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2. 29. 12:54

1948년 12월 10일, 서울 시립남부병원(당시 시립 자제원)의 한 병동에 50대로 보이는 한 행려병자의 주검이 누워 있었다. 성명 미상의 이 여인이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기록된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1896-1948)이다.

“여자도 사람이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배고프면 밥 먹는다’ ‘겨울은 춥다’처럼 너무나 당연해서 질문의 의도가 의심스럽지는 않은가? 100년 전 정월 나혜석(1896~1948)이 외친 이 명제는 당시에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신여성’ ‘최초의 여성 소설가’ ‘최초의 여성 세계여행자’ ‘독립운동가’ 등 무수한 타이틀을 동시에 따낸 ‘원조 여성운동가’다. 일거수일투족이 신문의 취잿거리가 되던 ‘스타급 연예인’이었다. 자유연애로 결혼하고 또다른 연애로 결혼이 깨진다. 이혼 뒤 발표했다는 ‘이혼 고백장’의 한 토막. “남자와 여자는 권리가 동등하다. 남자들은 예사로 첩을 들이면서 여자들에게만 외간 남자를 사귀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불평등하다.” ‘재산분할 요구’도 감행한다. “그동안 함께 이룬 가정의 재산은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만약 이혼을 한다면 재산도 나눠야 마땅하다.” 앞서도 너무 앞서간 행동들이 1930년대 사람들의 공감을 사는 건 무리였을 것이다. ‘천하의 나혜석’도 인생의 마감은 참으로 비참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뜨거운 예술혼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빛이 바랬고, 그가 마지막으로 발견된 모습은 거리에 쓰러져 있는 신원미상의 떠돌이였다고 한다. 시대가 용서치 않았던 탓일까.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74404.html



근대 여류 서양화가. 호는 정월(晶月), 수원 출신이다. 1914년 도일하여 동경여자전문학교 미술과를 졸업.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가 되었다. 1920년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 1회부터 5회까지 출품해 입선을 하였으며, 1921년에는 개인전도 열었다. 1926년 남편과 3년간 세계일주를 하며 이때 그린 정원화(庭園畫)가 동경 이과전(二科展)에서 입선하였다.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도 발표하여 문학적 재능도 보였으며 선각자적인 활동을 하였다. 『중국인 촌』, 『스페인 해수욕장』 등과 같은 작품을 남겼고 1974년에는 회고전이 열려 새로운 평가를 받음.


나혜석에 관한 글들

http://kr.blog.yahoo.com/han1592/983327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liberum&folder=47&list_id=1095037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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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