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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0.12.29 문예봉
  3. 2010.12.29 나혜석
  4. 2010.12.27 안창호(安昌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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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0. 12. 29. 13:35

1960년대의 문희, 남정임, 윤정희 그리고 70년대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처럼 이른바 여배우 트로이카는 30년대에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김소영, 김신재 그리고 문예봉(왼쪽)이다.



김소영이 세련된 미모로 여성적 매력을 발산했다면, 김신재는 순수하고 가녀린 조선 소녀의 표상이었고, 문예봉은 동양적인 미모로 가련한 식민지 여성을 대변했다. 셋의 공통점을 들라면 본격적인 ‘영화’ 배우 즉 무대보다는 스크린을 통해 사랑받은 배우라는 점이다. 이 중 발성영화 시대 최고의 스타를 뽑으라면 단연 문예봉이다.




1917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난 문예봉의 본명은 문정원이다. 12살에 어머니를 여읜 후 배우였던 아버지 문수일을 따라 극단에 들어갔고, 이듬해부터 아역으로 무대에 섰다고 한다. 문예봉이 처음 스크린에 출연한 것은 1932년 이규환의 데뷔작 <임자없는 나룻배>를 통해서였다. 나운규가 맡은 뱃사공 춘삼의 딸로 분하며 일약 ‘조선영화의 샛별’이 되었는데, 관객의 뇌리에 가여운 식민지 여성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도 이 작품으로부터 시작됐다.



문예봉이 최고의 스타로 등극하게 된 계기는 조선의 첫 발성영화 <춘향전>(1935년)을 통해서다. 영화의 흥행 성공 덕분에 조선영화계 역시 토키 시대로 안착할 수 있었다. 이후 문예봉은 <아리랑>(1926년)을 잇는 걸작으로 평가받은 이규환의 <나그네>(1937년)에 출연하며 일제식 근대화에 유린당하는 조선 여성의 이미지를 이어나간다. ‘삼천만의 연인’으로 불렸던 문예봉은 서구의 마를린 디트리히, 일본의 이리에 다카코, 만주의 이향란에 비견되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로 우뚝 섰다.


현재 문예봉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모두 5편. <군용열차>(1938년), <조선해협>(1943년), <미몽>(1936년), <집없는 천사>(1941년).






해방이 되자 문예봉은 조선영화동맹 위원으로 활동하다 1948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극작가인 남편 임선규를 따라 월북했고, 북한 최초의 극영화 <내고향>(1949년)을 시작으로 ‘인민 배우’로 살았다. 그녀는 일제하 조선 그리고 북한에서 프로파간다 아이콘이었지만, 동시에 스크린의 여신이기도 했다.


http://m.enha.kr/wiki/%EB%AC%B8%EC%98%88%EB%B4%89

http://extmovie.com/zbxe/hreview/288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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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0. 12. 29. 12:54

1948년 12월 10일, 서울 시립남부병원(당시 시립 자제원)의 한 병동에 50대로 보이는 한 행려병자의 주검이 누워 있었다. 성명 미상의 이 여인이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기록된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1896-1948)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배고프면 밥 먹는다’ ‘겨울은 춥다’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질문의 의도가 의심스럽지는 않은가? 100년 전 정월 나혜석(1896~1948)이 외친 이 명제는 당시에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신여성’ ‘최초의 여성 소설가’ ‘최초의 여성 세계여행자’ ‘독립운동가’ 등 무수한 타이틀을 동시에 따낸 ‘원조 여성운동가’다. 일거수일투족이 신문의 취잿거리가 되던 ‘스타급 연예인’이었다. 자유연애로 결혼하고 또다른 연애로 결혼이 깨진다. 이혼 뒤 발표했다는 ‘이혼 고백장’의 한 토막. “남자와 여자는 권리가 동등하다. 남자들은 예사로 첩을 들이면서 여자들에게만 외간 남자를 사귀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불평등하다.” ‘재산분할 요구’도 감행한다. “그동안 함께 이룬 가정의 재산은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만약 이혼을 한다면 재산도 나눠야 마땅하다.” 앞서도 너무 앞서간 행동들이 1930년대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천하의 나혜석’도 인생의 마감은 참으로 비참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뜨거운 예술혼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빛이 바랬고, 그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모습은 거리에 쓰러져 있는 신원미상의 떠돌이였다고 한다. 시대가 용서치 않았던 탓일까.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74404.html



근대 여류 서양화가. 호는 정월(晶月), 수원 출신이다. 1914년 도일하여 동경여자전문학교 미술과를 졸업.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가 되었다. 1920년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1회부터 5회까지 출품해 입선을 하였으며, 1921년에는 개인전도 열었다. 1926년 남편과 3년간 세계일주를 하며 이때 그린 정원화(庭園畫)가 동경 이과전(二科展)에서 입선하였다.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능도 보였으며 선각자적인 활동을 하였다. 『중국인 촌』, 『스페인 해수욕장』 등과 같은 작품을 남겼고 1974년에는 회고전이 열려 새로운 평가를 받음.


나혜석에 관한 글들

http://kr.blog.yahoo.com/han1592/983327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liberum&folder=47&list_id=1095037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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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0. 12. 27. 13:31

안창호(安昌浩)에 대하여



1878년(고종 15)∼1938년. 독립운동가·교육자.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도산(島山). 평안남도 강서 출신.

1. 어린 시절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5년 언더우드(Underwood, H. 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2. 독립협회 가입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때 평양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감사 조민희(趙民熙)와 수백군중이 모인 가운데 18조목의 쾌재(快哉)와 18조목의 부재(不哉)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 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점진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기른다는 교육목표를 설정하였으며, 초등과정의 남녀공학-를 설립.


독립협회 회원들과 안창호(중앙)


3. 미국에서

190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 야학을 개설,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공립신보 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


1902년 발행 대한제국 안창호 여권 여권번호 51번



공립신보



리버사이드 한국학교에서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듬해에 귀국.


4. 신민회 조직과 애국계몽운동

1907년에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다.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회관(太極會館)을 건립하였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


대성학교 일장기 거부로 1912년 폐교


또한, 1909년에는 박중화(朴重華)·최남선(崔南善)·김좌진(金佐鎭)·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伊藤博文)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피체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하였으며, 이에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신한민보 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913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흥사단을 창설

.

1916년LA의 흥사단 단소 겸 안창호의 살림집의 흥사단원들,
(이 집은 디즈니 콘서트 홀에서 사쪽으러 1불락 서쪽, 지금은 DWP의 주차장이 되었음)


멕시코 메리다의 한국학교 방문 1918년

멕시코의 국민회 임원들과 안창호, 1918년

멕시코 메리다의 흥사단 단우들



5. 상해임시정부 가담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聯通制)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

상해 임정의 요원들 1919년, 중앙에 안창호가 보인다.

상해 임정 요원들과 안창호 (중앙 흰옷), 1919년


1919 상해 임정 요인들, 앞줄 좌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멕시코 탐피고 국민회 지방회에 보낸 편지, 1919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부의장에 취임.


1924년에는 난징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였다.


6. 흥사단 조직과 이상촌 건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


1925년 LA에서 서재필과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1928년 상해에서 이동녕·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

안창호가 필립핀 방문 원주민과 기념찰영,1929년


3남 필영은 임신 중 안창호가 원동으로 떠나기 전 가족사진,
가족과 찍은 마지막 사진, 1926년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가는 안창호


1932년 안창호가 상해에서 체포된 뒤 부인에게 보낸 편지

7. 실형선고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감옥과 대전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6개월 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大寶山) 송태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중, 같은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죽었다.

안창호의 망우리 묘지를 참배하는 안창호의 조카딸 안맥결과 고향 친구인 김만식 (좌측), 1965년

1938년 순국한 안창호의 장례식에도 못가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이 집권하여 귀국을 못하다가
1963년 박정희의 초청으로 처음 환국한 이혜련과 유복자 필영(Ralph)이 망우리의 묘를 참배하고 안창호에게 주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1963년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중장을 받았다. 죽은 뒤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1973년 11월 미국에 있던 부인 김혜련(金惠鍊)의 유해와 함께 도산공원(島山公園)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1973년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이 합장한 서울 도산공원

8. 교육사상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로 연결되며, 자기개조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무실역행을 강조하였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이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무실은 개조의 내용이고 역행은 그것의 행동으로, 무실과 역행이 없이는 자기개조가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개개인의 인격혁명으로서의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이며 자기개조가 곧 민족개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는 주인정신(主人精神)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성학교의 교훈을 주인정신으로 설정한 것도, 주체·독립·책임을 의미하는 주인정신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자기개조와 민족개조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두었다. 이것은 곧 설립자인 안창호의 교육이념이었다.


또한, 흥사단 창립 당시의 약법(約法)에 표시된 단(團)의 설립목적 조문을 보면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층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고 덕·체·지 삼육(三育)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육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이라.”고 하여, 정의돈수를 통하여 인격을 육성한다는 교육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교육방법상의 원리로는 성실성과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근본원리 및 인간이 믿고 의지해야 할 진리의 등불은 곧 성실이라 하였으며, 거짓없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정성과 진실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실이야말로 자아혁신과 민족개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적 원리라 보았다.


또한, 그는 공부하는 정신과 태도로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점진공부는 학문과 실천의 기본적인 태도로서, 자신의 생활은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여 향상을 기하자는 것으로 이는 성실성과 함께 주요한 교육방법의 원리가 된다.

글은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78_1_0006940


사진은http://www.koamhistory.com/home/bbs/board.php?bo_table=Pictorial_History&wr_id=195

도산 기념 사업회 http://www.ahnchangho.or.kr/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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