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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22 삼호쥬얼리 선원 구출작전
  2. 2011.01.22 조선의 마지막 공주, 마지막 왕녀
  3. 2011.01.21 1968년 1월 21일
  4. 2011.01.20 조봉암(曺奉岩)
2011. 1. 22.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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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曺奉岩)  (0) 2011.01.20
Posted by qlstnfp
2011. 1. 22. 11:17

조선의 마지막 공주는 순조의 막내딸 덕온공주, 마지막 왕녀는 순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다.


조선은 왕의 적녀를 '공주'로, 왕의 서녀를 '옹주'로 봉했다.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1822년 출생한 덕온공주는 1837년 16살 때 윤의선과 결혼했지만 7년 뒤인 1844년 2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 외에 귀비 엄씨, 귀인 이씨, 귀인 장씨, 소의 이씨, 귀인 정씨, 귀인 양씨 등 총 7명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식들을 뒀지만 모두 단명했다.


고종은 명성황후와의 사이에서 장녀인 아지공주를 뒀고 귀인들과의 사이에서 세 옹주를 뒀지만 귀인 양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덕혜옹주를 제외한 딸 세 명은 모두 정식으로 봉해지기 전에 사망했다. 정식으로 봉해진 최후의 왕녀는 '덕혜옹주'인 셈이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인 1912년 덕수궁에서 출생한 덕혜옹주는 고종과 복녕당 귀인 양씨 사이에서 난 고명딸이다.


그녀는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왕족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탐탁찮아했던 일본 총독부 때문에 9살이던 1921년까지 이름 없이 '복녕당 아기'라고 불려야 했다. 1919년에는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했다.


덕혜옹주는 1921년 5월4일 옹주로 봉해졌지만 곧바로 서울의 히노데(日出) 소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야했다. 또 19살이었던 1931년 5월8일 쓰시마섬 도주인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해야 했다.


그녀는 1922년 8월18일 딸 마사에(정혜)를 낳았지만 출산 후 정신쇠약과 몽유병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 1955년 마사에가 행방불명되면서 증상이 악화돼 1958년에 남편 소 다케유키에게 버림받고 도쿄 인근의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다.


덕혜옹주는 박정희 정권 당시였던 1962년 1월26일 오후 12시35분 김포공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다. 이후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21일 타계했다.











현존하는 고종의 직계 후손은 둘째아들인 의친왕의 후손들 뿐인데

의친왕은 정부인인 덕인당 김씨 등 10여명의 부인을 뒀고 이들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12남9녀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liberum&folder=22&list_id=6660925&page=


의친왕의 자손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구황실재산 관리법'을 만들어 황실 소유의 모든 재산을 국유화하고, 6·25전쟁 피난길에 의친왕이 짐보따리를 도둑맞으면서 곤궁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마지막 황세손이었던 영친왕의 아들 이구씨가 2005년 일본의 한 호텔에서 숨진 후 전주이씨 종약원은 2005년 영친왕 가계의 양자로 입적한 이원씨를 황실 후계자로 내세웠다.


하지만 대한제국 황실이 약 1년 뒤 의친왕의 둘째딸 이해원씨를 여황(女皇)으로 추대하면서 현재는 왕손들 사이에서 '적통성'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이해원씨의 삶도 순탄치는 않았다. 그는 1936년 경기여고를 졸업한 후 남편 이승규씨와 결혼했지만 한국전쟁 때 남편이 강제 납북됐고 이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10121_0007214065&cID=10301&pID=1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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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11. 1. 20. 15:31

조봉암(曺奉岩)




1898년∼1959년. 정치인.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죽산(竹山). 경기도 강화 출신.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YMCA 중학부 재학중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그뒤 일본에 건너가 주오대학(中央大學)정경학부에서 공부하던 중 우리나라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사회주의·무정부주의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흑도회가 해산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국내의 항일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문화부책을 맡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22년 소련령 웨르흐네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합동회의에 국내파 대표로 참가하여 공산당 파벌 통일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뒤 통합대회 결렬사유를 모스크바 코민테른대회에 다른 대표와 함께 보고하였다.


1924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주의지도자 양성기관인 모스크바 동방지도자공산대학 단기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뒤 귀국하여 신사상연구회·북풍회 등 사회주의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이 두 단체가 통합한 화요회에서는 창설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조선공산당 1차당 창당을 주도하였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을 수습, 조직하고 5월에 만주에 가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하였으며 그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뒤 코민테른의 지시로 상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의 조선대표도 겸직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에 제2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일본경찰에 의하여 다시 해체되자 제3차당인 ML당조직에 참여하였으나 국내당과 마찰을 빚어 지도기능을 잃었다.


그뒤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1국1당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32년 일본 영사경찰에 의하여 상해에서 붙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김조이(金祚伊)와 결혼하고 인천에서 은거생활을 하였으며, 일본경찰에 의하여 요시찰인으로 일체의 대회활동이 중지되었다.


1945년 2월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어 다시 수감되었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에서 활동하였고, 1946년 사회주의계열인 민족전선에서 활약하였으며, 그해 5월 박헌영(朴憲永)의 공산주의노선을 공개서한을 보내어 비판하였다.


1개월 후인 6월에는 조선의 건국은 ‘민족 전체의 자유생활보장’을 내걸고 노동계급의 독재, 자본계급의 전제를 다같이 반대한다는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고 조선공산당과 결별하였다.


그해 8월 이후부터 미군정당국의 좌우파합작을 지지하고 협력하였으며, 1948년 5·30선거 때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초대농림부장관이 되었다.


1949년 농림부장관 관사수리비를 농림부 예산을 전용하였다가 국회에서 문제가 되어 그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고, 1950년 제2대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임되었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다가 차점으로 낙선되었고, 1956년 12월 혁신계 인사들로 구성된 진보당(進步黨)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 제3대정·부통령선거에 박기출(朴己出)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워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였다.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58년 5월 국회의원선거에 지역구후보를 내세워 원내에 진출하였다.


죽산은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맞서 80여만표와 200여만표를 얻는 등 대중적인 지지를 넓혀가고 특히 3대 대선에서 30%의 지지율을 얻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위협적인 정적으로 떠올랐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죽산에게 1958년 1월 간첩 양명산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전격 구속한다.



같은 해 7월 당시 1심 재판부는 간첩혐의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는 유죄로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검찰은 즉각 항소하면서 죽산의 변호인단을 구속하는 등 압박에 나섰고, 항소심 재판부는 세달뒤 국보법 위반에 형법상 간첩죄까지 추가해 죽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림출처 http://j.mp/egzrhy


그림은 http://j.mp/gWe1GK


3심에서도 사형이 선고돼고 1959년 7월 재심 청구가 기각되면서 사형이 확정, 1959년 11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조선일보 1959년 8월 1일자 지면 http://j.mp/egzrhy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 없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조봉암 선생이 남긴 유언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2011년 1월 20일 이승만 정권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혐의로 기소돼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봉암 선생에 대한 재심 사건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무죄 선고로 사형 집행 반세기 만에 간첩 누명을 벗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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