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4.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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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옮겨 온글 


포르노그라피는 16세기에 최초로 출현했고, 인쇄문화와 동시에 발전했다. 

포르노그라피는 인간 본능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관음의 욕구가 배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으로 얻어낸 부산물의 하나다.


 린 헌트 미국 펜실베니아대 석좌교수를 비롯한 9명의 역사학자·문화사가들은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원제 The invention of pornography)에서 그 기원을 풀어내 준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의 포르노그라피가 대부분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세계 민주주의의 싹이 된 프랑스 혁명에도 포르노그라피가 막중한 역할을 했다고 대표저자 격인 헌트는 분석한다. 음란 저작물이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요 원인은 아니겠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그라피가 만연돼 있는 상황에서 한층 광범한 사회 위기의 전조를 읽었다고 그는 단언한다.


정치적 포르노그라피는 16세기의 아레티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나긴 계보를 지니고 있고, 프랑스 앙시엥 레짐의 마지막 몇 십년간 최고조에 달했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의 다른 지역에서도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공격의 대상이 된 중심인물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루이 16세의 왕비 앙투아네트의 성적 비행을 열거한 포르노 팸플릿은 왕위 계승자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토록 해 왕권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혁명파들은 “왕비가 낳은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왕권실추에 결정타를 가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시동생인 다르투아백작 폴리냑공작부인과 집단혼음을 하는 내용을 그린 ‘취한 오스트리아여인’은 당국의 집중단속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왕비가 시종과 정사를 벌이는 포르노그라피는 왕비의 육체에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국가권력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환상을 일으켜 민주주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1740년대와 1790년대 사이에 프랑스의 포르노그라피는 더욱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군주제에 대한 비판이 신랄해져 포르노그라피 팸플릿은 성직자, 궁정, 심지어 국왕 루이 15세까지 공격을 감행해 교회와 국가의 기존 권위의 부패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더욱 빈번했다. 헌트는 그런 점 때문에 ‘포르노그라피와 혁명은 불편한 동침자’로 묘사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포르노그라피는 서서히 성적 자극이라는 기능만을 근거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옥스퍼드영어사전에 원래 그리스어의 매춘부(porne)와 글쓰기(graphos)에서 유래된 단어인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라는 단어가 최초로 수록된 게 1857년의 일이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생적인 포르노그라피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이후, 대중 정치가 출현한 시기다. 


외설적이라는 단어와  ‘포르노그라피’(Pornography)라는 단어


<언어의 폭력>을 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표적 저항작가는 J. M. 코에체는 

외설물은 사회의 도덕감각을 도발함으로써 그 반동력을 상품화하는 주변현상에 불과한 것이어서 도덕적 판단의 여지도 없는것이고 

포르노그라피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고 기존의 터부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미를 가진 행위라며 

포르노그라피가 정치적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욕망의 충족을 약속해 주기만 해야지 욕망을 충족시키려 나서서는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사디즘(가학성 변태성욕)이란 용어의 어원인 사드 후작은 

포르노그라피가 지니는 정치적·사회적 전복 가능성,, 그로 말미암아 비정치적 장르의 현대 포르노그라피를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



한 시대의 성의 정치학은 포르노그라피 작가가 창녀를 희생자로 그리는가 아니면, 약탈자로 그리는가에 따라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노버그는 주장한다. ‘자유사상의 창녀’와 ‘정숙한 창녀’ 개념이 그것이다. 정숙한 창녀는 1760년경에 태어났다. 최대의 옹호자는 브르타뉴의 레스티프이다. 레스티프와 그 후의 많은 작가들에게 창녀는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다. 그녀는 불운한 희생자이고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자식이며, 몸은 병들었고 때로는 마음까지 병들었으며 남성과 사회의 가학증을 견뎌야 하는 운명이다. 자유사상의 창녀는 물질주의적 철학에 빠져 있고 감각적 쾌락, 특히 다양한 쾌락에 편안함을 느끼던 로코코 시대의 산물이다. 정숙한 창녀와 달리 그녀는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알지 못하며 검열관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자신의 직업을 비하시키지 않는다. 자유사상의 창녀는 18세기의 다양한 문학 작품에 등장한다. 자유사상의 창녀는 남성의 성욕을 반영하는 것이며, 남성의 육욕을 드러내주는 거울이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