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8. 6. 22:59

연암 박지원( ·1737∼1805)이 친구 박제가에게 보낸 짤막한 편지다.

암호문 같은데....

진채() 땅에서 곤액(딱한 사정)이 심하니, 도를 행하느라 그런 것은 아닐세. (중략) 이 무릎을 굽히지 않은 지 오래되고 보니, 어떤 좋은 벼슬도 나만은 못할 것일세.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이. 여기 또 호리병을 보내니 가득 담아 보내 줌이 어떠하실까?”

여러 날 굶었으니 돈을 꿔 달라는 부탁인데 이왕 돈 꿔 주는 김에 술도 보내라는 내용인즉, 그 은유와 해학이 놀랍다

권신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으로 도피한 연암은 1780년(정조 4년) 친척 형인 박명원이 진하사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갈 때 동행한다.

병자호란을 겪고도 소중화() 사상과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당쟁에 골몰하던 조선사회에서 청국기행 중 러허()와 베이징()의 신문물을 본 느낌을 바탕으로 조선에 대한 비판과 개혁 방향을 제시한다.

그 책이 우리가 잘 아는 ‘열하일기()’다.


요즘 소인배들은 은유, 해학의 여유가 없는 모양이다.

입만 열면 남의 탓 하기 바쁘다.

관련글: 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6/2009062600599.html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