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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24 수치심이나 도덕성도 문화와 환경의 산물입니다.
- 2013.05.24 포르노그라피는 정치적이다
- 2013.04.15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
- 2013.04.06 4.19 영상기록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1111150955&Section=04
에서 옮겨 온 글입니다
도덕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수치심이나 도덕성도 문화와 환경의 산물입니다. 날씨가 더운 적도 지방에서 의복(衣服)을 기반으로 한 지나친 예절을 따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고대사의 일들을 오늘날의 사고방식으로만 재단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특히 고대에 있어서, 근친혼(intermarriage)은 왕족들이 자신의 혈통을 보호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혼인제도였다.
또한 고대의 왕이나 왕의 직계 혈족들은 항상 암살의 위험 속에서....
만약 왕통이 끊어질 경우에 대비하여 왕의 혈족들을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여러 지역에서 키움으로써 왕가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을 마련했겠지요.
일본 고대사에서 일본 최고의 명문 가문의 하나인 후지와라(藤原)씨의 조상인 나까또미노까마따리(中臣鎌足)의 큰 아들 데이(定惠)는 당시의 코토쿠 천황이 임신한 부인을 총신(寵臣)인 나까또미노까마따리에게 하사하여 낳은 아들이고, 나까또미노까마따리의 또 다른 아들인 후이또(不比等)도 텐지천황(天智 天皇)의 임신한 부인을 나까또미노까마따리에 하사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설이 파다하다고 합니다.
『일본서기』「유라쿠 천황 5년」에 우리와 관련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백제의 가수리왕(加須利君 : 개로왕)은 동생인 곤지에게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라고 말했다. 곤지가 대답하여 '임금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원하건데 임금님의 부인을 내려 주시고 난 후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가수리왕은 임신한 부인을 곤지와 결혼을 시킨 다음 '지금 나의 아내는 이미 아기를 낳을 때가 가까워졌다. 만일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아기를 낳게 되면 부디 같은 배를 태워 속히 돌려보내라'라고 하였다. 곤지는 일본으로 출발하였고 임신한 부인은 쯔꾸시(筑紫)의 카가라노시마(各羅島 : 加唐島)에서 아기를 낳았다. 그래서 그 아기의 이름을 시마키시[도군(島君 : 섬의 임금님)]라고 하였다. 곤지는 배 한 척을 마련하여 이 모자를 백제로 돌려보냈다."
즉 이것은 왕의 혈족들을 분산시켜 믿을만한 심복들에게 양육시켜 왕족을 보호함으로써 국체를 보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습속에 여자를 아래 사람에게 하사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납니다.
전쟁의 노획물로서 여자는 배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예를 들면, 『삼국지(三國志)』에서 인용한 촉기(蜀記)에 "(관우는 유비가 조조군에 합류하여 여포를 궤멸시킨 후) 관우는 조조에게 여포의 부하 중의 하나인 진의록(秦宜祿)을 구해달라고 하고 진의록의 처를 자기에게 달라고 조르자 조조가 이를 허락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엄연히 살아있는 진의록을 두고서도 관우(關羽)는 진의록의 아내를 전리품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목민들(특히 쥬신 : 흉노, 부여, 고구려, 선비 등) 은 여자들이 귀하기 때문에 약탈혼(掠奪婚 : marriage by capture)이 성행하여 결혼의 과정에서 여자가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결혼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유목민 사회에서 여성들은 주요한 전략적인 참모로서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이 나타납니다.
흉노의 경우, 아버지가 죽은 뒤 그 아들이 자기를 낳아준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재산과 첩들을 모두 소유하였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모두루[또는 모돈(冒頓)] 대단군[텡그리고두 : 선우]입니다.3) 모두루 대단군(텡그리고두 : 천자)은 자기를 제거하려는 아버지인 투만(Tumen : 頭曼 - 주몽 또는 샤먼과 유사한 의미)을 죽이고 대단군에 올라 대정복 국가를 세워 한(漢)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唐)나라 현종은 자기의 며느리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바로 그녀가 유명한 양귀비(楊貴妃)였습니다. 당나라도 흉노(선비족)의 피가 흐르는 나라이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일 수도 있겠죠.
농경민과 같은 정주민의 시각에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형수와 같이 산다는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 : Levirate).
『삼국지』「여포전」을 보면, 여포(呂布)가 유비(劉備)를 자기 아내의 침대에 앉혀 아내에게 유비에게 술잔을 따르게 하고 동생으로 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접은 유목민들에게는 최대의 대접이었고 한족(漢族)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야만적인 행위 중의 하나입니다(형수가 시동생을 자기 침대에 앉히고 술잔을 따르다니요?). 대개 침실이라는 것은 성적(性的)인 공간을 의미하고 있으며 술잔을 따르는 것은 다른 형태의 성적 교합(性的 交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포가 하는 행동은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같이 데리고 사는 형사취수혼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삼국사기』에도 고국천왕의 비였던 우씨(于氏)는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서거 후, 그 동생인 산상왕(山上王)과도 결혼하여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목민들에게 나타나는 형사취수혼(兄死娶嫂婚)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라고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유목민들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형수와 같이 산다고 해서 누가 나무랄 사람도 주변에는 없겠지요. 더구나 '없는 살림'에 만약 형이 죽어서 형수가 형의 재산을 가지고 다른 지역으로 가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목민이 가진 재산은 주로 가축인데 이것을 따로 나눠 가지는 것은 가는 사람이나 남아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어려운 상황이 오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형사취수혼과 같은 습속은 보다 경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형이 죽어서 그 형수와 가족들이 분가(分家)해 가버린다면 노동력의 손실은 물론이거니와 재산도 분할되어 모두 다 생존이 어려운 상태가 될 수도 있죠. 또 그만큼의 방목지도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농경민이 보기에는 넓은 초원이 무한대로 펼쳐진 것으로 보이지만, 유목민들에게 초원은 무한의 대지는 아닙니다. 다 나름대로 경계가 있습니다. 한 가구당 일정한 유목지를 가지고서 일정한 간격으로 전체적으로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것이 유목민들의 생활입니다.
유목민 사회는 여자가 귀하고 유목민들은 각자 서로 떨어져 살고 있으니 형수와 같이 산다고 해도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유목민들은 멀리서 손님이 오면 아내와 동침시키는 일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또한 여자가 귀한 유목민들에게 생물학적으로 근친상간(近親相姦 : incest)의 문제가 많이 발생할 수가 있기 때문에 먼 곳에서 이방인이 오면 새로운 건강한 종(種)을 얻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이렇게 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같은 행태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농경민의 사고방식만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최근에 발견되어 화제가 된 필사본『화랑세기』에 나오는 신라시대에 화랑들이나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의해 성행한 마복자(摩腹子) 풍습입니다.
마복자란 글자 그대로는 '배를 문지른 아이' 인데, 지위가 낮은남자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상관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을 말합니다. 이 내용은 내용입니다. 신라 남자들이 부하나 후배의 임신한 아내들과 성관계를 즐긴 풍속으로 이해가 되는군요. 이미 자기의 아이를 임신했으므로 시앗은 바뀔 리가 없으니 자기의 상관에게 아내를 상납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기는 아버지가 여러 명이 될 수도 있겠군요. 아무래도 그 아이에 대해서는 그 어머니와 성관계를 했던 사람들이 자기 자식처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아내와 자식을 이용하는 경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과거 유럽의 군주들도 흔히 신하의 아내들을 자기의 애인으로 삼았습니다.
이 마복자 습속은 여자들이 귀한 유목민들의 습속입니다. 여자가 흔하면 이 같은 습속이 나올 리가 없죠. 유목민들은 농경민처럼 안정적이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잦은 전쟁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또 여자는 귀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습속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에서는 죽은 상관의 부탁으로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가 그 상관의 아내와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성(性)이라는 문제를 떠나서 차원을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러한 행위는 사랑하는 아내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배려일 수도 있습니다. 또 자신의 씨[種]가 가장 안전하게 보호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맡기는 것이죠.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자기의 동생이 되었으니 그것이 형사취수혼이었던 것이죠. 어쨌든 이 같은 행태가 오랫동안 전승되어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대 습속은 일본에서 더 많이 살아있음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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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ibrekim.khan.kr/m/post/view/id/517
에서 옮겨 온글
포르노그라피는 16세기에 최초로 출현했고, 인쇄문화와 동시에 발전했다.
포르노그라피는 인간 본능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관음의 욕구가 배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얻어낸 부산물의 하나다.
린 헌트 미국 펜실베니아대 석좌교수를 비롯한 9명의 역사학자·문화사가들은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원제 The invention of pornography)에서 그 기원을 풀어내 준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의 포르노그라피가 대부분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세계 민주주의의 싹이 된 프랑스 혁명에도 포르노그라피가 막중한 역할을 했다고 대표저자 격인 헌트는 분석한다. 음란 저작물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요 원인은 아니겠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그라피가 만연돼 있는 상황에서 한층 광범한 사회 위기의 전조를 읽었다고 그는 단언한다.
정치적 포르노그라피는 16세기의 아레티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나긴 계보를 지니고 있고, 프랑스 앙시엥 레짐의 마지막 몇 십년간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의 다른 지역에서도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공격의 대상이 된 중심인물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 16세의 왕비 앙투아네트의 성적 비행을 열거한 포르노 팸플릿은 왕위 계승자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토록 해 왕권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혁명파들은 “왕비가 낳은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왕권실추에 결정타를 가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시동생인 다르투아백작 폴리냑공작부인과 집단혼음을 하는 내용을 그린 ‘취한 오스트리아여인’은 당국의 집중단속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왕비가 시종과 정사를 벌이는 포르노그라피는 왕비의 육체에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국가권력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환상을 일으켜 민주주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1740년대와 1790년대 사이에 프랑스의 포르노그라피는 더욱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군주제에 대한 비판이 신랄해져 포르노그라피 팸플릿은 성직자, 궁정, 심지어 국왕 루이 15세까지 공격을 감행해 교회와 국가의 기존 권위의 부패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더욱 빈번했다. 헌트는 그런 점 때문에 ‘포르노그라피와 혁명은 불편한 동침자’로 묘사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포르노그라피는 서서히 성적 자극이라는 기능만을 근거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옥스퍼드영어사전에 원래 그리스어의 매춘부(porne)와 글쓰기(graphos)에서 유래된 단어인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라는 단어가 최초로 수록된 게 1857년의 일이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생적인 포르노그라피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이후, 대중 정치가 출현한 시기다.
외설적이라는 단어와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라는 단어
<언어의 폭력>을 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표적 저항작가는 J. M. 코에체는
외설물은 사회의 도덕감각을 도발함으로써 그 반동력을 상품화하는 주변현상에 불과한 것이어서 도덕적 판단의 여지도 없는것이고
포르노그라피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기존의 터부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미를 가진 행위라며
포르노그라피가 정치적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욕망의 충족을 약속해 주기만 해야지 욕망을 충족시키려 나서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사디즘(가학성 변태성욕)이란 용어의 어원인 사드 후작은
포르노그라피가 지니는 정치적·사회적 전복 가능성,, 그로 말미암아 비정치적 장르의 현대 포르노그라피를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
한 시대의 성의 정치학은 포르노그라피 작가가 창녀를 희생자로 그리는가 아니면, 약탈자로 그리는가에 따라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노버그는 주장한다. ‘자유사상의 창녀’와 ‘정숙한 창녀’ 개념이 그것이다. 정숙한 창녀는 1760년경에 태어났다. 최대의 옹호자는 브르타뉴의 레스티프이다. 레스티프와 그 후의 많은 작가들에게 창녀는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다. 그녀는 불운한 희생자이고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자식이며, 몸은 병들었고 때로는 마음까지 병들었으며 남성과 사회의 가학증을 견뎌야 하는 운명이다. 자유사상의 창녀는 물질주의적 철학에 빠져 있고 감각적 쾌락, 특히 다양한 쾌락에 편안함을 느끼던 로코코 시대의 산물이다. 정숙한 창녀와 달리 그녀는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알지 못하며 검열관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자신의 직업을 비하시키지 않는다. 자유사상의 창녀는 18세기의 다양한 문학 작품에 등장한다. 자유사상의 창녀는 남성의 성욕을 반영하는 것이며, 남성의 육욕을 드러내주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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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쑤(江蘇)성 양저우(楊州)에서 수(隋)나라 양제(煬帝,楊廣 http://j.mp/ZvB141 )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이 발견
양저우시 문물국은 최근 양저우 한장(邗江)구에서 부동산 터파기 공사 도중 20∼30㎡ 규모의 고분 2기를 발굴.
그 중 한 기의 묘지에서 '수고양제묘지'(隋故煬帝墓誌)라는 문구가 발견됐다. 이 기록에 적힌 사망 시기는 양제가 썼던 연호인 '대업(大業) 14년'이라 실제 사망 연대기와 일치
http://collection.sina.com.cn/yjjj/20130415/1050110545.shtml
http://big5.xinhuanet.com/gate/big5/news.xinhuanet.com/photo/2013-04/15/c_124581463_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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