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4. 00:12

싱가포르에서 뉴스를 보면 심심찮게 시체들을 볼 수 있다.

그냥 곱게 죽은 시체들도 아니고 각종 사고와 테러로 죽은 참혹한 광경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뉴스화면 나가기 직전에 캐스터가 “불쾌한 장면이 있다” 라고 간단한 코멘트만 할 뿐이다.



인류가 생긴 이래 권력은 항상 공포를 이용해 대중 다수를 통제해 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초자연적이고 주술적인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다. 인간에게 보편적인 죽음의 공포를 이용해 구원과 처벌이라는 허구로 인간을 다스리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을 괴롭히던 그러한 공포들은 그 대부분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지와 왜곡된 마음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어떤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공포를 이용한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는 새로운 형태의, 더 많은 종류의 공포를 탄생시켰다.

다른 인종, 다른 국가, 다른 계급,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 . . . 이들은 모두가 적에 대한 공포이며, 이는 차이에 대한 공포이다.

차이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고립하게 하고, 불화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불편해 하는 우리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무섭다.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은

적이 쳐들어오면 내가 너희를 지켜 준다!

네가 다치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막아 준다!

굶어 죽지 않도록 내가 보호해 준다!

배려와 보호의 이름으로 사람을 무섭게 하면서, 자주 공포마케팅을 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 공포정치는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들이 쉽게 피로를 느끼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실상을 알게 되면 사라지게 되고

증상이라고 부르는 지극히 역사적인 현상이 너무 어이없게도 아무 것도 아님을 알게 될 날이 온다


지나고 나면 그것에서 벗어나는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허탈해진다.


공포란 역사적인 배경과 나름대로의 생존 이유에 의해 생겨난다

다만 그 제공이 유연하지 않아서 필요한 때와 필요하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필요에 따라 시도 때도 없기에

겪는 자는 매우 고통스럽게 느낀다.


따라서 자신의 공포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 이해하는 것,

공포가 필요한 때와 필요하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것들이 그 것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필요하다.


혼자서 하기는 어렵고,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부탁한다.


‘공포마케팅’은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 유전자 속에 대물림되는 두려움을 판매에 이용하는 기법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고통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는 것은 좋은데 제발 좀 살살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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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