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0. 13:50

남 부러워할 것이 없어 보이던 재벌이

며칠전은 연속극의 주요인물이

어제는 생활고에 지친이의 자녀동반

오늘은 한 젊은이의 세상 떠남이 언론에 소개되었다.

매일 듣고 보는 자살은 금기와 명예의 두 얼굴을 지녔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학파는

독재자의 폭정, 질병과 고통, 지독한 가난 등 특정 상황의 경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자유를 인정했다.


유럽인은

목을 매는 자살을 경멸했다. 죽는 사람은 땅과 직접 맞닿아야 대지가 망자를 품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노예의 자살은 법으로 금지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을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기는 행위로 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살이 사회에 대해서도 부당한 짓이라고 했다.

중세 교회와 귀족들은

권력 행사 대상과 노동력이 준다는 이유로도 자살을 금했다.


따라서 자살자의 신분에 따라 추앙받는 죽음과 조롱받는 죽음이 갈렸다.


귀족이나 성직자들의 자살은

명예로운 죽음으로 인정된 반면,

하층민은

주검조차도 공개재판을 받고 잔인하게 훼손당했다.

근대 계몽기 들어 자살은

‘처벌’ 대상에서 ‘치료’ 대상으로 바뀌었다.


17~18세기에는 하층민과 도시 노동자, 어린이들의 자살이 급증했다.(게르트 미슐러, 〈자살의 문화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년)이 출간되자 젊은이들의 모방자살(베르테르 효과)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몇 해 전 언론의 자살 보도에 관한 원칙을 발표했다. 잘못된 보도 행태가 모방 자살, 이른바 ‘베르테르 효과’를 부추긴다는 이유에서다. 내용은 이런 것들이다. 유명인의 자살은 될수록 지면과 단수를 최소화하라. 주검과 현장, 자살 수단의 사진을 싣지 마라. 복잡한 자살의 동기를 단순화하거나, 고통에 대처하는 선택이나 해결책인 것처럼 표현하지 마라.


유서 등을 통해 명백한 자살 동기가 드러나지 않을 때, 언론은 습관적으로 심리적 문제에 눈을 돌린다. 그러나 자살예방 단체들은 의료산업이 지속적으로 ‘우울증=자살’이란 마케팅을 통해 상품화한 논리이며, 이로 말미암아 빈곤과 가치관 혼란 등 더 중요한 사회적 요인들이 은폐된다는 것이다.


아득한 성자(聖者)

- 오현스님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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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