이 남아 있다.


▲ 주석·부주석제를 도입하고 체제를 확대 정비한 1944년 4월 임시의정원 제36차 회의가 끝난 뒤 발표한 선언문.



▲ 김구와 'OSS 책임자' 도너번.1945년 8월 초 광복군의 국내진입 작전을 합의하고 나오는 임정 주석 김구와 OSS 총책임자 도너번 장군.


▲ 광복 후 1·2진으로 나눠 귀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12월 3일 서울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구이고, 그 오른쪽에 김규식·조소앙이 차례로 보인다. /독립기념관 제공



▲ 45년 12월 19일 '임정 개선 환영대회' 1945년 12월 19일 열린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로 나뉘어 귀국했다/백범기념관 제공



▲ 임정이 4월 11일 수립 기념식을거행했음을 보여주는‘한민(韓民)’제13호(1938년 4월 30일 발행).

-2005.5.4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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