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11. 21:10

헌법까지 뜯어고쳐 당선된 박대통령 3선의 임기가 끝나갈 무렵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르던 김종필..

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박정희는,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길재호 등 이른바 "공화당 4인 체제"의 후원자가 된다.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110040032920100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1-10-04&officeId=00032&pageNo=1&printNo=8002&publishType=00020



대통령 박정희가 후원자인 이 4인 체제는 공화당의 재정. 공천. 운영 등 전국 정국의 전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여 내무와 경찰. 수도 서울은 물론 전국 시도의 시장과 군수. 도청의 국장이나 구청장을 임명시키는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이중 국무총리에 대한 욕심이 있던 김성곤은 박정희의 3선 임기가 끝나면 헌법을 개정해서 내각에 실권을 주는 2원집정제를 구상하여 개헌에 대한 이야기를 당시 야당 당수였던 유진산에게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절대권력자요, 권력의 이양의 뜻이 없었던 박정희로써는 이 김성곤의 내각책임제 개헌과 국무총리 욕심을(실제는 박정희대통령의 3선 임기가 끝난후 후계를 노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구상이었다


당시 당내 주류인 ‘4인 체제’와 3선개헌 뒤 총리로 복귀한 김종필 진영 사이의 알력 다툼....


해임안 의결 두달 전 ‘반 4인체제’인 오치성 내무 장관이 전국 시장·군수·경찰서장 인사를 통해 4인 체제와 줄이 닿아 있던 인사들을 경찰 간부 220명을 권고 해임시키거나 인사 이동하였으며, 이어 시장. 군수. 구청장. 도청의 국.과장 204명을 인사 이동해 버렸는데, 이는 4인체제의 밑바탕을 흔드는 것이었다

오치성 내무부장관의 이러한 인사단행은 공화당 내부에서 너무 커버린 "4인방" 이들을 견제 해놓자는 박정희대통령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는데, 집권자 박정희의 발이 돼야 할 내무와 경찰 관료나 전국 시장군수와 고위 공무원들이 자기가 키우기는 했지만 너무 커버린 4인방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것에 따른 박정희의 조치.



1971년 9월 30일 야당인 신민당이 물가폭등, 실미도 사건, 광주대단지 소요 사태 등을 이유로 김학렬 경제기획원, 신직수 법무, 오치성 내무장관의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냈다.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공화당의 총재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당에 해임안을 부결시킬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상당수 여당 의원들이 표결에서 이탈해,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이 10월2일 국회를 통과했다. 백남억 당의장, 김성곤 중앙위의장(쌍용그룹 창설자), 김진만 재정위원장, 길재호 정책위원장 등 공화당을 이끌던 ‘4인 체제’의 이른바 ‘10·2 항명파동’이었다.



박정희의 속뜻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4인방"은 공화당 내부 자신들 계파의원들과 합작하여 1971년 10월 2일 야당이 상정한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결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버렸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냈고,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항명주동자를 색출해 엄중히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즉각 김성곤, 길재호 등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에 찬성표를 던진 공화당 반란 주동자 전원을 남산으로 끌고왔고, 끌려온 의원들은 발가벗겨져 말 그대로 개처럼 얻어맞았다


여당 의원들의 헌법기관으로서의 ‘권한 행사’는 박 대통령에게는 ‘항명’으로 해석됐고, 중정이 즉각 행동에 나섰다.

당내 실력자로 중간보스 구실을 하던 ‘4인’을 비롯해 20여명의 현역 의원들이 속속 남산으로 끌려갔다. ‘주모자를 대라’는 취조와 고문이 이어졌다.

중정 창설요원이었던 강성원 의원이 마대에 씌워진 채 각목 세례를 받고, 당의 ‘자금원’으로 사실상 당내 2인자였던 김성곤 의원이 조사관들에게 마스코트였던 콧수염을 뜯기고 발가벗겨진 채 고문을 당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길재호는 몽둥이로 죽사발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결국, 박 대통령이 “(자금) 덕분에 총선을 잘 치렀다”고 고마워했던 김성곤 의원과 5·16쿠데타 주체였던 길재호 의원(육사 8기)은 ‘항명’을 주도한 혐의로 의원직을 잃고 정계에서도 퇴출됐다. 당시 중정 요원들에게, 헌법상 면책특권 조항은 그 위에 군림한 ‘대통령의 명령’ 앞에서는 종이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김성곤과 길재호는 탈당계를 썼고, 탈당계는 지체없이 접수되어 의원직을 자동으로 상실했으며, 이것으로 박정희의 권위에 까불고 도전했다가

그야말로 "개처럼 얻어맞고 생똥"을 싼 4인체제는 사라져 버렷다(중장정보부원에게 몽둥이로 얻어맞으며 정말 쌩똥을 쌋다고 당사자는 증언한다)


그 후 박정희대통령은 여당 공화당에서 자신이 아닌 실세가 등장하는 것을 용납치 않았으며, 누군가 실세로 부상하는 기미가 보이면 김종필이나 저 "4인방"처럼 국회의원들도 영장없이 잡아다 몽둥이로 두들겨패며 가차없이 처단을 해버려 당을 강력히 장악, 친정체제를 구축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마침내 유신 독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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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