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50'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07.01.09 여순사건 반민특위 김구암살
  2. 2007.01.09 좌우대립
  3. 2007.01.09 3.8선 이남에는 미군이
  4. 2007.01.09 해방
2007. 1. 9. 21:47
여순사건(1948.10-1949)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73)
1948년 10월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붙잡혀 온 여수여고 학생들.
반민특위 투서함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38)
1948년 10월 전남 광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전라남도 조사부에 설치한 투서함에 투서하는 모습.
국회는 1948년 9월 7일, 전문 3장 32조로 된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정부가 9월 22일 공포하였다.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자 박흥식을 제1호 체포한 반민특위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월 22일 노덕술을 구속하였다. 5월 20일 반민족행위자 처단 사업을 추진하던 이석원 의원등 세 명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반민법 시행을 반대하던 세력은 5월 31일 파고다 공원에서 '민중대회'라는 무허가 집회를 열고 구속의원의 석방결의안에 찬성한 88명의 국회의원을 공산당이라고 몰아붙였다. 6월 4일에는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과 종로서 사찰과 주임을 반민족행위자 피의자로 체포하였다.
끌려가는 반민족자들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76)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의 발효로 친일파들이 포승에 묵여 법정으로 끌려갔다. 1949년 2월 끌려가는 친일파들, 앞에서 세번째가 3.1 독립선언에 서명한 33인의 한 사람인 최린.
반민특위 기습사건(1949.6.6)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중간 사진)
반민특위 기습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에서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사진은 6.25 당시 노덕술이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던 모습이다.
김구암살(1949.6.26)
(문화일보, 백범김구의 겨레사랑,1995, 120)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서대문 경교장 2층 서재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 당한 직후의 백범 김구. 7월 5일 국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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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9. 21:44
미소공위(1946.3, 1957.5)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30)
모스코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 공위' 절차를 토의하는 미측의 하지 중장(왼쪽)과 소측의 스티코프 중장.
아이 업은 아이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58)
동생을 등에 엎고 사과를 파는 소녀 행상의 모습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팍팍한 삶의 현실을 볼 수 있다(1947년 10월)
쌀공출(1946)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40)
1946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공출하는 광경.
9월 총파업(1946.9)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93)
사진은 1947년 4월의 철도 노조원들의 집단 시위. 46년 9월 총파업 때도 시위 양상은 비슷하였을 것이다. 9월 총파업 관련 사진을 구하지 못하여 이 사진을 대신 넣었다.
1946년 9월 27일 '남조선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 사무실. 대구에 있는 각 산별노조 간부들과 청년들이 이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간부가 아닌 노조원들은 직장 안에 있는 노조사무실에 모여 구호와 노래로 분위기를 띄웠다. 노동자들은 다 같이 '쌀을 다오 !' '일급제 반대 !' '임금인상!' 등의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그리고 각 직장노조 사무실이나 투쟁위원회 사무실 앞에 모여 '적기가'와 '해방의 노래' '농민의 노래' '인터내셔날가', 그리고 '나아가자 조선' 등의 투쟁가들을 함께 불렀다.(정영진,{폭풍의 10월},한길사.).
'쌀획득투쟁'이 온나라 곳곳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던 1946년 7월과 8월, 주로 기관차 와 차량을 고치던 '서울 철도국 경성공장'에서도 전평의 분회대표를 중심으로 쌀배급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은 '적자타개와 노동자관리의 합리화'라는 핑계를 대면서 운수부 종업원 25 %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방침을 밝혔다. 노동자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가슴에 묻어둔 투쟁의 불씨에 기름을 부운 셈이었다. 드디어 9월 13일 경성공장 노동자 3천 700여명은 태업에 들어갔다. 16일 노동자들은 요구사항을 문서로 만들어 미군정 운수부장에게 전달하고 21일까지 성의있는 대답이 없으면 파업한다고 통고했다. 19일부터 부산철도 당국에 같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부산철도공장 노동자 약 7천명이 23일 오후 1시 파업에 들어가면서,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의 1만 5천명 철도노동자들이 부산노동자들에 호응하여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곧 전국 철도노동자들로 번져 4만명이 참가함으로써 모든 열차가 멈췄다. 9월 26일 전평은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남조선의 4만 철도노동자를 선두로 일대 민족투쟁을 전개한다."는 '총파업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와 함께 정치범 석방, 반동테러 배격, 정간된 신문의 복간과 구속된 사원 석방, 지명수배와 체포령 철회 등을 요구했다. 이것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함께 벌인다는 전평노선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9월 28일부터 10월초까지 서울의 중앙전신전화국,우체국,경성전기주식회사, 부산전신국등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남한 일대의 운수와 통신기관은 마비되었다. 이밖에 10월 2일 인천부두노동자 3천명이 파업하고, 출판부문노동자도 파업했다. 전평의 아성인 조선해원동맹 산하 선원은 인천 목포 부산 등 항구에서 실업선원생활보장을 요구하며 9월 27일부터 태업을 하고 10월 3일 파업에 들어갔다.(김사옥, {한국노동운동사}, 산경문고)
9월 총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얼마일까. 그때 통계들은 서울에서만 295개 기업에서 파업이 일어나 3만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하고, 1만 6천여명의 학생들이 동맹휴학했으며 남한 전체로 보면 25만 1000여명 노동자가 파업에 참가했다 한다. 또 다른 자료는 서울 6만 5천을 비롯 남한 전체에서 26만 4000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한다.( 성한표, [9월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전환] {해방전후사의 인식} 2) 이 9월 총파업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큰 총파업이었다.
미군정이 파업노동자를 가장 크게 친 것은 '남조선 총파업투쟁위원회'가 있던 용산 경성공장을 습격한 사건이다. 장택상 수도청장이 지휘하는 2천명 남짓한 경찰들은 농성하던 2천 철도노동자를 30일 새벽 2시에 공격했다. 그리고 '애국청년단'과 '대한노총'사람들이 농성장에 들어가 두명을 죽이고 1400여 파업노동자를 검거했다. 이때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큰 몫을 했다. 김두한은 이렇게 떠벌였다.

" 여러곳에 숨어있던 전평원을 색출, 창고에 몰아넣고 점검해보니 2000여명이나 되었다. ......너희들 중에 이번 파업간부를 뽑아내어라. 안 그러면 할 수 없다. 개솔린을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 ..... 모든 철도원에게 즉각 취업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직장에 복귀하지 않으면 가족까지도 몰살해버리겠다고 말한 후 서약시켰다."

그때 대한노총 영등포 기계제작소 분회 선전부장이었고 이 작전에서 후문 소대장을 맡았던 김말용씨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30일 아침부터 영등포지역 대한노총원들과 함께 출동하여 외부세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비를 섰습니다. 후문 쪽에서는 김두한이가 쌍권총을 들고 서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지요." " 9월말인데도 파업노동자들을 구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가 반소매의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총격전에 밀린 흰소매부대들은 마포강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우익들이 그 뒤를 쫒아가면서 총을 요란하게 쏘아댔습니다. 총을 피해 강으로 뛰어든 사람도 있고 사살된 사람도 수십명이 되었습니다.({월간노동자}, 1989년 창간호.)(최규진)

10월 인민항쟁(1946.10)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63)
사진은 '대구폭동'의 중심지가 됐던 대구역 광장 앞의 상가 건물.
쌀 지키는 의용 경찰대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43)
'대구폭동' 이후 각 지역별로 청년단원을 동원, 의용경찰대를 동원하여 쌀을 지키는 모습.
조선민족청년단(1946.10)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36)
전라남도당 결성식(1947년 여름). 앞줄 맨 왼쪽에 있는 이가 뒷날 신민당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녹영. 우익 단체인 민족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은 국방군에 병력을 공급하는 주요 원천이 되었다.
남조선 노동당 결성(1946.11.23)
(중앙일보사, 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1992, 239)
1946년 밀담을 나누고 있는 박헌영과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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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qlstnfp
2007. 1. 9. 21:42
미군 진주 1 (1945. 9. 8)
(브루스커밍스.존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22)
해방된 한국에서 정치적 폭력으로 인해 죽은 첫번째 한국인 희생자. 9월 8일 미군이 상륙할 때 일본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는데 피살자는 아마도 그날 죽은 노동조합 지도자인 권병권이거나 평화운동 활동가인 이석구 중 하나일 것이다.
미군진주 2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24)
열차편으로 서울역에 도착, 시내로 들어오고 있는 미 7사단 32보병 연대. 주위의 삼엄한 경계로 행인은 보이지 않는다.
일장기하강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85)
1945년 9월 9일, 아베총독의 통치이양문서 서명과 동시에 서울에 진주한 미 7사단 32보병 연대가 총독부 광장의 계양대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리고 있다.

성조기게양

(조선일보사,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1988, 25)
총독부 건물 앞에 걸렸던 일본기가 내려지고 미군악대의 연주속에 미군기 게양.
임정귀국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29)
임정 요인들은 미군정의 뜻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1진이 1945년 11월 23일 귀국하였고, 12월 2일 귀국하였다. 사진은 임정요인 2진 귀국 기념(12월 3일). 앞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가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뒷줄 왼쪽 두번째 황학수, 성주식, 김성숙, 김상덕, 유림, 조경한, 김봉준, 유동열, 김원봉.
모스크바삼상회의 왜곡 보도(1945.12)
(역사학연구소, 바로보는 우리역사 2, 거름, 144)
모스크바삼상회의를 왜곡 보도한 동아일보 1945년 12월 27일자 기사. 동아일보는 소련이 모스크바 결정안을 주도하여 한국에 대해 신탁 통치를 결정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는 한국 현대사의 최대 왜곡 보도였다고 할 수 있다.
신탁통치반대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204)
모스크바 삼상회담 결정 지지
(한길사,한국사-17, 1994, 26)
소집점호시의 국립 경찰(1946)
(브루스커밍스.존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33)
친일경찰도표(1946.11)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상, 청사, 1986,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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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게양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눈빛, 1991, 6)
1945년 8월 전남 광양서국민학교 교정에 일장기를 변조해 만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출감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4, 25)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와 해방 만세를 외치는 독립투사들과 형무소 앞에 모인 군중들이 해방의 기쁨에 환호하고 있다.
서울거리시민들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90)
1945년 8월 16일,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를 메운 120만 서울 시민들.
여운형과 건준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하, 1987, 195)
해방 다음날 8월 16일 휘문중학교에서 '건준' 여운형 위원장을 환호하는 시민들. 여운형은 이날 '정치집회 제1호'를 열어 해방의 의의와 민족의 나갈 길에 대해 연설하였다.
지방인민위원회
(브루스커밍스.존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 태암, 1989, 23)
김순남 '해방의 노래'
(한길사,한국사-17, 199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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