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0. 00:16

역사가 기억하는 인플루엔자 대유행은 18~19세기만 5~10번이나 있었다. 1889년 유행 땐 유럽에서 25만여명이 죽었다.


1918년 3월 미국 시카고 부근에서 시작한 괴질이 그 해 8월 15일, 아프리카 서해안의 영국 보호령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 부근을 거쳐 발병 원인도 모른 채 1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 유럽, 전 세계로 퍼져갔다.


각국마다 발병 사실을 숨겼다.

대부분 국가의 방송들은 전시체제 아래서 언론통제가 심해 정확한 보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1차대전의 참전국이 아닌 스페인은 전시 보도 검열이 이뤄지지 않았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 다른 나라들보다 방역과 구제사업에 충실할 수 있었다.


스페인 방송들은 당시 유럽을 강타한 독감에 대해서도 보도했다. 방송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심한 폐렴을 동반한 독감으로 쓰러지고, 시체가 되고 있는 동료들이 바로 스페인 방송이 보도한 독감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군인들은 이 독감을 스페인 독감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결국 이 이름으로 고정돼 버렸다.


50만명 이상이 숨진 미국에선 공공장소에서 재채기나 기침을 금했다. 일본도 48만명이 숨졌다.

전 세계적으로 2,500만~5,0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수보다 3배나 많은 숫자이다.












1919년, 조선 땅에도 들이닥쳐 환자가 742만명이었고 13만9000명이 숨졌다고 경무총감부 조사 결과를 인용해 이듬해 1월 <매일신보>는 보도했다.

1951년 병리학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26세 요한 훌틴이 알래스카 에스키모 마을 브레비그의 공동묘지를 찾았다.

거기 묻힌 이들은 1918년 스페인 독감 희생자들이었다.

스페인 독감의 바이러스를 찾아 그 원인과 확산경로, 대처방법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신의 허파조직을 떼냈지만 바이러스 배양에 실패했다.


훌틴은 미군병리학연구소 제프리 토벤버거 박사가 창고에 보관돼 있던 스페인독감 희생 군인들의 폐에서 독감 바이러스의 기질 유전자를 추출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97년 8월 72세 병리학자 훌틴(Dr. John Hultin)이 그는 평생 회한(悔恨)이었던 그 곳에서 곡괭이로 무덤을 파고 있었다. 2m쯤 파자 중년여인의 시신이 썩지 않은 채 드러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시신에서 허파를 꺼냈다. 여인의 폐 조직은 토벤버거에게 건네졌다.

2005년 토벤버거 연구팀은 바이러스 유전자를 해독했다.

노(老)학자의 집념으로 밝혀진 스페인 독감의 정체는 사람끼리 전염되는 조류 인플루엔자(AI)였다.











우리가 신종인플루엔자라 부르는 SWINE INFLU는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H1N1)의 변종이다.


SWINE INFLU라는 이름이 나온 것도 스페인 독감이 기승을 부리던 1918년 미국 중서부에서 돼지들이 콧물과 열이 나면서 하룻밤 새 수천마리씩 죽었다. 돼지 증상이 사람의 독감 증상과 같다며 축산업청 조사관이 붙인 이름이 SI다.


SI가 문제된 것은 1976년 미국 뉴저지 군 기지에서 4명이 감염돼 한명이 숨지면서였다. 사람끼리 전염된 것이다.

포드 정부는 1억3500만달러를 들여 인구의 95%, 2억명에게 예방접종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노약자 등 4000만명에게 백신을 맞혔지만 접종받은 사람들이 죽거나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계획은 만신창이가 됐다.

'정치 쇼'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환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재난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상정(想定)해 대비하는 것이다.


그 SI가 33년 만에 멕시코에서 시작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독감은 박멸되는 게 아니고 끊임없이 유전자가 변이하면서 새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1957년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독감, 2003년 조류독감이 그렇다.


그래도 독감이 인간을 무릎 꿇리지 못하는 것은 도처에 훌틴처럼 사명감 넘치는 사람들이 독감과 맞서 싸우는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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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