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45'에 해당되는 글 135건

  1. 2011.01.01 근대 기생문화 1
  2. 2011.01.01 의암 손병희 부인 주옥경(朱鈺卿:)
  3. 2010.12.31 기생
  4. 2010.12.29 남대문로
2011. 1. 1. 15:38

근대 기생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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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생이란?



기생이라고 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득한 옛날, 섬섬옥수, 고운 얼굴에 비단옷과 화려한 비녀를 꽂고 은근한 분내 풍기며 사대부들과 어울려 시(時)를 짓고 가야금을 뜯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달빛 받은 대나무와 난(蘭) 그림자를 뒤로 하고 함께 잠자리에 드는 낭만적인 풍경까지일 것이다.

망릉 알아 듣는 꽃, 기생


기생의 이미지는 한국인에게 상당히 친숙한 것이지만, 기생이 왜, 언제부터 생겼으며 실제로 언제까지 존재했는지의 경계도 우리는 애매모호하게 알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는 기생과 조선시대의 매춘을 종종 혼동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기생은 결혼, 정절, 순결, 간통, 매춘이란 사회적 요소와 함께 좁게는 남녀의 연애, 재미, 즐거움, 인간의 성욕 등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속성이 있다. 하지만 기생을 성과 관련된 이미지로 좁혀 생각하다 보니 그들이 실제로 전통사회에서 유일한 여성 문학과 전통 예술을 계승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쉽게 관과되고 만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생은 언제부터 생겼는가?



그 생성에 관해 확실한 기록은 없고 몇 가지 기원설이 있지만, 대략 삼국시대에 이미 형성되었으며 무녀를 그 시원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벽화의, 종교적 색채를 띠고 가무를 하는 예인 집단들도 기생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화랑 김유신이 천관이라는 기생집에 자주 드나득다가 어미니의 훈계를 듣고 발을 끊으려고 했지만, 말이 술 취한 주인을 등에 업고 습관처럼 천관의 집으로 찾아가자 단호하게 말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는 유명한 일화에도 기생이 나타나 있다.




기생 제도가 틀이 잡힌 것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종 정치 제도와 사교적인 연회에서 예인들이 동원된 때문이다. 이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이들의 재능이나 성격, 인격의 고매함까지 키우는 매우 엄격한 교육을 관장했고, 기생은 점차 품격 있는 종합 예술인으로 격상되었다.


조선시대 기생은 국가에 소속된 기녀, 즉 관기 신분에 속한다. 서울과 지방에 있었는데 서울의 관기들은 장악원이란 기관 소속으로 지방 기생들에 비해 기예가 우수했고, 궁중연회의 가무가 주업이었으며 정원은 백 명이었다.




지방의 관기는 관청마다 15~30인 정도로 수가 많았고 주로 관리들의 수청을 들었다. 관기들이 명부에 오르는 나이는 15세쯤이었고, 그때부터 기녀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언어, 동작, 음률, 무도, 서화 등을 익혔다. 기녀 교육을 받는 기간은 15세부터 20세. 이때부터 가혹할 정도로 매를 맞아가며 교육을 터득했다. 일반 기녀들은 관기보다 하류였지만 이들 가운데 인물이 좋고 가무가 뛰어나면 간혹 사대부의 첩으로 발탁되어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극히 드문 일이었지만.


양반 사대부의 동반자


기생은 근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쇠퇴기를 맞는다. 기생들이 기생조합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구한말 생긴 제도인 1패(이전의 관기로 상층 기생), 2패, 3패 기생 간의 경계선마저 무너지고 기생과 창기가 혼용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에 매춘 제도가 생긴 것도 이때부터인데 기생의 이미지는 종합예술인에서부터 천한 매춘녀로 왜곡, 폄하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는 한번 결혼하면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백년해로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사회였다. 특히 여자들은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라는 교육을 받았다. 조선 중기까지는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부모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중기 이후부터 남존여비 사상이 두드러져 여성의 정절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역으로 조선시대 각종 간통 사건 중 가장 흔한 것이 유부녀의 간통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다른 나라에 존재하던 매춘을 일체 금지했었다. 물론 음성적인 매춘 및 간음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사회에서 기생과의 관계는 면죄부가 아니었다. 속성상 기녀들은 지배층의 구조 속에서도 제도권 내에서만 매춘을 행하였으나 남발하면 손가락질을 받았고, 그 외의 매춘은 유녀(조선 후기에는 창녀라 불림)라 불리는, 정조를 잃고 오갈 데 없는 여인들이나 천민 여종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매춘 행위가 발각되면 노비가 되어야 한다. 기생은 양반사대부의 동반자였지만 기녀에게 수청이 아닌 강간을 해선 안 되고 상중이나 국가 위급시 기녀와 어울리면 탄핵을 받았다. 관리가 기생에게 너무 빠져도 탄핵을 받았다. 기생과 간통하였다가 귀양 가고 파면되는 일은 유교 윤리를 앞세웠던 조선조 내내 끊이지 않는 일이었다.


2. 권번


가. 권번이란?


권번은 일제시대에 기생들의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을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에는 원래 관기제도 외에는 공창제도라는 것이 없었으나, 한일합병 후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의 일본식 유곽제도를 1916년 3월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공창제도로 공포했다. 그 이후 기생도 허가제가 되어 권번에 기적을 두고 세금을 내게 했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화대를 받아주는 중간역할을 담당했다.


권번의 효시는 1900년대 초기에 생겨난 기생조합에 찾을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생긴 기생조합은 한성기생조합이다. 한성기생조합은 관에 속해 있었던 조선시대의 관기(官妓)가 해체되던 즈음에 이루어졌다. 관기는 1907년부터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1908년 9월에는 장례원에서 관리하던 기생들을 경시청에서 관리하고 기생들에게 자유엉업을 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되게 된다. 이러한 관기제도의 폐지에 불만을 품은 기부(妓夫)들은 기부(妓夫) 있는 기녀, 즉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서 조합을 조직하게 되는데, 이것이 한성기생조합이었다. 한성기생조합은 1908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09년 4월 1일자 <황성신문>에서이다. 관련된 신문기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기생조합성립], 박한영 등 30여인이 발기하여 한성 내 기생영업을 조합하여 풍속을 개량하기로 목적하고 규칙을 제정하여 경청(警廳)에 청원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8년 10월 27일)



[자선연주회]. 문천군 기근을 위하여 한성기생조합소에서 음력 윤달 11일로 한 10 일 연주회를 원각사에서 열어 다소간 기부를 바라니, 원각사의 성의 또한 감사하여 이로써 알려드리니 모든 군자는 왕립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기생조합소 백.황성신문, 1909년 4월 1일)



한성기생조합은 후에 광교기생조합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고 이후 1914년에 다시 한성권번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 한성기생조합의 설립과 함께 조선 기생의 ‘권번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부기(有夫妓)조합인 한성기생조합에 맞서 기부(妓夫) 없는 기녀들인 무부기(無夫妓)들의 조합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1915년 당시 기생조합으로는 신창기생조합, 순창기생조합 등이 더 있었다. 이중 광교, 다동, 신창 조합 등은 모두 근대적인 문물이 보다 발달해 있던 서울의 남촌에 자리잡고 있었고, 순창조합만이 북촌에 위치하였다. 더 자세히 보면 광교기생조합은 경성 무교정(武橋町) 92번지, 다동기생조합은 경성 다옥정(茶屋町) 177번지, 신창기생조합은 경성 황금정(黃金町) 3정목(丁目), 순창기생조합은 경성 의주통(義州通) 2정목 201번지에 있었다.



서울에 이어 1910년대에는 지방에도 기생조합이 생긴다. 진주기생조합이 1913년 5월에 설립되었고, 평양기생조합이 1912년 12월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구기생조합은 1910년 5월 31일 즈음에 만들어졌다.



기생조합들은 이후 일본식 명칭인 권번(券番)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하여 한성?광교 기생조합은 한성권번으로, 다동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개칭된다. 이후 대정권번에서 분리되어 생긴 대동권번(大同券番)과 조선권번(朝鮮券番), 또 경상도?전라도 기생을 중심으로 한 한남권번(漢南券番) 등이 창립되었다. 1924년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권번으로는 대정, 한남, 한성, 조선의 넷을 손꼽았고, 대동권번은 폐지된 상태였다고 한다.



4대 권번 중 한성권번과 한남권번만 조선인이 경영하였고, 대정권번과 조선권번은 일본인 내지는 친일파가 경영한 것이었다. 한성권번은 전통적으로 기생을 관리해온 별감 계층의 기부(妓夫)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기에 그 전통성을 주장하여 “그래도 한성권번인데” 운운하였다고 한다. 조선권번은 평양기생을 중심으로 하여 송병준을 배경으로 조직되었으며, 원로 河圭一 씨가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한편 신창권번은 조중응(趙重應)의 후원을 힘입어 ‘시궁골(笠井町)’, ‘상패’라고 화류계에서 제일 천대를 받는 창부들에게 기생이라는 명칭을 주어 조합허가를 내 준 것이다. 당시 신창조합에 소속되어 있었던 창부들은 그것을 축하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찬우무골’(永樂町)에 있던 조중응의 집에 가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기생조합이 생기고, 기생방에서 노는 절차는 깨어져 오입하는 법이 사라지자 기생이 될 수 있는 자격요건은 쉬워지고 歌舞보다는 얼굴을 중시하는 풍토가 조성되게 되었다. 평양서 올라온 벙어리 기생을 보고 기가 막혀서 어느 노기(老妓)는 앙가슴을 쳤다고 한다. 얼굴만 예쁜 기생들이 수입으로 인기로 도리어 우수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니 10년 동안 공을 쌓아 명기 되기를 꿈꾸던 노기의 가슴은 쓸쓸하기도 했을 것이다. 더구나 카페, 여급 문화가 형성되면서 기생들도 전통적인 가무보다는 유행가나 사교춤을 더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권번은 여전히 한국의 전통 가무를 가르치는 중심적 기관이었다. 대정권번의 기생 수업은 20여 명 정도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이왕직 아악부에 있었던 하규일과 악사 11명이 기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학습은 대개 아침 10시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학생들 중 노래와 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이 하규일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기생들은 각자 자기의 특성에 맞추어 가야금, 거문고, 양금 등을 배웠다. 노래는 우조(羽調) 6가지, 계면조(界面調) 6가지, 편 1~2가지를 배웠으며, 춤은 춘앵무(春鶯舞),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무고, 사고무, 무산향 등을 익혔다. 이러한 대정권번의 수업 내용을 보면 당시의 기생들이 기예를 익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실을 알 수 있다.



4대 권번 이외에도 몇 개의 권번들이 서울에 있었다. 경화권번(京和券番)은 당시 경무사 신태휴가 삼패(三牌)들을 중심으로 남부시동에 세운 것이다. 기생들 중에서도 격이 떨어지는 삼패로 구성된 경화권번의 기생들은 다른 권번의 기생들과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하는데, 1923년에 조선권번으로 흡수되었다. 경성권번(京城券番)은 1923년 10월 4일 홍병은을 중심으로 경성부 인사동 141-2번지에 설립되었다. 한때는 소속 기생이 200여명에 달하기도 했던 이 권번은 1932년 3월 12일에 서린동 70번지로 이전한 이후에는 명맥만을 유지하였다. 종로권번(鐘路券番)은 1935년 9월 11일 권번 출신 기생 김옥교에 의해 경성부 청진정 164번지에 설립되었다가 이후 1942년 8월 17일에 삼화권번으로 통합되었다.



삼화권번(三和券番)은 조선, 종로, 한성의 3대 권번 주주들이 만든 권번이다. 1942년 8월 17일에 결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하였는데, 이후 일제에 의해 영업제지를 받았다가 광복 후에 부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0월 14일자 과도정부 법률 제7호로 공창제도가 폐지됨으로써 한국에서 권번제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나. 부산의 동래권번(東萊券番)



부산의 동래권번(東萊券番)의 전신은 1915년경 부산에 설립된 기생조합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1920년대에 권번이라는 이름을 갖추게 되었다. 이 권번은 초량동이나 영주동의 객주업 유지들이 자금을 갹출해서 만든 것으로, 당시 경상도 감사나 동래 부사에 예속되어 있던 관기(官妓)들이 개항지였던 부산으로 모여들어 기생이 된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1922년에는 초량동에 도로가 나게 되면서 건물이 철거되고, 권번도 영주동 522번지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 요릿집은 초량동에 있던 선일관(鮮一館)뿐이었으므로 객주업자들은 자신의 집에 자리를 마련해 기생을 부르는 일이 많았고, 호색가들은 기생집을 찾아가 그곳에서 중화요리 등을 먹으며 노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부산 동래 예기(藝妓) 권번은 1932년 12월 20일에 윤상직에 의해 자본금 5,000원으로 경상남도 동래읍 교동 357번지에 주식회사로 거듭나게 되었다.



부산 등의 지방 도시에서도 기생들은 중류 계급에 해당하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혁주(張赫宙, 후에 일본으로 귀화한 노구치 가쿠치)의 자전적인 작품 <폭풍의 시>에서 이러한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폭풍의 시>의 주인공인 ‘용’의 모친은 기생이다. 부산에서 조금 떨어진 장생포 부근 어촌에서 태어난 모친은 16세에 어부에게 시집을 가지만, 어부인 남편이 싫어 어느 날 살림집을 도망쳐 나온다. 초량 등 부산, 대구 등을 전전하다가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그녀는 아버지 없는 아이를 데리고 다시 돌아온다. 여기서 그녀는 “가지고 온 가재도구나 장식물은 바닷가 사람들이 여태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고가품뿐이었다. 벼랑 위에 방이 열 개나 되는 큰 집을 지어 여관을 겸한 음식점을 내고, 돈 씀씀이가 헤픈 어부들의 호주머니를 비우게 했다.” 그녀는 일본어학교 경영자인 가니코상이나 야마다 순사라고 하는 일본인들을 배후의 방패로 삼고 이런 장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여기서 ‘여관을 겸한 음식점’이란 기생집을 의미한다. 그녀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첩인 동시에 기생을 생업으로 한 덕분에 외동아들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상급학교에 보낼 수가 있었다. 이것은 물론 중류계층 이하의 재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래권번의 경우 놀음이 펼쳐지기 전에 먼저 요리상이 들어오는데, 3원?5원?7원?10원 등으로 값이 매겨져 있었다. 화대는 기본 한 시간이 1원 20전이었고, 이후 시간당 80전씩 추가되었다.



다. 조선권번(朝鮮券番)



한성기생조합이 기부(妓夫) 있는 기생을 대상으로 한 유부기(有夫妓) 조합이었다면, 이에 대항하여 기부 없는 기생을 대상으로 조직한 조합이 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이다. 이 조합의 구성원은 주로 평양 중심의 서도 출신의 기생으로 구성되었는데, 이후 1919년(대정 8년)에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개칭하며, 대정권번에서 분리되어 평양기생들로만 조직된 대동권번(大同券番)이 이로부터 분리된다. 조선권번은 1923년에 하규일을 중심으로 대정권번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초창기로부터 1936년까지 조선권번에서 교육시킨 기생만도 3,000여 명을 헤아렸다고 할 만큼 조선권번은 서울의 대표적인 권번이었다.



「삼천리」8권 6호에 실린 <명기영화사(名妓榮華史) 조선권번>에는 조선권번이 배출해낸 여러 명기들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다. 원산홍(元花紅), 오소홍(吳小紅), 김산호주(金珊瑚珠) 등은 모두 하규일씨의 손아래에서 자라난 기생들로 大正 元年경에 활동한 대선배격의 기생들이다. 이들이 물러간 뒤에는 현매홍(玄梅紅)과 김월산(金月仙)이 또한 당대의 한다하는 이름을 날리던 기생들이었다고 한다. 열너덧 살에 기생이 된 이들은 경성잡가(京城雜歌)와 서도잡가(西道雜歌)에 뛰어났는데, 매홍은 또한 김상순(金相淳)에게 배운 양금 연주가 걸출했다. 이들은 후에 돈 있는 남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14세에 기생에 나선 주산월(朱山月)은 얼굴은 비록 예쁘지 않았으나 기예가 뛰어나고 마음씨가 곱고 태도가 아련해서 인기가 많던 기생이었는데, 천도교 교주 손병희와 절친한 사이어서 그가 죽었을 때에는 뜨거운 피눈물을 그의 무덤 위에 몇 번이고 뿌렸다고 한다. 이후 주산월은 기생일을 접고 천도교의 돈으로 동경에 건너가 여자 영어숙(英語塾)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천도교 여자부의 총무로서 독신으로 지내었다. 대정 8년부터 기생이 된 이난향(李蘭香)과 김산호주(徐刪瑚珠)는 평양 태생으로 춤, 노래, 양금을 잘 하여 매우 인기가 있었고, 그들의 뒤를 이어서는 백운선(白雲仙)과 김수정(金水晶)이 있었다.



많은 명기를 배출해 낸 조선권번은 1936년 4월 30일 하규일에 의해 경성부 다옥정 45번지에 자본금 8천원의 주식회사로 바뀌었다. 1939년에는 대표가 이종완으로 변하였고, 1942년에는 다시 일본인으로 대표가 바뀌었다가 1942년 8월 17일 삼화권번으로 통합되었다.



다음은 「삼천리」8권 6호에 실린 <명기영화사 조선권번>의 전문이다.



名妓榮華史 朝鮮券番 浪浪公子



서울장안에 기생권번(妓生券番)이 몇이던가?



조선권번(朝鮮券番)이 있고



한양권번(漢陽券番)이 있고



종로권번(鍾路券番)이 있다.



이 세 개의 기생권번에는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기생들이 있는가?



한 권번에 근 오백(五百)명, 세 권번이면 천오백 명(千五百名)의 기생들이 있다.



기생권번이란 한마디로 말한다면 「기생」을 만들어내는 기생학교이다. 이들 권번에서는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양금이면 양금, 모두가 제각기 선생이 앉아 있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웃으며 욕해가며 기생들을 기르는 데가 여기다.



그러면 조선에 기생이 언제부터 있어 왔던가하면 그야 역사가들의 알 바로서 아마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시대부터 있어왔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고려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기생이 있었다고 하나 이런 것은 우리들의 알 바가 아니라, 다만 조선은 자고(自古)로 기생이 하도 유명하여 왔던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요, 누구나 아는 일이다.



궁안에 무슨 연회(宴會)가 있을 때도 기생. 고관대작이나 돈푼 있는 풍류객들에게도 거저 기생.



이러한 기생들도 그 옛날엔 다만 「기생서방」이 있어 기껏해야 한집에 사오명(四五名)이 아니면 오륙명(五六名)이 모이면 대작이고 돈푼이나 발겨먹자는 야비한 수단을 모르는 깨끗한 「기생」도의 품성을 기르기에만 힘을 쓰는 한 개의 예술가들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이 세 권번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유명한 기생을 많이 이 강산(江山)에 내보낸 「조선권번」을 먼저 찾아, 한 때에 그 이름이 휘날리던 유명한 기생들의 영화사(榮華史)를 다시금 한번 더듬어 볼까한다.



그러면 「조선권번」의 연혁(沿革)은 어떠한 길을 밟아 왔나부터 간단히 적어 본다.



개명 이후 모든 제도가 일신하고 새로워지는 통에 이 기생에 대한 제도도 새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전에 기생들은 기생서방에게 매달려서 일생을 기생으로 그 서방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쳐 오던 지난날의 서방제도를 없이 하고 새롭게 기생권번을 만들었던 것이니 이것이 명치사십삼년(明治四十三年), 하규일(河奎一)씨와 그밖에 몇몇 분이 널리 전선으로 기생을 모집하여 소위 기생조합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에 모여온 기생들이란 대부분이 평양기생들이었다. 이것이 대정팔년(大正八年)에 와서 비로소 「대정권번(大正券番)」이란 이름으로 오늘의 조선권번의 전신(前身)이 되었던 것이다. 명치사십삼년(明治四十三年)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조선권번」은 오로지 하규일(河奎一)씨의 공로이요 꾸준한 지도가 있었다한다. 또한 이 권번의 초창기로 오늘날까지 하규일(河奎一)씨의 손 밑에서 자라난 기생이 수삼천명(數三千名)을 헤아린다고 하니 실로 조선기생권번사의 첫 페이지를 이루는 하규일(河奎一)씨의 존재는 뚜렷한 바가 있다 할 것이다. 지금에 하규일(河奎一)씨는 「조선권번」을 움직이는 한 주인으로 되었다.



조선의 정악(正樂)은 물론이지만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하규일씨의 손아래에서 하나에서 수천을 헤아리는 수많은 기생(妓生)들 가운데서도 얼굴 잘 나고 재주가 용하고 춤 잘추고 노래 잘 불러서 장안의 호걸과 풍류객들이 너도나도 하며 단 침을 삼키며 연연사모하던 기생들이 하나 둘이 아니려니 이제 이들의 지난날의 성망(聲望)과 그들의 자취도 알아보자. 원화홍(元花紅)이 그러하고 오소홍(吳小紅)이 또한 그러하다.



그밖에는 김산호주(金珊瑚珠) 또한 빠질 수 없는 한다하는 명기(名妓)였다. 이들은 모다 하규일(河奎一)씨의 손아래에서 노래를 배우고 춤을 배운 유명한 기생들이었다.



고향은 본래가 모다 평양이었으나 서울에 올라와 한동안 수많은 남자의 흠모와 사랑을 무던히 받아오던 기생들이다. 그중에도 더구나 김산호주(金珊瑚珠)같은 기생은 「일문십지(一聞十知)」하는 재주를 구비한데다가 평양에서부터 이름있는 어여쁜 얼굴을 가진 기생이다. 「패성」의 풍류객도 풍류객이려니와 그 당시 서울장안의 기생방을 드나드는 고관대작의 아들까지 사랑을 아끼지 않던 일대명기였다. 그 때가 바로 대정원년(大正元年)경이어서 아직 예적도 없이 지나던 때의 일이다. 지금의 이들은 모다 어느 돈 많은 남자들을 얻어가서 곱다랗게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지! 그렇지 못하면 일찍이 세상을 떠나갔는지? 그들의 소식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들이 한번 기생의 자리를 물러간 뒤에는 현매홍(玄梅紅)과 김월선(金月仙)이 또한 당대의 한다하는 이름을 이 강산(江山)에 날리던 명기(名妓)들이다. 현매홍(玄梅紅)의 본명(本名)은 달순(達順)이요, 김월선(金月仙)의 본명(本名)은 복순(卜順)이라. 둘이 모두 지금에는 사십(四十)을 가까이 바라다보는 이들로서 매홍(梅紅)은 열 넷에 월선(月仙)은 열다섯에 똑같이 기생이 되어서 하선생(河先生)의 귀여움을 받아가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춤추고 노래 부르게 되었으니 둘이 모두 경성잡가(京城雜歌)와 서도잡가(西道雜歌)를 잘하는 명창(名唱)들이었다. 더구나 매홍(梅紅)은 김상순(金相淳)씨에게서 양금(洋琴)까지 배워서 양금 잘 타기로도 당대에 그 이름이 자자하였던 기생이다. 모다 십오년(十五年)동안이나 기생으로 있으면서 십여년전(十餘年前)까지도 이름있는 명기(名妓)로 치던 기생들이다. 지금에는 모두 현모양처가 되여 돈 있는 남자의 가정으로 들어갔다한다



그런데 이들과 거의같이 나와서 몇 해 앞서 기적(妓籍)에서 물러간 이로는 김명옥(金明玉)이 있다. 명옥(明玉)이 역시 지금은 오십(五十)의 고개를 바라게 되는 몸이나 한 이십년(二十年)전까지는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기로 (더욱이 서도잡가(西道雜歌))는 빼어 놓을 수 없는 명기(名妓)의 하나였다. 지금엔 이 기생도 전라도 어떤 부호와 짝을 지어 평온한 가정을 이루어 여생을 보낸다고 한다. 그 다음에 나타난 명기(名妓)가운데는



하규일 : 1863(철종 14)∼1937. 자는 성소, 호는 금하(琴下), 본관은 진주, 서울출신. 6세부터 집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세에 음악수업에 들어가니 스승은 최수보이다. 선생의 집안은 전통적으로 가곡을 잘하여 하순일(河順一), 숙부 하준권 등이 당대의 선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당대에 이름 높던 박효관에게도 배웠다. 31세 때 관계에 진출하여 한성소윤 겸 한성재판소 판사와 내장원 문교정리위원 겸 전남 독쇄관, 진안 군수 등의 벼슬을 지냈고, 국치(國恥) 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다시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 뒤 선생은 정악전습소(正樂傳習所) 학감에 취임하여 조선음악뿐만 아니라 서양 음악의 수용과 그 보급에도 공헌하였다. 조선정악전습소는 가요부와 음악부 두 부를 두고, 여기에 이수과·교수과 둘로 나누어, 이수과는 이미 수학한 이로 더욱 연수케 하는 과정이요, 교수과는 일반 초보자의 초급반이었다. 선생은 학감의 직분이었으나 중부 상다동(上茶洞)에 자리한 여악분교실장을 겸하니, 이것이 그 뒤 기생조합과 관련을 가져 여악의 보존과 신장에 큰 기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규일 선생이 이왕직아악부 촉탁으로 임명되어 아악부 젊은 연주직과 아악생에게 가곡 전수를 책임지고 출강한 것이 1926년 4월의 일이었다. 아악부에서 가곡, 가사, 시조 등 우리나라의 정가를 전승함으로써 귀중한 전통 가악의 절멸을 막고, 굳건히 뿌리내려 길이 보존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선생의 공로이다. 선생이 한 평생 심혈을 기울여 길러낸 제자는 매우 많아, 남창으로 일러도 아악부원 양성소 출신만도 거의 60명을 육박하고 있고, 그 여창으로 말하면 정악전습소 다동 여악분교실로 시작하여 다동조합, 대동권번, 조선권번에 이르기까지 근 1세대에 걸쳐 배출한 여제자는 실로 무수하다. 가집(歌集)으로 1931년에 펴낸 '가인필휴(歌人必携)'가 있다.



주산월(朱山月)이 있다. 본명(本名)은 주○경(朱○京)이다. 일찍이 「천○교의×대교주 손×희」의 뜨거운 총애를 받아 오던 주산월(朱山月)이는 어려서 십사세(十四歲)에 기생으로 나섰던 것이다.



얼골은 비록 잘 나지 못한 편이나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더구나 마음씨가 곱고 태도가 아련해서 장안의 수많은 남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손○희씨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비록 기생의 몸으로 있으나마 침식을 잊어가면서 극진한 간호를 하였던 것이며 그가 돌아감에 뜨거운 피눈물을 그의 무덤 위에 몇 번이고 뿌렸다고 한다. 그가 기적을 떠나 천○교의 돈으로 동경에 건너가 여자 영어숙(英語塾)학교에까지 졸업하고 돌아와 오늘날까지 내내 독신으로 지내면서 지금엔 천○교의 여자부의 총무로서 50의 고개가 넘도록 피로를 모르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 가고 있다.



그가 간 후에는 또한.



이난향(李蘭香)과 서산호주(徐刪瑚珠)를 손꼽을 것이다.



이난향의 본 이름은 仙?요 서산호주의 본 이름은 순봉(順鳳)이다. 둘이 다 대정 8년부터 기생으로 나섰으니 난향이 나이 19요 산호주는 15였다.



평양이 역시 이들의 고향이었고 똑같이 춤 잘추고 노래 잘하고 양금 잘 타기로 그 당시 장안의 남자들은 어누 누구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이난향은 얼굴 잘나고 거동 곱고 말소리가 맑을 뿐더러 하나 물으면 열을 아는 재주덩어리였으니 그것은 난향의 맑은 두 눈동자와 넓죽한 이마에 그 재주가 들었다고나 할 것이다. 글 잘하는 사람들도 「난향」이요 돈 잘 쓰는 궐자들도 「난향」이었다. 그러더니 난향이나 산호주나 기적에 몸을 둔 지 15년째 되는 소화 8년 봄, 꽃피고 새 지저귀던 때 이들의 나이도 모두 30년의 고개를 넘게 되니 이들에게는 머지않아 닥쳐올 얼굴의 주름살을 막을 길 바이없음을 느꼈던지 난향은 영남의 어떤 부호의 사랑과 짝을 지어 화류계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에는 아들 딸 많이 낳고 무심한 세월만을 손꼽고 있으리라.



그러면 난향이와 산호주가 간 뒤의 조선권번에는 어떤 명기가 오늘날까지 있어오는가?



백운선(白雲仙)이가 그 이름이요, 김수정(金水晶)이 또한 그러하다.



백운선의 본 이름은 순향이요 명치 33년 3월 17일이 그의 생일이다. 인제 나이는 먹을 만치 먹어 대정 8년에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니 실로 기적에 몸을 던진 지 20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생으로 더구나 한다하는 명기로 이렇듯이 오랜 동안을 계속해서 오는 이는 오직 백운선이 하나뿐일 것이요 30의 고개를 넘으나 그 노래 그 춤은 조금도 변할 줄 몰라 그의 인기는 도무지 사라질 줄 모르니 이를 가리켜 만년 명기라고나 할 것이다. 모두가 하규일씨의 손에 길러지면서 귀여움을 많이 받은 명기가 그 누구랴마는 유독히 「백운선」은 그중에서도 가장 귀여움을 받아오고 아껴오는 기생이다.



김수정(金水晶)은 아직 활짝 피지 못한 한 떨기 백장미화, 그의 나이 24다. 일찍이는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졸업하던 즉시 열다섯에 기적에 몸을 두어 오늘에 이르렀다. 경기잡가, 서도잡가가 기막히지마는 양금도 신간이 녹고 춤도 탄복할만하니 그의 재주가 어느 명기에 뒤지지 않는다. 요사이 장안에서 백운선이를 아는 자 또한 김수정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풍편에 들리는 바는 수정은 오래지 않아 기적에서 정든 남자를 따라 가정으로 들어간다니 수정이 간 뒤에는 과연 누가 또한 나설 것인가.



「조선권번」이 있어온 지 이제 25여 년 그 동안 얼굴 잘난 명기 이밖에도 많았었고 소리 잘하고 춤 잘 추던 기생 또한 허다하며 어떤 기생은 비관하고 목숨을 끊은 이도 있고 어떤 기생, 해외의 손님과 정을 드려 머나먼 외지로 가서 소식조차 없는 이가 하도 많으니 이것을 모조리 적을 수도 없는 일이요 그것을 다 추려낼 시간의 여유를 못 가졌음을 한할 뿐이다.

라. 지방의 권번



마. 진주권번



진주 권번의 전신인 진주기생조합은 원래는 기생들 자신에 의해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1928년 4월 김창윤에 의해 진주권번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런데 김창윤의 경영에는 비리와 부조리가 많아서 당시 진주기생들은 경영 개선을 계속 요구하였고, 그러한 요구는 진주 경찰서에서도 손을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938년 12월 27일 최지환, 전두옥, 박규석, 김동식, 정태범, 허억, 강주수씨 등 8명에 의해 주식회사 형태의 조직이 준비되었고, 약 1년간 준비를 걸친 끝에 1939년 11월 2일 드디어 주식회사 ‘진주 예기권번’의 창립을 보게 되었다.



진주 권번에는 기생 100여 명과 견습생 50명 정도가 있었는데, 견습생들은 3반으로 구성되어 3년간 교육을 받았다. 1반은 새로 입학한 학예, 2반은 2년 된 학예, 3반은 3년 된 학예로 편성되었다. ‘학예’는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학습하는 오전반과 개인지도를 받을 수 있는 오후반이 있었다. 권번의 학습은 ‘교양학습’ ‘일본어학습’ ‘기예학습’을 주로 받았다고 한다. ‘교양학습’은 처음에 걸음걸이로부터 시작하여 인사하는 법, 앉는 법, 말하는 법, 옷 입는 법 등 기초적인 예의범절에 대해 배웠는데 필수과목이었다고 한다. ‘기예학습’은 악(樂), 무(舞), 기(器)로 나누어 몇 명씩 조별로 나누어 학습을 했다. 소리는 시조, 단가, 진양조, 판소리의 단계를 배우는데 판소리 단계에 와서는 개별적으로 지도를 받았다. 3년간의 교육기간이 끝나면 졸업시험을 쳐야 했고, 졸업시험에 합격해야만 놀음에 나갈 수 있었다.



진주권번은 현재 우리은행 진주지점 자리에 있었다. 권번의 건평은 500여 평 정도로서 건물 내부에는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이 있어 그곳에서 몇 명씩 그룹이 되어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6·25때까지 건물이 전해왔으나 전란 때 불타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당시 권번에서 가르치고 배웠던 기예 중 일부분은 지금까지 전해져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진주의 교방무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진주 권번은 진주 교방문화의 가교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문화적 의의가 높다고 하겠다.


바. 한성권번



기생조합의 효시는 한성기생조합이다. 이것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1908년 9월 이후에 소속이 없어진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서 조직한 조합으로 추정된다. 자신들의 존재를 폐지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기부들은 스스로 예기(藝妓)를 가르치는 강습소를 설립하고 기생을 회동하여 가무와 기예를 가르치게 되는데,[참고] 이렇게 생겨난 것이 바로 한성기생조합이다. 1908년 10월 27일자 「황성신문」에는 박한영을 포함한 30여인이 발기하여 풍속을 개량할 목적으로 한성에 기생조합을 만들어 규칙을 제정하고 경시청에 청원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한성기생조합은 바로 이즈음에 설립된 것이며 이로써 조선 기생의 ‘권번화’가 시작되게 된다.



한성기생조합은 1909년 초부터 고아원의 경비를 보조하기 위해서 원각사에서 자선연주회를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한다. 다음의 신문기사들에서 그러한 활동 내역을 볼 수 있다.



「자선연주회」. 문천군 기근을 위하여 한성기생조합소에서 음력 윤달 11일로 한 10일 연주회를 원각사에서 열어 다소간 기부를 바라니, 원각사의 성의 또한 감사하여 이로써 알려드리니 모든 군자는 왕립하시기를 바랍니다. 한성기생조합소 백.



(「慈善演奏會」. 文川郡 飢饉을 爲하여 漢城妓生組合所에서 陰 閏月 十一日로 限 十日 演奏會를 設行於圓覺社하여 多少間 寄附하올되 圓覺社 誠意 尤極 感謝하와 玆以共布이오니 僉君子는 枉臨하심을 望하옵. 漢城妓生組合所 白. 「황성신문」, 1909년 4월 1일)



「연주회 개최」. 본소에서 경성 고아원 경비에 보조하기 위하여 오는 13일 (음력 3월 4일)부터 원각사에서 연주회를 한 일주간 개최하오니 慈善하신 모든 분들은 마음에 새겨주시기 바랍니다. 한성기생조합소 기생 연홍, 앵무, 농월 등 알림.



(「演奏會開催」. 本所에서 京城孤兒院 經費에 輔助하기 爲하여 今 十三 日 (陰 三月 四日)부터 圓覺社에서 演奏會를 限 一週間 開하오니 慈善하신 僉閣下는 光顧하심을 切望함. 漢城妓生組合所 妓生 蓮紅 鸚鵡 弄月 등 告白. 「황성신문」, 1910년 4월 12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3일)



한성기생조합은 후에 광교기생조합으로 명칭을 바꾸게 되고 이후 1914년에 다시 한성권번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였다. 한성권번은 안춘민(安春敏), 엄순모(嚴淳模) 등 3인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들 몇몇의 힘으로 합자회사의 형식으로 「광교조합」이 형성되었고, 그 당시 소리와 춤으로 유명한 류개동(柳開東), 주영화(朱榮和), 장계춘(張桂春), 김용태(金用泰) 등을 선생으로 모시고 재주 있고 총명하고 얼굴 예쁜 기생들을 길러냈다고 한다.



한성권번에는 퇴역 관기와 남도지방의 기생들을 포함하여 장안의 일류 기생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삼천리」 8권 8호에 실린 <명기영화사 한성권번(名妓榮華史 漢城券番)>에는 한성권번이 배출해낸 명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 기사가 씌어진 때는 한성권번이 설립된 지 30여 년이 지난 때였는데, 필자는 장안의 명기(名妓)?명창(名唱)치고 한성권번의 무대를 밟지 않은 이가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의 한성권번에는 만년 명기도 있었고, 신예 명기도 있었다. 조목단(趙牧丹), 白牧丹 같은 이들은 40의 고개에 이르러서도 장안의 인기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기생 생활을 그만 두었다가도 불과 몇 해만에 기적(妓籍)에 나타나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생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이중 조목단은 「경성잡가」, 백목단은 「서도소리」를 잘하였다고 한다.



중년 명기쯤 되는 이들에는 김옥엽(金玉葉)과 李眞鳳이 있었다. 30대의 이들은 모두 평양 출신으로서 서도소리가 장기였다. 한성권번에서 조선 소리로 인기 있는 기생 하면 이들이었다고 한다. 한편 남도소리를 잘하는 기생으로는 전라도 구례 출신 김금옥(金錦玉)이 있었다. 돈 잘 쓰는 전라도 부자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으레 금옥의 얼굴을 대하여 그는 매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한편 위의 명창들과는 달리 ‘땐스’ 잘하는 현대적인 기생들도 인기가 높았다. 그러한 기생들에는 이춘홍(李春紅), 김진옥(金玉眞), 유금도(柳錦桃), 이현정(李賢貞), 구근화(具槿花) 등이 있었다. 이들은 20대의 젊은 나이로 신식 춤과 노래를 잘했으며 용모도 아름다웠다. 이중 이춘홍과 유금도는 평양 기생학교 출신이다.



많은 명기들을 배출해낸 한성권번은 1938년에는 주식회사 한성권번 부속 기생학교가 인가되었으며, 1942년 8월 17일에 삼화권번(三和券番)으로 통합되었다. 다음은 「삼천리」 8권 8호에 실린 기사 <명기영화사(한성권번)>의 전문이다.




名妓榮華史(漢城券番)



한양 성중에 뛰어난 가희(歌姬), 미희(舞姬)는 그 누구누구던고. 이 땅 정조(情調)는 그네의백어(白魚) 같은 손에서, 흘러나오건만, 타는 이, 뜯는 이, 그 뜻을 알손가.



한성권번(漢城券番)이 한양성중에 생겨난 지도 3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한양성중(漢陽城中)이야 무슨 일이 일어났건 어떤 변(變)이 있었거나, 이래 30여년간 이러한 시끄러운 세상사는 모르는 듯이 꽃 같은 妓生만을 알뜰하게 길러내인 한성권번이다.



꽃피고 새 지저귀는 봄날이나 달 밝고 바람 소슬한 가을밤이면 유두분면(油頭紛面)에 녹의홍상(綠衣紅裳)으로 화용월태(花容月態)에 애교를 흘리며 꾀꼴새 노래가락이 마디마디 꺾어 넘어갈 때면 허다한 長安의 풍유남아의 간장을 녹아내듯 한다하는 명기(名妓)?명창(名唱)치고 어느 누가 이 漢城券番의 무대를 밟지 않은 이 있으랴!



한성권번을 무대삼고 「가사」「시조」를 잘 부르며 가야금 거문고 잘두 타기로 장안에 소문높아 더할 나위 없는 영화(榮華)를 한몸에 누리고 있던 이 그 수를 일일이 다 헤일 수 없이 많았다.



김×선이 그러했고 박금○이 그러했다.



이렇게 한때에 서울장안의 수많은 호걸남아, 돈 잘 쓰는 풍류객들의 이 손에서 저 손 위로 무릎 위에 안기우고 품안에 꼭 껴안겨서, 밤 가는 줄도 모르는 채 춤추고 노래부르던 名妓名唱들-이들은 그 뒤에 어찌되었노?



어떤 기생 팔자 좋아 고대광실 높은 집에 돈 많고 인물 잘난 정든 남편 모셔놓고 밤낮으로 웃음 섞인 달콤한 가정을 이룬 이 하나요 둘이 아니며,



어떤 기생 팔자 궂어 정 들이고 못 살게 되어 님의 손목 마주잡고 漢江水 깊은 물에 풍덩실 떨어져 저 世上을 찾아간 이 또한 없지 않으리라.



인제 이들의 이름 일일이 적어보려 하였으나 아들딸 두둑이 낳아 놓고 얌전한 가정살림을 이룬 이들에게 전날의 그 시절을 되풀이시킴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며 또한 애처롭게 한 많은 눈물을 뿌려가며 娑婆世界를 등지고 서글프게 사라진 이들에겐 그 죽어간 靈魂마저 가슴속을 저리게 할까두려워, 흘러가는 붓대를 억지로 돌리려 한다.



한성권번이 있어온 지 30년 동안, 기생으로 반도 강산에 나왔다 사라진 이 그 수를 헤아리면 무릇 백도 넘고 천도 넘을 것이다.



지금에서부터 30년 전 서울 서대문 밖에 아담스럽게 꾸며 놓은 한 채 집-이 집 커다란 솟을대문 옆에는 「廣橋組合」이란 커다란 看板이 붙어 있다가 이 광교조합이 오늘의 한성권번이다.



그러면 이 한성권번은 어떤 사람 손으로 생겨서 오늘에 이르렀노? 오로지 安春敏氏?嚴淳模氏 等 수삼 인의 힘으로 되어졌다고 한다. 안춘민씨로 말하면 현재 한성권번의 취체역으로 있는 분이다. 이들 몇 분의 힘으로 合資會社의 형식으로 「광교조합」을 만들어 놓고 그 당시 소리와 춤으로 유명한 柳開東, 朱榮和, 張桂春, 金用泰 等 諸氏가 선생으로 있으면서 재주 있고 총명하고 얼굴 잘난 계집애들을 모아놓고 밤낮 매질하고 웃어가며 「妓生道」를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동안 세월은 덧없이 흘러 30여년, 趙牧丹, 白牧丹 같은 名妓들은 한번 妓籍에서 몸을 돌렸다가도 가정이 귀찮고 살림이 까다로웠던지, 또는 말 못할 야릇한 사정이 있었음인지는 몰라도 불과 몇 해만에 妓籍에나타나서 40의 고개에 이르러서도 장안의 인기를 잃지 않고 한 달 잡고도 4~500 시간을 이리저리 늙은 어른, 젊은 사나이들 앞으로 불려 다니고 있으니 「萬年名妓」로 불리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趙牧丹과白牧丹, 모두 한양의 雨露를 마셔가며 북악산 밑에서 곱다랗게 자라난 名妓들이다.



趙牧丹의 「京城雜歌」 白牧丹단의 「西道소리」하면 서울 안에서 돈푼 쓸 줄 아는 사람 치고 모르는 이 거의 없을 것이다. 조목단은 42세요 백목단은 39세이다. 이 두 名妓 모두 한때에는 얼굴 잘생기고 노래 잘 부르기로 젊은이들의 가슴을 조이게 한 때가 있었으나 이제 막을 수 없는 한 가닥 두 가닥 주름살이 어느 겨를에 이들의 얼굴 위에 線을 그어가고 있으니, 꽃 같은 청춘이 늙어감을 한숨져 무엇하랴! 지금엔 다만 변할 줄 모르는 靑山流水에도 옥을 구을리는 듯한 그 고운 노래가락에다 한때의 그 시절을 하소하는듯!



金玉葉, 이름 좋은 玉葉이요 얼굴 잘난 玉葉이다. 미인의 고을 평양에서 자라난 김옥엽은 어려서 평양기생학교를 다녔었다. 淸流壁에 철쭉꽃 피고 浮壁樓에 낙엽 질 때 날씬한 허리에 곱게 단장하고 大同江邊을 오락가락할 때이면 浿城의젋은이들 모두 그의 뒤를 따랐던 것이다. 이러한 김옥엽이 평양에서 자취를 감추고 봄바람에 불려 서울 장안에 날아들자 서도소리 잘하기로 김옥엽의 이름이 단번에 쫙 퍼지고 말았다. 올해 그의 나이 三十, 서울에 올라와 妓籍에 몸을 둔 지 엊그제 같은 일이언만 벌써 八年째 되어간다. ?옥엽의 愁心歌라면 오늘날 장안의 풍유객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는 名唱이다.



다음의 신문 기사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妓生組合成立」. 朴漢英 等 三十餘人이 發起하여 漢城內 妓生營業을 組合하여 風俗을 改良하기로 目的하고 規則을 諸定하여 警廳에 請願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8년 10월 27일)



李眞鳳, 그의 나이 38에 妓籍에 다시금 나선 지가 10년이 가깝다.



유부기 : 기부(妓夫)가 있는 기생.



옥엽과 같이 평양 태생으로 서도소리 잘하기로는 옥엽과 같이 친다. 옥엽이 가는 연회에 진봉이 따르고 진봉이 가는 좌석이면 으레히 옥엽이 나타난다. 한성권번에서 조선소리로 한 달 잡고 그 중 많이 불리는 기생이 누구냐 하면 옥엽이 아니면 진봉이다. 서로 다정스럽게 앞서고 뒤서고 하는 굉장한 인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도 40이 앞에 멀지 않았으니 아까운 노랫가락이 아까웁다.



金錦玉, 전라도 求禮 출생이다. 서울장안에서 남도소리 잘하고 가야금 잘 띄우기로는 어느 기생이냐? 하면 으레히 첫 손가락이 김금옥을 꼽게끔 되었다.



아직 妓籍에 나선 지 날이 짧아 30년밖에 안 되지만 그의 인기는 너무나 높아졌다. 가야금에 맞춰 노랫가락 할 때이면 그의 빼어난 재주에 탄복하지 않는 이 없을 것이다. 돈 잘 쓰는 전라도 부자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으레히 금옥의 얼굴을 대한다는 것이니 그의 생활이 호강스러울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위에서는 대개 3,40의 늙은 기생으로 모두가 조선소리로 당대에 그 이름을 떨치는 이들만을 말하여 보았지마는, 오늘의 기생은 땐스 잘하고 外地 손님을 잘 대할 줄 아는 현대적인 기생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런 기생으로 제일 먼저



李春紅을말하게된다. 춘홍은 올해 나이 25세의 한창시절이다. 「기생의 고을」 평양에서 어려서부터 기생학교를 다녔었다. 춘홍은 기생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 타고난 미모와 명랑한 말소리는 수많은 젊은 사나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한 4,50년 전에 기생학교를 나오는 길로 서울로 올라왔었다. 노래 잘 부르고 말 잘 하기에 소문이높은 이다. 더구나 그 싱글싱글하는 미소 띤 얼굴은 미인이라는 소리를 늘 듣고 있으니 「금상첨화」는 이를 두고 한 말인가 한다. 지금 서울 장안에서 어느 기생이 그중 많이 불리우느냐 하면 첫째 한성권번의 이춘홍을 말하게 된다. 인물이 絶色이요 말 잘하고 노래 잘 부를 뿐만 아니라 땐스까지 잘하는 이춘홍은 광교다리와 다방골이 분주하게 인력거꾼은 그를 싫고 요란스럽게 달리는 것이다. 한 달 잡고 6,700시간은 늘 불려다닌다고 하니 춘홍의 인기도 무던하다.



김옥엽, 이춘홍을 말하게 되니 金玉眞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張桂春氏와 땐스 선생 金用泰氏의 귀여움을 받는 기생도 옥진이요 많고 많은 기생들 가운데서 상냥스럽고 마음씨 좋은 기생도 옥진이다. 더구나 국어를 잘하고 명랑스러운 웃음세를 가진 옥진이는 외지에서 들어오는 손님이면 으레히 한성권번의 김옥진을 부르게끔 되었다.



아직 활짝 피지 못한 한 떨기 꽃송이 방긋이 벌어지는 탐스러운 요염한 자태! 그 향그러운 향기를 따라 날아드는 蜂蝶의 떼. 옥진의 선잠을 고달프게 흔들어 놓을 것이다. 今年에 22, 서울이 고향이다. 기생으로 나선 때는 16세 되던 해 이른 봄 불과 5,6년이 되건마는 옥진이는 기생으로서의 배울 것을 다 배웠다.



柳錦桃, 어쩌면 이렇게도 꼭 같을까! 이춘홍과 나이도 25 똑같고 평양에서 기생학교도 한날 들어가 한 날에 다정스럽게 손목 잡고 나왔었다. 춤 잘추고 노래 잘부르는 류금도는 얼굴도 미인이요 거동 좋고 모양 좋으니, 당대의 名妓로서 모든 점을 갖추었다. 그 서글서글한 얼굴에 시원스러운 마음씨는 장안의 호걸남아들이 무던히 가슴을 조이는 것도 그럼직한 일이다.



李賢貞, 충청도 출생으로 나이가 스물일곱, 기생으로 나오기는 소화 6년이다. 노래 잘 부르고 땐스 잘하기로 그 이름이 높아졌다.



具槿花, 이름도 槿花요 생기기도 槿花같이 고결하고 아리땁다. 그가 자라난 고향조차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 水原이다. 일찍이는 얌전하고 착실한 여학생으로 집안에선 따뜻한 사랑과 선생에게 귀여움을 받던 槿花도 여러 가지 까다로운 사정으로 해서 바로 작년 여름 비로소 妓籍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처음에는 노래배우고 춤 배우기에 매도 맞고 욕도 얻어먹었으나 원체 총명한 근화는 한 달이 되고 달이 됨을 따라 제법 애티 활짝 벗고 지금에 와서는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일류 名妓로 그 이름이 장안의 젊은 사나이들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박혀 있다.



이밖에도 일류 명기로 치는 한다하는 명기명창을 모조리 헤이자면 한이 없다. 지금에 漢城券番에는 250명의 妓生들이 아침이면 11시부터 저녁 4시까지 한데 모여 춤을 배우고 노래를 배우며 가야금 타기에 요란스러우니, 또한 이들 가운데서는 어떤 이름 가진 명기명창이 튀어나오려는가.


일제시대 기생들의 모습. 배경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오신월, 장연홍, 김영월, 최연연









장연홍

오산월

이옥란

윤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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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부인 주옥경(朱鈺卿: 1894~1982)




그녀는 원래 종로 명월관의 기생 출신이었다. 평양 근교 숙천에서 태어나 8세 때 평양기생학교에 들어간다. 주산월(朱山月)이 그의 기명이다. 그는 몸을 파는 이·삼패(二三牌) 기녀가 아니라 기악과 서화에 능한 일패(一牌) 등급의 예단(藝壇: 연예인)으로서 당시 매일신보 기자는 ‘서화의 천재’라고 평하고 있다. 주산월은 평양에서 서울로 오자마자 기둥서방이 없는 기생인 이른바 ‘무부기(無夫妓)조합’을 만들고 행수(行首)가 된다. 그해 명월관과 그 별관인 태화관을 출입하던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 신도가 된 주옥경은 22세 때 셋째 부인으로 들어간다. 두 사람은 33살의 나이 차가 났다. 이후로 그는 가정과 교단에 헌신한다.


손병희는 옥중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병보석이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치료할 기회를 놓치고 수감된 지 19개월20일 만에야 풀려났다. 주옥경은 한시도 쉬지 않고 병간호를 해서 가족들과 교도들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잠시 차도를 보이던 손병희는 1922년 5월 19일 영면하고 만다. 이후로 주옥경은 8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60년간 수절하면서 고결한 여성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http://j.mp/ekWU3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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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로는 종로1가와 2가 사이에 있는 종로 사거리의 보신각(普信閣)에서 남쪽으로 뻗어 을지로 입구, 소공동(小公洞) 입구,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에 이르는 폭 40m, 길이 2,000m의 간선도로이다. 또한 남대문로 도로변에는 청계천쪽에서부터 남대문로1가~ 남대문로5가로 구획된 5개 법정동이 있다.

원래 한성부(漢城府) 중부의 대평방(大平坊), 남부의 광통방(廣通坊), 회현방(會賢坊) 및 명례방(明禮坊), 서부의 양생방(養生坊) 및 반석방(盤石坊) 지역이다. 1914년 이들 관할의 각 동을 병합하여 경성부(京城府) 남대문통1정목(南大門通一丁目)~남대문통5정목 및 어성정(御成町)이라 하였다. 1943년 경성부 중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남대문로1가~남대문로5가 및 양동(陽洞)으로 개칭되었다.
















[출처] 남대문로 [南大門路, Namdaemun-ro ] |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836939

http://www.hani.co.kr/section-021003000/2007/09/021003000200709130677009.html

http://blog.joinsmsn.com/media/index.asp?uid=hyspeace

http://www.nosmokingnara.org/zbxe/?mid=sarang&page=58& document_srl=1126375&listStyle=&cpage=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49029

http://www.sangsangmadang.com/photo/essay/series_view.asp?SerialSeq=27&WorkSeq=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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