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2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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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goopie The Glad

A Story of Korea and Her Children


Jean Perry

S.W. Patridge & Co
London



호주 장로 교회에서 1889년 파견된 J. H. Davis 선교사가 부산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다.

불행하게 1년 만에 천연두(손님)과 폐염으로 사망 한다.


그에 자극 받은 호주 장로교 부인회에서 3명의 독신녀 선교사(Jean Perry 포함)파견 한다.

이 녀 선교사들은 고아 3명을 교육 시작한다.

"이 아이들을 교육 시켜 장성한후에 자기동족에게 선교할수 있게 하게 함이라".

Jean Perry 가 책임을 맡았다.


1895년 13명으로 늘어 났으나 Perry양이 종교적 견해 차이로 그만 두고 귀국 하다.

다음해 다시 입국하여 서울에서 고아원을 시작한다.


이 책은 그때 상황을 기초로 쓴 글이다.


http://medhist.kams.or.kr/1997/1.pdf

호주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1889년 데이비스(Joshep H. Davies, 덕배시) 목사를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가 선교지에 도착한지 불과 6개월 만에 순직하자 다시 맥케이(James H. Mackay, 맥목사) 목사 부부와 3명의 미혼 여선교사, 곧 멘지스(Belle Menzies, 민지사), 페리(Jean Perry), 퍼셋(Mary Fawcett, 맥부인) 등 모두 5명의 2진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호주선교사 2진은 1891년 9월 5일 극동으로 가는 배를 타고 호주 시드니항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약 40일 간의 항해를 거쳐 부산에 도착했다.


1891년 10월 14일 맥카이 목사는 빅토리아 주 청년 연합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미 서울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부산에서 사역을 시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10월 12일 도착하였고 이곳에 두 분의 선교사님이 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분은 캐나다에서 오신 하디(Hardie)라는 의사이시고, 다른 한 분은 미국 북장로교에서 오신 베어드(Baird)라는 안수 받은 목사입니다. 이 두 분은 잠시 서울에 계셨으나 부산을 관문으로 하여 이 지방에서 사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오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 두 분의 환대와 도움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20일 동안 하루 2불씩의 사용료를 내는 조건으로 일본인의 집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집이라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결과였습니다. 이 주택은 우리가 머물기 좋은 곳이지만 임대 기간을 연장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염려하고 있습니다. 부산에는 외국인이 살기에 마땅한 집이 없으며 일본인들의 집을 얻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한국 정부 당국은 외국인들이 이곳에 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집주인들로 하여금 그나마도 몇 안 되는 비어 있는 집들조차도 빌려주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디 의사는 세관원(외국인)에게 의료 활동을 하기 위해서 비어있는 집 하나를 얻도록 이제야 허락받았습니다. 베어드씨는 주택을 짓고 있으며 그 동안 그의 부인은 서울에 있고, 자신은 하디 의사와 함께 기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산에서 선교 지역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곳은 사실 일본인 도시(Japanese town)입니다만 많은 인구의 한국인이 이 주변에 살고 있고,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아직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었던 내륙 지역으로 확장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서울은 여러 선교 단체들에 의해 이미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산은 동해안을 따라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곳에 (선교관을) 건축하지 않으면 이 지역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부산은 조약을 체결한 항구(treaty port)이기 때문에 한국 정부로부터 땅을 사기가 용이하고 또 값싸게 매입할 수 있습니다. 건축 자재와 기술자들은 흔치 않고 임금도 높습니다. 5백 파운드 이하로 집을 세우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건축이 시작되기까지 이 지역을 확보하기에는 더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 주택 임대는 2주 후에 만기가 됩니다. 우리는 턱없이 높은 임대료를 내고 있지만(임대료는 선불임) 재계약을 할 수 있을지조차도 걱정입니다…”



호주 선교사 2진 5명 중 멘지스와 페리는 부산 영도에 위치하고 있던 하디 집에 기거하게 되었고, 맥카이 목사 부부와 퍼셋양은 임대한 일본인 주택에 기거하였다. 처음에는 20일을 임대하였고 연장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으나 다시 월 40불을 임대료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3개월을 연장하여 이곳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3개월 후인 1892년 1월 맥케이 선교사의 부인 사라(Sara)가 폐렴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호주장로교회의 두 번째 희생이었다. 사라의 유해는 부산 앞바다가 굽어보이는 복병산 데이비스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1892년 2월 5일 베어드의 일기에 의하면 10피트도 안 되는 작은 방 4개에 하디 부부, 베어드 부부, 맥케이, 3명의 처녀 선교사들, 한국어 선생, 일본인 하녀가 거주했다. 호주 선교사들은 그해 어렵게 겨울을 지내야 했고, 이와 같은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맥케이와 케리 양이 신경쇠약으로 심하게 고생했다.

여선교사들은 고아 2명을 양육할 책임을 지면서 교육시켜 선교사로 양성하려 하였다.

호주 여선교사들은 진 페리(Jean Perry) 양의 책임 아래 고아들을 양육하기 시작해 1895년 고아의 수가 13명이 되었다. 여선교사들은 1897년 첫 신자 심서방의 부친으로 하여금 남자아이들을 가르치게 하여 1897년 남자 학교가 설립되었다.












Posted by qlstn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