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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0.08 1950 대구
- 2009.10.01 임응식이 본 1950
- 2009.10.01 1951년 4월
- 2009.09.28 학도병의 편지
1954년 대구...KOREA..... Photo by Adam Ewert,Ph.D.80
자료 입수 정찬권(미국 유학생)...http://blog.naver.com/texasatm...2007.02.06
1주일 전에 와이프가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 미국교회의 Adam이란 할아버지 선생님의 저녁초대가 있었습니다.
한국인들만 초대하는 저녁식사 였습니다. 전에 한국에 가본적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방문을 했었습니다.
처음엔 Adam의 나이 79세, 우리나라로 따지면 80 이었다는것에 잠시 놀랬습니다.
80세의 나이에도 volunteer로 교회에서 외국인을 위한 영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한참이었던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대구에서 2년간 교회의 봉사활동을 자원해서 한국에 왔었다고 하면서,
그당시 찍었던 귀한 한국의 사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http://woorok.tistory.com/category/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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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응식 선생(1912 - 2001)은 우리나라 1세대 사진작가입니다.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나 1931년부터 사진을 찍기시작하였고, 6·25 전쟁 때에는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많은 '기록사진'을 찍었습니다. 전쟁 후에는 우리나라 현대화의 과정에서 보여진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3차공세로 서울을 포기한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삼척을 잇는 37도선까지 철수했다. 이때 미국 등 자유진영의 전쟁지도부는 중공군의 공세에 따른 충격으로 한반도를 포기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8군사령관 릿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은 반격에 나섰다. 그 결과 국군과 유엔군은 2월 10일에는 한강 남쪽에 진출하여 강북(江北)의 서울 도심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3월 중순까지 한강을 도하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도하할 의도가 없었다.
릿지웨이 장군의 판단은 “국군과 유엔군이 월등히 우세한 전투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울을 공격할 경우, 서울에 있는 중공군으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될 것이므로 한강에 의해 퇴로가 차단된 아군부대가 오히려 위험에 빠질 수 있다”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중부지역의 전선(戰線)을 가평~춘천 지역까지 북상시켜 서울의 중공군을 동측방에서 포위하기로 했다. 이 같은 작전 개념에 따라 2월 5일, 국군 제3·5·8사단과 미 제2사단 등이 횡성에서 홍천방향으로 공격하는 라운드업(Round Up)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격 중이던 제5·8사단이 2월 12일 중공군의 4차공세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원주까지 철수하고 말았다. 반면 미 제23연대가 지평리의 고수방어로 중공군의 집요한 공세를 물리쳤다.
중공군의 4차공세가 저지되자 국군과 유엔군은 실패했던 라운드업(Round Up)작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3월 6일부로 리퍼(Ripper)작전, 즉 절단작전을 감행했다. 원주~춘천 방향으로 공격을 계속하여 적을 동서(東西)로 절단한 후, 서울의 중공군 주력을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중공군은 이 같은 상황을 조기에 알아차리고, 후방으로 철수해 버렸다.
서울에서 중공군의 주력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한 제8군사령관은 서울탈환을 결심하고, 미 제1군단장에게 “3월 15일을 기해 서울 북쪽의 주요 고지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장은 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준장에게 1개연대 규모로 북한산을 점령케 하고, 미 제3사단은 1개대대 규모로 용마산(현 중랑구 면목동)을 점령토록 했다.
국군의 서울탈환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지난해 전쟁이 발발한 이후 불과 3일만인 6월 28일 북한군에게 내주었던 서울을 인천상륙작전과 치열한 시가전 끝에 93일만인 9월 28일 탈환했었다. 그런데 두 번째의 수복작전은 지난 1월 4일 중공군에게 내어준 후 71일만에 시가전 없이 무혈점령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1차 탈환 때 있었던 것과 같은 대규모의 서울 수복행사를 열지 않았으며, 각종 홍보매체를 동원하여 서울의 생활여건이 개선될 때까지 시민들이 복귀를 자제해주도록 호소했다. 아울러 당시 전황으로 볼 때 “또 다시 서울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서울수복 후에도 정부의 기능은 한동안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수행되었다. .
국군과 유엔군이 예상보다 빨리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전쟁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한국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수 있었으며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국가들에게 “중공군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결코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한편 미국과 자유진영의 전쟁 지도부는 1951년 2월 1일 유엔의 결의를 통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이어서 서울을 탈환하여 전쟁의 자신감을 되찾았지만 전선이 38선 가까이 접근하자 여전히 불투명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과 함께 “한반도의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있다”는 우려 때문에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라는 전쟁 초기의 계획을 ‘명예로운 휴전’으로 수정하게 된다.
“38선에서 멈춰 설 것인가, 38선을 넘어 계속 진격할 것인가?”
“전장(戰場)을 만주까지 확대하여야 한다”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의 굽히지 않는 확전론(擴戰論)과 워싱턴의 제한전쟁론(制限戰爭論)이 충돌했다.
그 결과 맥아더 원수가 1951년 4월 11일자로 해임됨으로써 한반도의 전쟁은 “38선 부근에서 명예로운 휴전으로 끝낸다”는 정책으로 굳어져 버렸다.
1950년 10월 01일, 오전 11시 45분 1차 3.8선 돌파
http://kr.blog.yahoo.com/pershing11111/1382484.html?p=1&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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