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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12 이재명(李在明, 1890년 ∼ 1910년 9월 13)
  2. 2011.01.05 평양의 옛사진
  3. 2011.01.02 강제징용,징병
  4. 2011.01.01 반도호텔(Bando Hotel).:
2011. 1. 12. 22:09

이재명(李在明, 1890년 ∼ 1910년 9월 13)

독립운동가이다. 다른 이름은 이수길(李秀吉). 1886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평안북도 선천 출생으로 어릴때 평양으로 이주하여 기독교 계열인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했다.


1904년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났으나,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1907년 일본을 거쳐 귀국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 인사들의 암살을 계획했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종현(鐘峴)천주교당(명동성당)에서는 닷새 전 사망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벨기에 총영사가 주최하는 이 행사에는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해 각부 대신이 대거 참가했다. 추도식이 끝난 후 이완용은 삼엄한 경계 속에 인력거를 타고 교당을 빠져나왔다.


"교당문 밖에서 7~8간(약 14m) 되는 데 이르러서는 단발한 사람 한 명이 돌출하여 8치(약 24cm) 남짓한 한국칼로 인력거 끄는 차부부터 꺼꾸러뜨리고 몸을 소스쳐 차 위에 앉은 이완용씨의 허리를 찌르매 이씨가 달아나려 하거늘 이씨의 등을 찔러서 3군데 중상을 입혔는데, 그 자객은 평양사람 이재명이라 즉시 포박되었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 12. 23.).

이재명의 칼에 맞아 인력거꾼 박원문은 즉사했고, 이완용은 폐와 신장에 치명상을 입었다. 이재명(1890~1910)은 평안북도 선천(宣川) 태생으로 평양에서 성장했다. 1904년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이주했으나, 제1·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국권 회복을 위해 1907년 나가사키를 거쳐 귀국했다.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순행했을 때, 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동지를 규합해 평양역 부근에 대기했으나 순종의 안전을 우려한 안창호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 후 연해주로 망명해 국권 회복의 길을 모색하던 중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기 위해 귀국했다.


거사 당일 이재명은 육혈포(권총)와 칼을 품고 군밤장수로 위장해 종현천주교당 앞에서 이완용을 기다렸다. 그는 평소 육혈포로 이완용을 심판하겠다고 별렀지만, 무슨 까닭인지 거사에서는 육혈포 대신 칼을 이용했다. 그 덕분에 이완용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여생을 해수병 천식 폐렴에 시달렸다. 이재명은 체포된 이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이재명을 포박할 때에 방관자가 구름같이 모였는데, 그 신색이 자약(自若)하여 사방으로 돌아보며 왈 '너희 등은 어찌 나를 돕지 않고 방관만 하느냐' 하고, 또 하는 말이 '내가 오늘날 우리나라 원수를 죽였으니 쾌하다, 쾌하다' 하고 만세를 부르며 방관자에게 궐련을 청하여 먹는데, 그 거동이 여상(如常: 평소와 다름없음)하더라더라."('신보' 1909. 12. 24.).


재판 과정에서 판사가 배후를 묻자 이재명은 "이완용을 살해한다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치 않을 자 없을 것이오. 이천만 동포 모두가 배후요"라 답변했다. 증거물로 제시된 칼이 "행흉(行凶)할 때 사용된 것이냐"는 질문에는 "행흉하는 데 쓰던 것이 아니라 매국노 이완용을 죽이는 정의를 위해 사용된 것"이라 답변해 방청석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재명은 강제합방 보름 후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가 이완용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강제합방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거사는 한국인들이 합방을 원치 않으며 매국노는 언제든 처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이 사건으로 이동수, 조창호, 김정익 등 11명의 관련자들도 중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고, 2001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명동성당 입구 쪽에 의거터가 표석으로 표시되어 있다.


박상우의 장편소설 《칼》이 이재명과 그의 의거를 소재로 한 것이다.

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1/06/20100106023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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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호텔(Bando Hotel).: 일본인 노구찌(野口)에 의해서 미국 버팔로 스타틀러(Buffalo Statler)호텔의 경영방식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1936년에 경성 을지로1가에 세워진 8층의 콘크리트 건물로 객실 111개를 보유한 당시 시설규모로 한국 최대의 것이었다.



반도호텔에서 본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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