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군복무를 마치고 공무원 임용을 기다리던 묄렌도르프(P.G. von Mollendorff)에게 연방정부 인사 담당자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청국 해관에서 독일인 직원을 구하는데 지원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할레대학에서 법학, 언어학, 동양학을 공부한 묄렌도르프는 외교관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청국 해관에서 몇 년 일하다 보면, 청국 주재 독일공관에 외교관으로 임용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해 9월, 묄렌도르프는 200파운드의 선금과 임명장을 받아 들고 머나먼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22세 야심만만한 독일 청년은 중국이 자신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줄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상하이에는 4000여 명의 유럽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직장인 상하이 해관만 해도 영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노르웨이인 등 17명의 유럽인이 근무하고 있었다. 상하이는 유럽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목 받을 수 있는 도시는 아니었다. 상하이 해관에서 근무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묄렌도르프는 차 무역의 중심지 한커우(漢口)로 전출되었다.
묄렌도르프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해관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과외선생을 구해 부지런히 중국어를 익혔다. 어릴 때부터 외국어 능력이 탁월했던 그는 대학 시절 이미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등 8개국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중국어를 배운 지 불과 몇 해 만에 자유롭게 필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한문 실력이 늘었고, 어지간한 방언도 알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영국인이 장악한 청국 해관에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중용할 리 없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했지만, 한커우의 영국인 해관장은 그를 3년 동안 실컷 부려먹고 주장(九江)으로 내쳤다.
그를 지탱하게 한 것은 중국어 실력이었다.
1874년 5월부터는 북경주재 독일영사관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1879년 천진주재 독일부영사로 임명되었으나, 1881년 상해주재 독일영사관의 하위직으로 좌천되자 1882년 7월 독일외무부를 떠나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러 천진으로 왔다가,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조선의 문호개방에 필요한 서양인 전문가를 알아보던 이홍장(李鴻章)에게 발탁되었고,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관리로 임용된 다.
사연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정부는 급박한 주변정세에 대응하고 각국과의 수교 및 상업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청에 제3국인 고문관 초빙을 요청했다.
이때 이홍장(李鴻章)은 穆麟德( 밀렌도르프의 중국 이름)을 추천한다.
그는 한국 최초의 서양인 고문으로 부임-월봉 해관은화(海關銀貨, Tael) 300량(兩, 37.783g-해 통리아문의 외무협판이 되어 외교고문 역할을 담당했다(고종19년 11월 17일). 또한 해관총세무사(海關總稅務司)가 되어 해관 신설 등 통상무역 업무도 총괄했다.
리홍장은 이 독일인을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한반도에 있어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를 희망했는데, 당시 청나라는 1882년 서울에서 일어난 임오군란을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수 있었다.
목인덕은 능숙한 한문(漢文)으로 조선정부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1884년 조·러 수교를 위해 톈진[天津]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Waeber)가 내한하자 적극 주선에 나서, 7월 7일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는 데 일조했다.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 군대가 개화파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씨정권을 복귀시키는 데 앞장섰다.
1885년 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자 갑신정변의 해명과 김옥균 등 일본으로 망명한 주모자들의 송환을 위해, 특명 전권대신 서상우(徐相雨)와 함께 부사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 이때 고종의 허가를 받고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Davidoff)와 러시아 훈련교관 초빙문제를 비밀리에 협의했다.
그런데 군사교관 초청문제는 청·일의 후원과 권고에 의해 미국교관을 초빙하기로 하고, 이미 교섭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김윤식 등 정부 관리들과 청·일 양국의 강한 반발을 샀다. 그에 따라 6월 외무협판에서 해임되었고,
이어 7월에는 해관총세무사에서도 해임되어 조선을 떠났다. 그후 청의 닝보[寧波]에서 죽었다. 저서로 〈만주어문전 滿洲語文典〉이 있다.
穆麟德은 한국에서는 한자음 그대로 목인덕이라는 불리웠으며, 조선 관리의 복장을 착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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