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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03 콥트교회 (COPTIC CHURCH)
- 2011.01.01 품바의 고향
- 2010.12.29 가슴 저렸던 이야기
- 2010.12.29 2009년 1월의 Madoff
이집트의 폭탄테러...콥트교인 21명이 사망. 부상자 다수....
듣기 생소한 콥트교회는?
◈콥트교회의 유래
콥틱 교회는 세계 교회 중에서 아주 역사가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A.D. 260~340경)에 따르면 전도자 마가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마가가 말년에 이집트로 건너와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면서 콥틱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콥틱교회는 자기들의 교회 원년을 서기 284년으로 한다. 이 해는 디오클레시안 (Diocletian)이 로마 황제로 즉위한 해다. 교회 역사에서는 이 황제의 통치 기간을 ‘순교자의 시대’라고 부른다. 극심한 교회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콥틱교회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교회다. 또 그들이 콥틱어로 번역한 신약성경은 오늘날 성경사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틱교회는 세계교회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서기 451년 칼세돈 (오늘날 터키지역)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에서 콥틱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콥틱 교회는 사도 마가가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인정하나 칼케돈 교회회의에서 결정된
그리스도를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양성론(兩性論)를 따르지 않고, 단성론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신성만 인정하고, 인성을 부정한다. 그래서 칼케돈회의를 계기로 양성론을 따르는
로마 교회로부터 독립한 이후 세계교회의 주류에서 멀어지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콥트’란 명칭
‘콥트’란 명칭은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들어온 무슬림들이 7세기 이집트영역을 정복했을 때
그들은 이집트인들은 그리스어로 (ai)gupt(ios) 불렀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사람들의 핍박과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남쪽 이집트 도시 ‘콥토스’(오늘날 쿠프트,구브탄)에 주로 살고 있었다.
콥트란 용어는 초기 이집트인을 순전히 인종적 차원에서 지칭한 것에서 이집트인 중 기독교인을 일컫는 인종-종교적인 의미가 되거나 콥틱교회의 예배의식을 일컫는 순전히 종교적 용어로 변한 것이다.
콥틱교회는 서기 641년 이집트가 이슬람교도들인 아랍인들에게 정복 당한후 이슬람교 밑에서 많은 역사의 풍상을 겪어오면서도 오늘날까지 그들의 신앙을 굳게 지켜오고 있다.
이집트는 아랍어권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 인구를 가진 나라로 그 수가 1359만명에 달한다. 이는 전 인구의 12%에 이른다. 하지만 프랑스 학자 필립 파르지스는 기독인들은 전 인구의 5%에 해당하는 350만명이라고 추정한다. 기독인들의 90% 이상은 콥트교도들이다. 그밖에 로마가톨릭과 소수의 개신교가 있다.
현재도 이집트에서는 주교회의에서 선출된 교황이 지도하는 콥틱교회가 유아세례 집전,콥틱교회 신부들과 주교들의 수도원 운동등으로 이집트의 기독교 신앙을 유지시키고 있으나, 이슬람의 물질공세로 인한 기독교인들의 이슬람으로의 개종,극우 이슬람교도들의 교회 습격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황선출
칼케돈 공회의에서 이단이라는 선고를 받게 된후. 콥트교회는 독자적인 교황을 세워서 독립적인 길을 걷고있다 . 콥트교회의 초대교황은 성 마가이다..콥틱교회는 초대 교회 당시부터 전혀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많다. 그들의 생활방식이나 종교관은 그 대부분이 성경에 기초하여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콥틱교의 교황선출은 최초에 모든 콥틱교도가 투표를 하여 교황 후보 10명을 정한다. 두 번째에는 5,000명의 콥틱교도가 투표에 참가하여 후보를 2명으로 좁힌다. 다음으로 최종 결정은 하늘의 뜻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나서 어린이에게 제비뽑기를 시켜서 결정한다.
◈콥트교회의 두 기둥
엄격한 예배의식과 콥트 기독인들을 응집케 하는 교황의 권위와 지도력, 사막에 운둔하며 많은 영적인 지도자들을 배출한 수도원의 영성은 오늘날의 콥트교회를 지탱해주는 힘이다. 콥트교회의 교황인 바바 슈누다(바바란 이집트어로 아버지란 뜻)와 마카리우스 수도원의 마타가 바로 그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콥틱교회의 슈누다 교황은 어느 때이든 성도들이 질문하는 것을 허락한 최초의 교황이다. 성경강해 시간이 시작되면 성도들의 질문이 적힌 작은 쪽지들이 교황에게 전달된다. 교황은 가끔 유머를 섞어가며 모든 사람의 질문에 대답한다. 슈누다 교황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콥트 신학교교육을 새롭게 확장시켜나가 신학생 수를 3배나 늘렸다. 1900년에서 1961년 사이에 500명의 신학생들이 배출된데 비해 1964년부터 1994년까지 배출된 신학생은 2300명에 이른다. 그들 중 주교가 된 사람들도 많다.
한편 마타는 초기 교회 선배들의 엄격한 연구에 기초를 두고 영적인 발전을 도모했다. 많은 이들이 수도사적인 삶에 동참했고 개혁적 수도사 그룹을 형성했다. 마타는 1969년 6명의 고령의 수도사들만이 있는 마카리우스 수도원을 재건해줄 것을 부탁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건물은 붕괴됐으며 주위의 땅 또한 방치됐었다. 현재 마카리우스 수도원은 농업프로그램으로 풍성함을 누리고 수도사들도 100명에 달한다. 또 100여권의 콥트 신앙문서를 발간했다.
콥틱교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부활절이다. 부활절의 40일 동안 그들은 단식을 한다. 고기와 달걀류는 금지되어 있으나 생선과 야채는 먹어도 되며 식사는 평상시와 같이 한다. 부활절 직전의 일요일에는 어린이들이 야자 잎의 표피를 벗겨내어 그것으로 열심히 장신구를 짜서 완성된 십자가나 물고기, 집 모양의 세공품을 교회로 가져가서 서로 축복을 해준다. 이 장신구들은 이듬해 부활절까지 각 가정에 장식된다..크리스마스는 콥틱 정교파는 동방교회에 따라, 신파는 서방교회에 따라 축제날을 정하고 있어서 같은 콥틱 교도라 할지라도 정교파는 1월 7일이며, 신파는 12월25일로 되어 있다.
◈콥트교회의 풍습과 결혼 장례
콥틱교도는 일생에 통과하여야 할 몇 가지 독특한 의식이 있다. 우선 아기가 태어나면 유아 세례를 주고 콥틱 계통의 이름을 지어준다(이집트에서는 이름을 보면 그 사람이 콥틱교도인지, 모슬렘인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고 한다). 다음에는 콥틱교도라는 증거로 한쪽 팔목 안쪽에 십자가 모양을 새겨 넣는다.
이것은 산양 젖에 담궈 놓았던 바늘로 피부에 십자가 모양을 문신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겪었던 고통을 직접 느끼면서 콥틱교도임을 더욱 자각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2-3일이 지나면 십자가 모양을 문신한 부분은 양젖과 피의 혼합작용으로 검푸르게 되며 아픔도 멈춘다고 한다. 이때 할례도 같이한다.
이슬람 교도와 콥틱교도는 각각의 종교제도와 자신들의 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속에서 생활하고 있으므로 결혼도 같은 종교인들끼리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상대방이 이교도라 할지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할 사람이라면 결혼을 할 수 있으나 콥틱교에서는 그러한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콥틱교도는 선택할 수 있는 결혼 상대도 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결혼 자금 등에 대해서는 콥틱교도도 이슬람 교도와 비슷한 듯하다. 다만, 결혼식은 교회에서 행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참가한 성직자들이 1인당 30-40분씩이나 설교를 하여 매우 긴 의식이 되고 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장례식도 교회에서 거행되나 매장 절차 등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내려온 관습이 아직 남아 있다. 시체는 방부제를 주입시킨 뒤에 미라처럼 백색붕대로 칭칭 감아서 관에 넣는다
결국 콥틱교회는 교리적 차이로 동방정교회와 갈등을 빚다가, 이집트가 이슬람화되면서 대다수의 콥틱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무거운 세금 징수라는 탄압을 견디면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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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생애를 만나러 가는 길, 먹구름이 몰려다니다가 간혹 비를 뿌린다. 그의 집 마당이 천천히 젖는다. 그 사람이 태어난 집에 그는 없고, 집은 아득하게 홀로 서 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웃음이 가슴을 먹먹하게 적신다. 꼭 한 번쯤은 풍경의 깊이가 아닌 사람의 내면을 대면하러 떠나는 길도 괜찮겠다.
밥이 하늘이었던 시절 숟가락으로 깡통을 치며 낮은 자리의 장단을 완성했던 사람이 있다. 그 장단 안에는 때로 분노가 담겼고, 삶의 역설 같은 풍자가 스몄다. 사실 그 장단이 진정으로 겨냥했던 것은 가슴 뭉클한 해학이었다. ‘천사들의 웃음’이었던 장단의 시초가 전남 무안군 일로읍 의산리에 있다. 일로역에서 동남쪽으로 무안 중학교를 지나 인의산을 가는 길목인 밤나무골 공동묘지 아래가 天使村(일명 걸인촌)이다.
어느해인가 한해가 들었는데 이곳 일로에만 유독히 걸인들이 모여들어 주민 대표들이 모여 "어찌 한해가 들었는데 이곳으로만 모여드느냐?"고 불평했더니, "타향에서 괄세 받고, 푸대접 받다가 이곳 일로에 오니 문전박대 않고 한 끼니만 있어도 나누엊는 지라, 고향에 온 기분으로 떠나지 않고 눌러 앉았다."고 걸인들이 대답하니 주민들은 오히려 그들의 사정을 불쌍히 여겨 더욱더 도와준 후로 천사촌이 이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품바’는 무안 일로읍 의산리 천사촌에서 시작한다. 그 땅에서 판자를 잇대고 거적때기로 지붕을 덮어 살았던 걸인들의 삶이 ‘품바’다. 그 걸인들의 아버지였던 사람 천장근은 연극 ‘품바’의 근원이다.
천사촌의 하늘이었던 사람 천장근. 그의 본명은 천팔만이었고, 김작은이나 천작은으로도 불렸다. 많은 이름은 심상치 않은 이력 탓이다. 그는 일제 때 목포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다가 일본으로 실려 나가는 공출미에 반발하며 파업의 배후가 됐다. 그 사건으로 수배를 받아 도망자로 살았으며 이름을 수없이 바꿨다. 걸인 복장으로 곳곳을 떠돌다 그는 일로 천사촌에 자리를 잡았다. 왜 거기였을까?
“옛날부텀 원래 일로가 인심이 좋아. 걸인들을 괄시하지 않고 한 끼니만 있어도 나눠주고 했제. 근께 천장근이 그 냥반이 거지꼴로 일본 순사들 피해 댕기다가 일로를 고향 삼아 눌러 앉저분 것이제.”
천장근. 그가 천사촌에 터를 잡자 수많은 걸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걸인들은 제 입만 구하지 않았다. 동냥한 음식으로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나 병든 노인을 데려와 보살피는 일로 나눔을 실천했다. 천장근의 동냥 철학은 아름다웠고, 천사촌의 규모는 자꾸 늘어났다. 100명도 넘는 걸인들이 자리를 구했고, 천사촌은 걸인들의 나눔 공동체가 됐다.
천장근의 철학은 엄격한 규율을 세우는 것으로 완성됐다. 그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동냥을 하지 못하도록 했고, 부녀자를 희롱하는 자는 얼굴만 내놓고 모래에 묻었다. 반대로 인심을 얻지 못한 부자집이나 양반네들은 가시 담긴 타령으로 비꼬았다. 동냥으로 아름답게 세월을 건너갔던 천사촌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은 박정희 정권 때다. 주민등록법이 발효되면서 걸인들이 어쩔 수 없이 연고지를 찾아 떠났다. 그 무렵 구걸도 금지되면서 천사들은 소멸했다.
천장근...그도 땅꾼, 막노동꾼으로 지내며 1972년 60여세로 타계하였으며 현재 외동딸과 외손자 7명만이 있으며 직계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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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ummate Trader
On December 12, 2008, Bernald L. Madoff was arrested by federal agents accusing him of running a multibillion-dollar Ponzi scheme, perhaps the largest in Wall Street's history.
Madoff Securities
For many years, Madoff ran a highly regarded investment firm that delivered consistently and, critics say, suspiciously profitable returns.
Palm Beach
Many of Madoff's victims were the wealthy members of an exclusive golf club in Palm Beach, where the Madoffs kept their own home, above.
The Yacht
"Bull", 55 feet long, is anchored in Juans Les Pins, southern France.
The House in France
The Madoffs also kept a home in this gated community.
Busted
The authorities estimate that Madoff's victims may have lost as much as $50 billion.
Media
Madoff's victims include luminaries of Hollywood and the New York power elite.
Poker Face
Madoff ran his business with several family members. None of them have been charged.
It's Over
Madoff is currently under 24 hour watch, living at his home in Manhatt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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